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39
2021. 7. 21. 08:04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39화
☞ 정의란 승자의 웅변
형양성에서 천하통일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한왕 유방의 가장 큰 걱정은 항우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부모님과 아내를 하루속히 구출해 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장량과 진평에게 걱정을 토로하였다.
“두 분께서는 저의 부모님과 아내를 항우로부터 구출해 올 수 있는 어떤 묘책이 없겠소이까? 부모님과 아내만 무사히 모셔올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벌려볼 것이오만, 어떤 계책이 있어야 할 텐데, 큰일이오.”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항우는 태공 내외분을 자신의 볼모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돌려보내 주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나 대책 없이 이대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태공 내외분을 무사히 모셔오려면 오직 항우와 실력으로 판가름 내는 길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되옵니다.”
“실력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대군을 휘몰아쳐 들어가 항우를 궁지에 몰아넣고, 우리 편에서 태공 내외분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하게 되면 항우는 십중팔구 태공 내외분을 돌려보내리라 생각되옵니다.”
한왕이 장량의 말을 듣고 그 문제를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있는데, 때마침 밖에서 시종이 들어오더니,
“대왕 전하! 관중에 계시는 소하 승상께서 지금 장수 한 사람과 함께 대왕을 알현하러 오셨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뭐야? 승상이 오셨다고? 어서 이리로 모셔라!”
소하는 생면부지의 장수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한왕에게 큰절을 올린다.
“신 소하, 대왕 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오오, 승상. 이게 얼마 만이오!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소. 그런데 함께 온 저 사람은 어디서 온 누구요?”
한왕은 소하의 절을 받으며, 그가 대동한 장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은 키가 구 척이나 되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영웅호걸이 분명하였다.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이 사람은 ‘누번’이라 하옵는데, 대왕 전하의 성덕을 사모한 나머지 초나라를 정벌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함양으로 신을 찾아왔기에 데리고 왔사옵니다.
이 사람은 기사(驥射, 말을 타고 활을 쏘는)의 재주가 탁월한 용장이오니 대왕께서 높게 쓰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친히 걸어와 누번의 손을 다정히 붙잡으며 말한다.
“오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구려. 오늘부터 나의 장하(帳下)에서 나와 더불어 동식 공침(同食共寢, 함께 먹고 자면서) 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합시다.”
그러면서 한왕은 그 자리에서 누번에게 어의(御衣) 한 벌과 황금 백 냥을 친히 내려주었다.
한편, 항우는 한신을 자기편으로 꾀어 보려고 무섭을 보내 보았으나 한신이 끝내 응해주지 않자 크게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분을 삭이기를
‘한신이란 놈이 끝내 유방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자가 손을 쓰기 전에 내 손으로 유방을 먼저 쳐 없애 버려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항우는 유방을 치기 위해 30만 군사를 동원하여 형양성 정벌에 나섰다.
한왕 유방은 첩자들로부터 그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크게 놀라며, 긴급 중신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승상 소하가 말한다.
“신이 데리고 온 누번 장군을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다른 장수들이 도와준다면, 항우의 공격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한신 장군이 제나라에서 달려와 협공을 하게 되면, 항우를 이겨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누번을 비롯한 왕릉과 주발을 한자리에 불러 명한다.
“항우가 지금 30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니 누번 장군이 선봉장이 되어 왕릉, 주발 두 대장과 협력하여 적을 철저히 막아내도록 하시오. 나는 그대들만 믿겠소.”
한왕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항우는 형양성 30리 밖에 진을 치고, 한왕에게 다음과 같이 선전 포고문을 보냈다.
천하가 안정을 잃어버리고 흉흉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은 오로지 그대와 내가 천하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는 오늘로써 사내답게 한판 자웅을 겨루어 만천하의 백성들이 편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자.
용기가 있거든 도망치지 말고 한시 바삐 결전장으로 나오기 바란다.
한왕은 이와 같은 선전 포고문을 받아 보고, 웃으며 항우의 사신에게 말한다.
“천하는 힘으로 싸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 싸워 얻는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거든 초패왕에게 분명히 일러라. 힘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지혜로써 싸우자고.”
항우는 사신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펄펄 뛰며 노한다.
“유방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그자에게 힘의 무서움을 보여주리라.”
그리고 즉석에서 정공, 옹치, 환초, 우자기 등 네 대장으로 하여금 대군을 나눠 거느리고 형양성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적군이 노도와 같이 몰려오니 한나라 군사들도 정면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선봉장 누번 장군은 장검을 번개 치듯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누번 장군은 혼자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면서 네 명의 적장을 상대로 50여 합을 싸우는데, 칼 쓰는 법이 기막혀서 신묘할 뿐만이 아니라, 기운이 워낙 출중하여 싸우면 싸울수록 전세는 초군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네 명의 초장들이 누번 장군에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꼬락서니를 보자, 초진에서는 계포, 이번, 장월, 항앙 등 네 장수가 장창을 휘두르며 번개처럼 달려 나와 싸움에 가담하였다.
이제는 1대 8의 대혼전이 벌어진 셈으로 누번 장군은 과연 천하의 용장이었다.
그러나 1대 8의 싸움이 되다 보니 전세가 불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왕릉과 주발이 누번 장군을 돕기 위해 별안간 함성을 울리며 대군을 몰아쳐 나오니 초장들은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쫓기기 시작하였다.
누번 장군은 그 기회에 적장을 맹렬히 추격하여 이번과 장월을 제각각 찔러 죽였다.
대장 계포는 이번과 장월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본진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장 항앙은 왕릉의 손에 죽어서 초군은 형편없이 패배하였다.
본진에 있던 항우는 패전 소식을 듣자, 크게 노하며 몸소 장극(長戟, 긴 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전선으로 나는 듯이 달려 나왔다.
누번 장군은 항우를 보자 멀리서 활을 쏘아 갈기려 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번개같이 달려오며 태산이 무너질 듯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누번은 자신도 모르게 활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타고 있는 말까지도 항우의 고함소리에 경풍을 하며, 50여 보나 뒷걸음을 치는 바람에 누번은 자기도 모르게 도망을 치며,
“저 장수가 누구냐?”
하고 큰소리로 물으니 누군가 숨 가쁘게 쫓겨 오며,
“저 사람이 바로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선으로 뛰어든 항우는 한나라 군사들을 무수히 유린하며, 어느덧 단독으로 진문 앞까지 육박해 오니 한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진문 앞에 말을 멈추고 큰소리로 외친다.
“내가 꼭 할 말이 있으니 유방은 이리 나와 내 말을 들으라.”
항우가 이 모양으로 나오니 유방은 비겁하게 꽁무니를 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장수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항우를 멀리서 바라보며 말한다.
“초패왕은 나에게 할 말이 있거든 어서 말해 보시오.”
항우는 유방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친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싸우기를 여러 해. 그러나 그대와 내가 직접 싸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꿎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괴롭힐 게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직접 싸워서 자웅을 결하자. 그러는 것이 영웅호걸다운 태도가 아니겠느냐?”
힘으로 싸우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으나 유방은 항우를 바라보며 꾸짖듯이 대답한다.
“그대는 아직도 잘못 알고 있는데, 그대와 나의 싸움은 단순한 힘과 힘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항우는 유방의 꾸짖는 소리를 듣고, 앙천대소를 하면서 큰소리로 외친다.
“이 못난 놈아! 싸움에는 승자와 패자만이 있을 뿐이지, 정의와 불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너는 ‘정의란 승자의 웅변’이란 말조차 모른다는 말이냐?”
- 제 14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