★ 수호지(水湖誌) - 100
제11장 흑선풍 이규
제41편 가짜 흑선풍 41-2
이규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양산박의 주귀였다.
두 사람은 술집으로 가서 조용한 방에 자리를 잡았다.
주귀가 이규에게 말했다.
“참! 어이가 없군. 벽보에 송강을 잡으면 상금이 1만 관이요, 대종을 잡으면 5천 관이요, 이규를 잡으면 3천 관이라 써 있는데, 어떻게 당사자가 태평스럽게 그 앞에 서 있단 말인가?
만약 눈치 빠른 군관 놈에게 잡히면 어쩌려고 그러나? 송공명 형님께서 자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까 염려해서 나를 뒤따라 보냈네.”
“쫓아와 보나 마나지. 형님 말씀대로 난 아직 술 한방울 입에 안 댔네. 한데 자넨 이 술집을 어떻게 아는가?”
“여긴 바로 내 아우 집일세.”
주귀가 아우 주부를 인사시키고 술상을 준비시킨다.
그러자 이규가 말한다.
“송강 형님과 술 먹지 않기로 했지만 무사히 고향에 돌아왔으니 술 한 잔 마셔도 괜찮지 않겠나?”
주귀는 말리지 않았다.
날이 저문 후에도 그들은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서야 이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길로는 가지 말게. 좀 돌더라도 동쪽 큰 길로 나가서 곧장 백장촌(白丈村)을 향해 가면 동점(童店)이 나타날 걸세. 집에 가면 모친을 모시고 이리 오게. 함께 산채로 가도록 하세.”
그러나 이규는 주귀의 말을 듣지 않고 산길로 갔다.
수십 여 리쯤 걸었을 때 먼동이 틀 무렵 숲에서 토끼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이규가 쫓아갔지만 토끼는 큰 나무들이 빽빽한 수풀로 들어갔다.
때는 마침 가을이라 잎새들이 모두 단풍으로 물들었다.
이규가 수풀로 뛰어드는 순간 사람이 튀어나왔다.
“이놈, 통행세를 내고 가라.”
이규가 눈을 들어 보니 붉은 명주 두건을 쓰고, 거친 베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손에 도끼 두 자루를 들고 서서 외쳤다.
“나는 흑선풍 어른이다. 죽기 싫거든 돈을 내놓아라.”
그 말을 듣자 이규는 웃음이 나왔다.
도적이 흑선풍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러베 잡놈 같으니라구, 어떤 놈인데 함부로 내 이름을 쓰느냐?”
이규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짜 흑선풍이 진짜 흑선풍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짜 흑선풍이 달아나려다가 다리에 칼을 맞고 그대로 땅바닥에 나자빠지자, 이규는 놈의 가슴을 밟고 섰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그놈이 땅바닥에 깔린 채로 싹싹 빌었다.
“제발 살려 줍쇼.”
"네 이놈, 듣거라. 너 같은 좀도둑이 어른의 이름을 더렵혔으니 너 같은 놈은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다.“
"용서해 주십시오. 집에는 여든 살이 된 노모가 혼자 계십니다. 제가 죽으면 노모는 굶어죽게 됩니다.“
이규는 어이가 없어 잠시 생각하다가 은자 한 냥을 쥐어주고 좀도둑을 쫓아버렸다.
그가 어둠속을 헤집고 가고 있을 때 저편 멀리 산골짜기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그 집을 찾아가자 안에서 한 아낙네가 나왔다.
여자는 머리에 한 떨기 들꽃을 꽂았고, 얼굴에는 연지와 연분을 발랐다.
“아주머니, 지나가는 나그네요. 돈을 낼 테니 술과 밥좀 주시오.”
아낙네가 이규의 행색을 잠깐 훑어보고 말했다.
“술을 없지만 밥은 해 드리죠.”
아낙네는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는다.
이규가 잠깐 기다리는 사이 저쪽에서 한 사내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
이규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때 아낙네가 사내를 보고 묻는다.
“여보, 어디서 다리를 다쳤어요?”
“조금 전 진짜 흑선풍을 만나 죽을 뻔했소. 노모 핑계대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는 길이오.”
그러자 아낙이 손을 내저으며 은밀히 말한다.
“조용히 해요. 조금 전에 누군가 집에 와서 밥을 해 달랬어요. 그 녀석이 틀림없어요. 약을 타먹이고 정신을 잃거든 요절을 내버리고, 돈 가지고 읍내로 튀는 게 어때요?”
이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자 뛰쳐나가 사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아낙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달아났다.
이규는 사내를 땅에 메다꽂고 허리에서 칼을 빼들어 한칼에 목을 자른 다음 계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규는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떠났다.
- 101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