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44 화
2021. 7. 26. 07:3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44화
☞ 초한(楚漢) 강화조약(講和條約)
태공이 항우에게 무참히 끌려가는 모습을 본 한왕은 본진으로 돌아오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태공이 오늘은 죽음을 면하셨지만, 언제 항우의 손에 돌아가시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오늘도 태공을 구출하지 못하였으니 나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막심한 죄인이로다.”
한왕은 탄식해 마지않으며, 본진으로 돌아와 곧 장량과 진평을 부른다.
“태공을 구출할 무슨 방도가 없겠소이까? 두 분께서는 반드시 태공을 구출해 올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 주소서.”
“태공을 구출해 올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한왕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아 장량의 두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자방 선생! 무슨 방법이 계신지 어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하고 애원하듯 재촉하자, 장량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초군은 지금 군량 사정이 매우 궁핍한 데다 군사들도 극도로 지쳐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가 유능한 변객(便客)을 보내어 태공을 반환해 오는 조건으로 강화(講和)를 제의하면, 항우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하리라 보옵니다.”
그 말에 한왕은 한 가닥 희망을 품으며 말한다.
“태공을 무사히 모셔오는 조건이라면, 항우에게 속히 강화를 제의해 보기로 합시다. 그러면 누구를 변객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이까?”
장량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한다.
“글쎄 옳습니다. 항우를 설득하려면 지혜와 구변이 무척 능해야 하겠는데, 지금 우리 진영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옵니다.”
그러자 저 멀리 말석에 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장량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항우에게 보낼 사람이 없으시다니 장량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옵니까? 소생을 보내주시면 소생이 항우를 설득하여 태공 일가족을 무사히 모셔 올 것이니, 아무런 걱정을 마시고 소생을 보내주시옵소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향해 보니, 말을 한 인물은 낙양에 살던 ‘후공(侯公)’이라는 노인이었다.
이 노인은 일찍이 한왕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 ‘동공 삼로(董公三老)’라는 세 사람의 노인들로부터 의제의 국장에 대한 충고를 들은 일이 있었던 노인들의 친구였다.
그 노인들의 추천으로 오늘날까지 한왕을 꾸준히 따라다니며 매사에 조언을 해주던 노인이었다.
한왕은 후공이 자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장량은 무척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후공에게 말한다.
“후공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항우는 성미가 급하고 괴팍스러워서 자칫하여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는 후공도 무사하기 어렵겠지만, 까딱 잘못하다가는 태공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청하여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선생처럼 항우를 겁내기만 하다가는 어느 누구도 그를 만나 교섭을 못하게 될 것 아니옵니까? 지금처럼 걱정만을 앞세워 차일피일 시간만 보낸다면 어느 세월에 태공을 모셔오게 될 것이옵니까?
소생은 주상(主上)의 후은(厚恩)을 받아온 지가 오래이오나 아직 이렇다 할 보답을 못했사오니 이번에 소생이 태공을 모셔 와서 그동안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한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량에게 말한다.
“후공의 결심이 매우 고마우니 후공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합시다. 나 자신이 항우에게 직접 강화요청의 서신을 쓸 테니 선생께서는 후공과 별도로 항우와의 교섭에 임하는 문제를 상의해 주소서.”
이리하여 후공은 한왕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항우를 만나러 초나라로 떠나갔다.
항우는 한왕의 사신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는 은근히 기뻤다.
이번에는 한군(漢軍)과 정면으로 싸워 보았자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우는 찾아온 사신에게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대장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좌우에 시립(侍立)시켜 놓은 후 자신은 장검을 차고 용상에 높이 올라앉아 후공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였다.
후공이 어전으로 가까이 다가와 보니 항우는 마치 성난 호랑이같이 눈알을 부릅뜨고 후공을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후공은 항우 앞으로 조용히 다가와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고,
“하하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기만 하였다.
그러자 항우는 발끈 화를 내며 꾸짖는 소리를 한다.
“그대는 한왕의 심부름을 온 자가 아니던가? 심부름을 온 자가 어찌하여 나를 비웃는가? 나의 칼이 무서운 줄을 그대는 모른단 말인가?”
그러자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폐하는 만승 천자(萬乘天子, 만 대를 이어 내릴 하늘이 내린 아들)로서 무위(武威)를 천하에 떨치고 계시는 어른이시온데, 누가 감히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으오리까?
소생은 일개 유생(儒生)으로서 재주에 있어서는 옛날의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 같은 현사(賢士)의 명성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촌로(村老)일 뿐이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소생에게 보란 듯이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폐하의 좌우를 혁혁한 대장들로 시립을 시켜 놓으셨으니 그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오리까? 소생이 실례를 무릅쓰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음...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그러면서 좌우에 시립해 있는 대장들을 굽어보며,
“한왕의 사신을 단독으로 만날 터이니, 그대들은 모두 물러가 있으라.”
하고 명하며, 자신도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풀어 앞에 내려놓자, 후공이 그제야 큰절을 올리니 항우는 절을 받으며 묻는다.
“한왕이 무슨 용무로 그대를 보냈는지 어서 용무를 말하라.”
그러자 후공은 한왕의 친필 서한을 항우에게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며 말한다.
“한왕께서는 초한 양국이 전쟁을 종식하고, 구정(舊情)을 돈독히 하시고자 소생을 일부러 보내셨습니다. 자세한 사연은 친필 서한에 적혀 있을 것이오니, 폐하께서 직접 읽어 보아주시옵소서.”
“음, 한왕이 나에게 강화를 요청해 왔다는 말이구려?”
항우는 그 자리에서 한왕의 서한을 펼쳐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 유방은 삼가 항왕 폐하께 글을 올리옵니다.
내 일찍이 듣건대, ‘하늘이 제왕을 보낼 때는 백성을 위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천명(天命)을 받들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70여 회나 싸움을 계속해 오면서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을 수십만 명이나 죽고 다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수 있사오리까?
이에 본인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후공을 보내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강화를 맺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홍구(鴻溝)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삼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삼아 제각기 독립 국가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군사들을 물림으로써 형제의 정리를 옛날과 같이 돈독히 하고자 제의하는 바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피차간에 부귀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리까?
이에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제의하오니 폐하께서는 재삼 숙고하시어 강화에 쾌히 응해 주시기를 거듭 바라옵니다.
한왕 유방 올림.
항우는 유방의 편지를 읽어 보고 속으로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군량이 부족하여 어차피 싸울 형편이 못 된다. 싸워서 승리할 자신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못 견디는 척하고 상대방의 요구대로 강화조약을 맺어주고, 팽성으로 돌아가 그리운 우미인(虞美人)과 더불어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항우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후공을 가까이 불러 말한다.
“나는 한왕과 끝까지 싸워서 자웅을 결할 생각이었소. 그러나 지금 이 편지를 읽어 보니 강화를 맺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그러면 나도 강화에 응하기로 하고, 내일 사신을 별도로 보내도록 할 터이니 귀공은 먼저 돌아가 한왕에게 나의 뜻을 전하도록 하시오.”
후공이 한왕에게 돌아와 항우와의 면담 결과를 상세하게 말하니 한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 날 항우는 약속대로 한왕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항우의 사신은 한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항왕 폐하께서는 강화조약을 정식으로 맺기 위해 한왕 전하와 직접 만나시자는 분부이시옵니다.”
강화조약을 맺기 위해서라면 한왕 자신이 항우를 직접 만나야 할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에 한왕은 항우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화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하려면 물론 우리 두 사람이 직접 만나야 할 것이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데는 두 가지의 선결 조건(先決條件)이 있소. 그것만은 반드시 지켜 주어야 하겠소.”
“선결 조건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한왕이 대답한다.
“첫째는, 우리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에는 무장병(武裝兵)이 단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강화조약을 맺고 형제의 의를 돈독히 하는 자리에 무장병이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감정을 소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항우의 사신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돌아가거든 폐하께 그 말씀을 꼭 여쭙겠습니다. 또 하나의 선결 조건은 어떤 것이옵니까?”
“또 하나의 조건이란, 우리 두 사람이 만나는 이 기회에 태공 내외분과 나의 내자(內者, 아내)를 모두 나에게 돌려주십사 하는 것이오. 화목을 도모하면서 나의 양친과 내자를 억류해 두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니 이 문제도 꼭 품고해 주시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항우의 사신은 대답에 난색을 표하면서
“그 문제 역시 소생으로서는 지당하신 말씀이신 줄로 아뢰옵니다. 하오나 소생이 직접 품고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오니 대왕께서 별도의 사신을 보내주시면 고맙겠나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알겠소이다. 귀공이 직접 여쭙기 어렵다면, 후공을 귀공과 함께 보내어 직접 청원하도록 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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