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41화
2021. 7. 23. 07:51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41화
☞ 신출귀몰한 한신의 전략
항우는 대군을 거느리고 광무로 이동해 오자, 팽성과의 수송로를 타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송로 확보를 결정짓기 전에 비마가 급히 달려와 아뢴다.
“유방과 한신이 우리를 치려고 대군을 발동하여 이곳으로 오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며, 항백과 종이매를 불러 상의한다.
“유방이 우리와 결판을 내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가 군량만 넉넉하다면 두려울 것이 없지만, 군량이 없어서는 싸울 수 없는 일이 아니오?”
종이매가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폐하께서는 지금 유방의 부모를 팽성에 잡아 두고 계시옵니다. 그들을 이리로 급히 불러다 놓고, ‘유방이 군사를 철수시키면 태공을 석방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유방에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조건을 유방이 들어 주지 않으면 어떡하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부모에 관한 일이므로 유방이 우리의 요구에 반드시 응해 줄 것이옵니다.
만약 끝까지 들어 주지 않을 경우는 ‘두 늙은이를 우리 손으로 죽여서 유방은 만고의 불효자식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할 것이다.’하고 말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철수하고야 말 것이옵니다.”
항우는 종이매의 계교를 옳게 여겨 유방의 부모를 팽성에서 데려다 놓고 말한다.
“그대의 아들 유방은 그대가 나에게 붙잡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덤벼오고 있다. 유방이 그대들의 신변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대는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즉각 철수시키도록 알려라. 유방이 군사만 철수시킨다면 그대와 여후(呂后)를 모두 성고성으로 돌려보내 그리운 가족들을 기쁘게 만나도록 해 주리다.”
태공이 즉석에서 대답한다.
“내 아들이기는 하지만, 유방은 어려서부터 재물과 여색만을 좋아하고, 아비 어미를 돌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애는 아비와 어미를 잊어버린 자식이므로 내가 편지를 보내 보았자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옵니다.”
“효력이 있고 없고 간에 일단 편지를 쓰시오. 아무 효과가 없으면 나로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태공은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항우의 검사를 받았는데, 항우는 태공이 쓴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어 보고,
“이만하면 됐다. 유방이란 놈이 이 편지를 읽어 보고나서도 철군을 아니 한다면, 그것은 금수(禽獸)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하고 매우 만족스러워하면서 대부 송자련(宋子連)을 시켜 유방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다음날 송자련은 성고성으로 찾아와 ‘태공의 편지를 전해드리기 위해 한왕을 만나 뵙겠다.’며 면회를 신청하였다.
“뭐야? 태공께서 나에게 서한을 보내오셨다고?”
한왕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즉시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태공께서 나에게 서한을 보내오셨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장량이 심사숙고하다가 대답한다.
“태공께서 서한을 보내오셨다면, 그것은 항우가 우리 군사를 철수하게 하려는 술책임이 분명하옵니다. 대왕께서는 그 서한을 읽어 보시고, 슬퍼하시거나 눈물을 보이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응답하시면, 태공께서는 늦어도 열흘 안에 돌아오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설사 돌아오지 못하시고 항우의 손에 억류되어 계시더라도 생명에는 결코 위험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장량은 한왕에게 자세한 대책을 품고하였다.
한왕은 그제야 송자련을 불러들여 만나게 되었다.
그가 건네주는 태공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늙은 아비는 유방에게 편지를 보내노라. 일찍이 순(舜) 임금께서는 효도를 하기 위해 천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왕이 되어서도 부귀와 영화만 탐낼 뿐 어미 아비가 포로가 된 지 3년이 넘도록 일체 소식이 없으니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우리 두 늙은이는 다행히 초패왕 폐하의 각별하신 배려로 편히 지내 오고 있기는 하다만, 여후(呂后)만은 주야로 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서 옆에서 보기에도 간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구나.
나는 지금 항왕 폐하를 모시고 광무성에 와 있다. 그리고 네가 지금이라도 군사를 철수시키면 폐하께서는 나를 너에게 돌려 보내주시겠다는 특별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네가 불응하고 끝까지 싸우려고 덤빈다면 폐하께서는 나를 죽여 머리를 성루(城樓)에 높이 매달아 놓고 너의 불효를 만고에 알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순(舜) 임금님의 거룩하신 고사(故事)를 본받아 군사를 즉각 철수시킴으로써 우리 부자가 기꺼이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 여후(呂后)도 그렇게 해 주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으니 꼭 그렇게 해 주기를 거듭 당부한다.
부귀와 영화가 아무리 좋기로 그로 인해 네가 불효자의 오명을 천추에 남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효성이 극진한 한왕으로서는 태공의 편지를 읽어 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송자련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므로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왕은 장량이 미리 일러준 대로 짐짓 태공의 편지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며 송자련에게 말했다.
“이따위 편지를 가지고 와서 나더러 어떡하란 것이냐?”
송자련은 한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자 한왕은 송자련을 꾸짖듯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대는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항왕과 나는 일찍이 의제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이다. 따라서 나의 아버지는 항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가 초나라에 있거나 내 곁에 계시거나 아들의 곁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뭐가 다르겠느냐?
항왕이 만약 나의 아버지를 죽여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욕하기보다는 먼저 항왕을 향하여 ‘아버지를 죽인 놈’이라고 욕하게 될 것이다.
항왕은 일찍이 영포를 시켜 의제를 시해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제후들은 아직도 항왕에게 이를 갈고 있는 판인데, 이제 나의 아버지까지 죽인다면 인심이 어떻게 될 것이냐?
맹자께서는 일찍이 ‘남의 아비를 죽이면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비를 죽인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느니라. 그대는 돌아가서 태공에게 꼭 이렇게 말씀드려라.
‘태공께서는 어디에 계시든지 아들의 곁에 계시기는 마찬가지이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계시라.’고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한왕은 그 말만을 남기고 시종들의 배행을 받으며, 휑하니 방을 나가버린다.
송자련은 어처구니가 없어 장량과 진평을 돌아보며,
“대왕은 부모님에게 효성이 너무도 부족하신 것 같은데, 두 분께서 다시 한 번 간곡히 품고해 보시죠.”
하고 말했다.
그러자 장량이 퉁치 듯 이렇게 말해 버린다.
“그러잖아도 나 역시 군사를 철수시키고 태공을 모셔오자고 여러 차례 품고해 보았다오. 그러나 대왕께서는 끝끝내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송자련은 어쩔 수 없이 헛되이 돌아와 항우에게 태공의 서한을 받아 본 한왕의 태도에 대해 자초지종을 낱낱이 보고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종이매가 항우에게 이렇게 품한다.
“폐하! 지금 송자련의 보고를 듣고 보니 유방은 결코 큰일을 해낼 인물이 못 되옵니다. 부귀와 주색만 알고 부모도 모르는 위인이 전쟁인들 어찌 잘 치러 낼 수 있으오리까!
그러니 우리가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하늘이 도와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허기는 그래! 유방이라는 자는 옛날부터 부모는 아무렇게나 여기면서도 계집이라면 사족을 못 써 왔었지. 그러면 장군의 의견대로 정면으로 싸우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항우는 군량 사정이 몹시 나쁨에도 불구하고 한군과 정면으로 싸울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즉시 전 군사에게 비상 동원령을 내렸다.
한편, 한왕 역시 전쟁을 각오하고 송자련을 쫓아 보낸 뒤에 한신을 불러 대책을 강구한다.
“이제야말로 초를 정벌할 절호의 기회가 왔소이다. 작전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 것이 좋겠소이까?”
“항우는 지금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광무에 진을 치고 있기는 하오나 군량 사정이 몹시 궁핍하여 오랜 기간 싸울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우리 편의 사기는 매우 왕성하므로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초군을 섬멸시킬 자신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전쟁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나는 원수만 믿을 테니 모든 작전은 원수의 뜻대로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이 필승을 기할 터이니 대왕께서는 후진(後陳)으로 따라와 주시기만 하시옵소서.”
한신은 그날로 군사를 출동시켜 광무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 긴급 작전령을 내린다.
“적은 우리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몹시 지쳐 있는 줄로 알고 오늘 밤에 반드시 야습(夜襲)을 감행해 올 것이다. 모든 부대는 그런 줄 알고 전투태세를 철통같이 갖추고 있으라.”
이리하여 모든 부대는 전투태세를 물샐 틈 없이 갖추고 있었다.
한왕은 본진 뒤에 후진으로 따라와 별도로 진을 쳐놓고, 소하, 장량, 진평 등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작전계획을 의논하다가
“한 원수의 전략을 들어보게 원수를 이 자리에 모셔오도록 하오.”
하고 명했다.
그러나 연락 장수는 한참 후에 돌아와
“한 원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지금 진중에 계시지 아니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원수가 진중에 없다면 어딜 갔다는 말이냐?”
“막료 장수에게 물어보니 한 원수는 해가 저물 무렵에 수십 기의 기마병을 데리고 동남쪽으로 나가셨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대답이었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며 장량에게 묻는다.
“자방 선생! 한 원수가 대전(大戰)을 앞두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마 항우와 내통하여 우리를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원수가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시점에 최고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직무태만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한왕이 보기에는 장량의 대답은 모호하게 들리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좌불안석이 된 한왕은 다시 한 번 사람을 보내 보았으나 심부름을 갔던 사자는 즉시 돌아와 아뢴다.
“모든 부대가 전투를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되어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 데가 없으나 한 원수만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왕은 무슨 변고가 발생할지 몰라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방금 다녀온 사자에게 다시 명한다.
“그대는 다시 달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한 원수가 돌아오거든 나에게 즉각 알려라.”
한왕은 사람을 보내 놓고, 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있기를 학수고대하였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감감무소식이더니 삼경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는데,
“한 원수가 조금 전에야 돌아오셨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를 다녀온다고 하던가?”
“감히 그것까지는 여쭤보지 못했사옵니다.”
한왕은 생각할수록 한신의 거동이 수상스러워 승상 소하를 불러 말한다.
“한신 장군이 오랜 시간 어디를 다녀왔는지 몹시 궁금하오. 승상이 직접 한 장군을 만나보고 오셨으면 좋겠소.”
소하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호위병을 데리고 한신을 찾아갔다.
한신은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있다가 소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승상께서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사옵니까?”
“대전을 앞두고 장군이 한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이제야 돌아오셨다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일부러 찾아왔소이다.”
한신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불쾌감이 일었다.
‘한왕이 나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승상을 일부러 보낸 것이 분명하구나!’
그러나 한신은 자신의 기분을 표정에 나타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일이면 항우와 결전을 벌여야 할 판인데, 아시다시피 항우는 천하제일의 맹장이기에 사전에 적정을 상세하게 알아보려고 초저녁에 염탐을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오게 된 것이옵니다.”
“그래 좋은 결과를 얻으셨소?”
“적정을 살펴보고 좋은 계략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것이 확실합니다.”
“어떤 계략을 세우셨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작전 계획이란 극비에 속하는 일이므로 사전에 말씀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승상께서는 그 점을 양해하시고, 내일 결전 현장에 주공을 모시고 오셔서 제가 항우를 격파하는 광경을 직접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후진으로 돌아와 한왕에게 자세히 보고하니 한왕은 그제야 안심하는 것이었다.
한신은 적의 야습에 대비하느라고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그러나 다행히 적의 야습은 없었다.
날이 밝자 한신은 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작전 편성을 새로 짰다.
제1전대 번쾌와 관영,
제2전대 주발과 주창,
제3전대 근흠과 노관,
제4전대 여마통과 양희,
제5전대 장이와 장창,
제6전대 번창과 누번,
제7전데 하후영과 왕릉,
제8전대 조참과 시무,
제9전대 구강왕 영포,
한신은 모든 장수를 총동원하여 전투 편대를 새로 짜놓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는 대왕께서 친히 가담하시도록 부탁드려 놓았다. 대왕께서는 정병 5천을 거느리고 광무산 기슭에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총공격의 포 소리가 울리면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해 주실 것이니 여러 대장들은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라.”
편대 구성만 보아도 이날의 전투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대 결전이 되고도 남을 것임은 짐작하기에 충분하였다.
- 제 14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