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42화
2021. 7. 24. 06:58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42화
☞ 광무산 대전
한편, 항우도 이날은 결판을 낼 생각에서 계포와 함께 선두로 달려 나와 큰소리로 외친다.
“내가 한왕에게 할 말이 있으니 한왕은 이리 나오라.”
그러나 한왕 대신에 한신이 달려 나가 말한다.
“무슨 말인지 용무가 있거든 내게 말하시오.”
항우는 한신을 보자 꾸짖듯이 외친다.
“그대는 본시 나의 부하가 아니었더냐? 나는 무섭을 보내 그대를 나에게 돌아오라고 종용했거늘 그대는 끝내 내게 돌아오지 않고, 오늘 나와 직접 승부를 겨룰 작정이더냐?”
“폐하는 당대의 제왕이시오. 제왕이란 본시 외침(外侵)이 일어나게 되면 대장들로 하여금 막아내게 하는 법이거늘, 폐하는 어찌하여 직접 일선으로 달려 나와 싸우려고 하시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제왕이라기보다는 장군감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오?”
항우는 한신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 크게 분노하며 외친다.
“이놈아! 네 놈은 주둥아리만 열렸느냐? 네 놈이 나하고 싸워서 10합까지만 버틸 수가 있다면 나는 나의 모든 영토를 한왕에게 내 주겠다.”
“자고로 참다운 용장은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오. 폐하가 만일 나에게 진다면 영웅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게 아니오? 그러니 차라리 다른 장수를 내보내고 폐하는 진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어떠하겠소?”
폐하라는 정중한 지칭 뒤에 비아냥거리는 한신의 소리를 듣던 항우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장극을 번개 치듯 휘두르며 한신에게 맹호처럼 덤벼들었다.
한신은 2, 3합쯤 싸우다가 대번에 못 견디는 척하고, 광무산(廣武山) 방향으로 쫓기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맹렬히 추격해 가며,
“내가 오늘은 저놈을 반드시 생포하여 원한을 풀겠으니 삼군은 총동원하여 나의 뒤를 따르라!”
하고 명했다.
그 명령에 따라 항백, 항장, 주란, 주은, 우자기, 종이매, 환초, 정공, 옹치 등 모든 대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항우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한신은 잡힐 듯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아니하고, 자꾸만 광무산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한신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종이매가 급히 따라오며 항우에게 간한다.
“폐하! 산속에는 나무와 숲이 우거져 복병이 있을지 모르니 추격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항우는 워낙 격분한지라 종이매의 간언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한신이란 놈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멈추다니 그대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러던 항우는 한신을 추격하다가 깊은 숲속에서 그만 한신의 뒤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한신의 행방을 찾고 있노라니까 문득 배후에서
“대왕 전하! 우리의 후속 부대가 적장 번쾌와 관영에게 여지없이 격파되었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뭐야? 후속 부대가 적에게 당했다고?”
항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전방에서 일발 방포 소리가 울리더니 사면팔방의 숲속에서 한나라 군사들이 진고를 두드리고 함성을 요란스럽게 울리며 구름 떼 같이 몰려나와 항우를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용맹한 항우도 이때만은 크게 당황하였다.
종이매가 급히 달려와 말한다.
“앞길은 산으로 가로 막혔고, 사방에서는 적군이 벌떼처럼 아우성을 치고 덤벼오고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이옵니까?”
항우가 비장한 각오로 말한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는 끝까지 한신을 추격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가자! 앞으로 가자!”
항우가 험준한 산길을 얼마쯤 달려 올라가노라니 또다시 숲속에서 방포 소리가 들려왔다.
방포 소리와 함께 함성을 울리며 북쪽에서는 번쾌, 관영, 주발, 조참의 부대, 서쪽에서는 근흠, 노관, 여마통, 양희의 부대, 좌측에서는 장이, 장창의 부대, 우측에서는 하후영, 왕릉 부대가 들고 일어났고, 저 멀리 후방에서는 한왕 자신이 군사들을 몰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항우는 크게 화를 내며 종이매, 항백과 함께 저돌적으로 반격을 가하며,
“내 지난날 진나라의 대군도 격파한 일이 있거늘, 어찌 한나라 군사 따위에게 쫓길 것이냐?”
하고 몰려오는 적병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며 앞으로 달려 나오려 하자, 문득 구강왕 영포가 앞을 가로막는다.
항우는 영포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이 역적 놈아! 네 놈이 무슨 낯짝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느냐?”
그러자 영포는 장검을 꼬나 잡으며 외친다.
“당신은 나를 시켜 의제를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모두 나에게 뒤집어씌우지 않았더냐? 나는 오늘 그 원한을 풀려고 왔노라!”
항우와 영포가 단독으로 맞붙어 싸우기를 50여 합.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때 번장과 누번이 한 무리의 군사를 몰고 싸우고 있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를 도우려고 급히 달려오던 환초와 계포가 그것을 보며 항우에게 외친다.
“폐하께서는 뒤로 물러가 계시옵소서. 저놈들은 저희가 해치우겠습니다.”
항우는 싸움을 물려주고 언덕 위로 말을 달려 올라갔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초나라 장수 계포와 환초가 한나라 장수 번장과 누번 간에 네 명의 장수가 두 패로 나뉘어 창검에 불꽃을 튀기며 백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용맹함이 난형난제하여 좀체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영포, 조참, 시무 세 장수가 많은 군사들을 몰고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계포와 환초를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초장 종이매는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항우에게 달려와 급히 말한다.
“폐하! 전세가 불리하여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광무산으로 올라가는 소로(小路)가 저기 있사오니 우선 산성으로 속히 피신하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산상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정작 산상으로 올라오며 보니 한신은 저 멀리 산꼭대기에 있는 정자(亭子)에서 홀로 앉아 한가롭게 술잔을 부어 놓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그 광경을 보자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종이매에게 명한다.
“한신이란 놈이 나를 모욕하려고 일부러 저따위 짓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도다. 그러니 모두들 뛰어올라 저놈을 붙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항우를 따르던 군사들이 한신을 잡으려고 산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신의 주위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나 일시에 바위와 통나무들을 연방 굴려 내렸다.
이에 산상을 기어오르던 초군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그리고 몸소 산상으로 달려 오르려고 하며 말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나 혼자서라도 달려 올라가 저놈을 물고를 내고야 말겠다.”
이때 종이매가 급히 달려와 말고삐를 움켜잡으며 간한다.
“폐하! 한신이 저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은 폐하를 노엽게 만들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일단 후퇴했다가 후일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
“폐하께서 산상으로 올라가시기만 하면 적은 철포와 화전(火箭)을 빗발치듯 퍼붓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가 종이매의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으며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적은 항우가 도망가려는 눈치를 채고, 일시에 화전을 빗발치듯 퍼부어 산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항우는 불을 피하여 급히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를 달려 내려오노라니 이번에는 적장 누번이 한 무리의 군사들과 함께 앞길을 가로막으며 외친다.
“역적 항우는 어디로 가느냐? 목숨이 아깝거든 이 자리에서 항복하라!”
항우는 악이 받칠 대로 받쳐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누번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아! 너는 역발산기개세의 항우를 못 알아본다는 말이냐?”
항우와 누번은 정면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번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누번이 항우와 7, 8합을 겨루다가 항우의 철퇴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멀리서부터 시무와 왕릉이 비호같이 달려오며,
“항적(項賊, 항우의 본명)은 죽지 않으려면 항복하라!”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한신이 군사들을 어떻게나 용의주도하게 분산 배치해 놓았는지 항우가 가는 곳마다 한나라 군사들이 몰려들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눈물을 머금고 또다시 얼마를 쫓기다 보니 날이 저물어 달빛이 훤히 밝은데, 산골짜기의 강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강물은 깊고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그냥 건널 수가 없었다.
‘아아! 앞은 강이 가로막고, 뒤에서는 적이 추격해 오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항우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번에는 엉뚱한 방향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자신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네놈들은 누구냐?”
항우는 자신도 모르게 전투태세를 갖추며 외쳤다.
그러자 두 명의 장수가 가까이 다가오며,
“폐하! 저희들은 주은과 환초이옵니다. 폐하께서 쫓기신다는 소리를 듣고 폐하를 도우려고 급히 달려왔사옵니다.”
“오오, 그대들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고맙다, 고마워!”
항우가 부하 장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우는 주은과 환초가 거느리고 온 5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또다시 도망쳤다.
도망을 치다 날이 밝은 다음에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광무산에는 가는 곳마다 한군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머금으며 주은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날까지 여러 천 명의 장수들과 3백여 회의 대전을 치러 왔지만, 한신처럼 용병술이 능한 장수는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주은이 대답한다.
“한신은 폐하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리할 자신이 없어서 계획적으로 우리를 산속으로 유인하여 복병작전을 썼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여기서 지체하시다가는 또다시 당하시게 될지 모를 일인 바, 이곳을 빨리 벗어나시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재기를 노리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산을 돌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산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 깊은 숲속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또다시 함성을 울리며 들고일어나
“항적은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 네 목 위에 얹힌 하나도 쓸데없는 대가리를 우리에게 빨리 바쳐라!”
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하도 여러 차례 당하는 일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공격 태세를 갖추며,
“네놈들은 어떤 놈들이냐?”
하고 고함을 질러대자, 두 명의 장수들이 저만치서 말을 우뚝 멈춰 서더니
“우리들은 한나라의 대장 주발과 주창이다. 우리들은 한왕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네 놈의 머리를 가지러 왔노라!
그러니 너는 아무 소리 말고 모가지를 길게 내밀어라!”
하고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항우는 이제껏 듣지 못했던 너무나도 모욕적인 말에 울화가 불끈 치밀어 올라서
“이놈들아! 네놈들의 목은 내가 잘라 주겠다!”
하고 외치며 폭풍같이 덤벼들었다.
그러자 주발과 주창은 2, 3합쯤 싸우다가 날쌔게 쫓겨 달아난다.
워낙 지독한 욕설을 들은 항우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가는데, 돌연 또다시 철포소리가 ‘쾅’하고 울렸다.
이번에는 사방에서 복병들이 들고 일어나 항우를 에워싸고 총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근흠과 노관이 거느린 복병이었다.
여기서 양군은 일대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들은 사전에 매복하고 지형을 익혀두는 등 사전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군은 지리멸렬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항우는 적장 근흠과 노관에게 각각 깊은 상처를 안겨 주기는 하였으나 결국은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지는 못하였다.
결국 항우는 이들을 계속하여 쫓지 못하고 다시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려가면 달려가는 대로 어디선가 계속 화살이 날아와 항우는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렇게 20여 리를 쫓겨 가니 항우를 따라오던 주은과 환초도 무수한 상처를 입고 항우 앞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항우는 발을 구르며 탄식한다.
“내 한평생을 전야에서 살아왔지만, 이렇게 당해 보기는 처음이다.”
마침 그때, 계포와 종이매가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쫓겨 왔다.
그들도 역시 5천여 명이던 군사가 1천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항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은 일단 본진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내 조만간 한신이란 놈에게 오늘의 설욕을 갚고야 말겠다.”
한편, 한신은 완승(完勝)을 거두고 나자, 즉시 한왕에게 달려가 승전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한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원수의 신출귀몰한 작전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와 같은 승전을 거둘 수가 있었으리오!
이제 앞으로 항우는 ‘한나라 군사’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감히 싸우지를 못할 것이오.”
“모든 것이 대왕 전하 천위(天威)의 덕택인 줄 아뢰옵니다. 그러나 항우를 이번 싸움에서 완전히 패망시키지 못한 것은 천추의 유한이오니, 이 기회에 항우를 계속 공격하여 초나라를 완전히 평정하도록 허락을 내려 주시옵소서.”
“나는 원수만 믿겠소. 원수는 모든 계획을 뜻대로 수행하여 주시오. 나는 빨리 천하를 통일하여 모든 창생들을 도탄 속에서 하루속히 구해 주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리하여 한신은 토초작전(討楚作戰)을 또다시 세밀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 제 14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