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38화

2021. 7. 20. 08:28초 한지


★ 1금(禁) 초한지(楚漢誌) - 138화

☞ 괴철의 요언(妖言)

한편, 항우는 한신이 제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휩쓴 공로로 제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하여 항백과 종이매를 불러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한신이라는 자를 대단치 않게 여겨 왔었는데, 용저 장군을 이겨낸 것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니다.
유방은 지금 형양성과 성고성에 대군을 주둔시켜 놓고 있는데, 한신은 한신대로 제나라에 버티고 있으니 어느 쪽부터 치는 것이 좋겠는가?”
항백이 대답한다.

“지금 우리 형편으로 두 곳을 모두 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하오니 지금이라도 한신에게 세객(說客)을 보내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작전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기울이고 반신반의하며,

“한신이 그동안 나에게 해온 것을 보면 마땅치 않지만, 방법이 그밖에 없다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려. 그러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종이매가 대답한다.

“대부 무섭(武涉)은 변설이 능한 사람이오니 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무섭에게 많은 비단과 공물(貢物)을 주어 한신을 유인해 오도록 임치로 파견하였다.

무섭이 임치에 도착하여 한신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이에 한신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한다.

“무섭은 소문난 변론가가 아닌가? 그가 나를 만나러 왔다니 항우가 나를 유인해 가려고 그자를 보냈음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나를 만나러 왔다니 이리로 데려오너라. 무슨 일로 왔는지 한 번 만나보기나 하겠다.”
무섭은 한신의 앞으로 나오자, 큰절을 올리고 폐백을 내놓으며 말한다.

“장군께서 이번에 제왕에 오르셨다는 말씀을 듣고 삼가 축하의 선물을 올리옵니다.”
한신은 선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한다.

“나도 지난날에는 대부와 마찬가지로 초나라의 신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달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적이 되어 버렸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오?”
“대왕께서는 이미 제나라의 70여 성을 통치하고 계신데 어찌 지난날의 일만을 말씀하시옵니까? 이 선물은 항왕 폐하께서 대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동시에 금후에는 초나라와 제나라가 화친을 돈독히 하자는 뜻에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나는 이미 왕위에 올랐으니 이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나는 누구와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새삼스레 화친할 뜻도 없다고 생각하오.”
“만약 대왕께서 소생의 권고대로 하신다면 왕위를 영원히 누리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유방과 협동하여 초나라를 때려 부순다면, 그때에는 대왕의 지위가 어떻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한신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항왕 폐하께서 소생을 대왕께 파견한 목적은 두 분이 화친을 도모하여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가지고, 제각기 부귀를 영원토록 누려 보자는데 있는 것이옵니다.”
“대부의 말씀은 그럴 듯 하오만 내가 지난날 항왕을 섬기고 있을 때 벼슬은 고작 집극랑에 지나지 않았고, 항왕은 나의 계략에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소.
내가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옮겨 온 것은 그런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한왕은 항왕과는 정반대로 나를 대뜸 원수로 승격시켜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게 해주셨고, 나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면서 나의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들어 주셨소.
게다가 이제는 나를 왕위에까지 오르게 해 주셨으니 내 어찌 그러한 은혜를 배반하고 초나라로 갈 수 있겠소? 죽으나 사나 나는 이제부터 한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형편이니 대부는 돌아가시는 대로 항왕에게 그런 사정을 잘 말씀드려 주시오.
매우 죄송스럽지만 이 폐백은 받을 수 없으니 그냥 가지고 돌아가 주시오.”
무섭은 한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팽성으로 헛되이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마침 옆에 있던 괴철이 한신에게 말한다.

“신은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관상학(觀相學)을 배운 바 있사옵는데, 관상학에 의하면 대왕은 놀랍도록 귀하게 되실 어른이시옵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별안간 관상 얘기는 왜 하시오?”
“그 옛날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으나 20년이 채 못 가 초(楚)와 한(漢)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초와 한의 운명이 모두 대왕의 손에 달렸으니 그것은 천하를 삼분(三分)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그 점을 깊이 통찰하셔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도록 하시옵소서. 기회란 언제든지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괴철의 말의 요지는 유방을 위해 부질없이 천하를 통일하려고 애쓸 일이 아니라 한신도 자주독립하여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갖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괴철의 유혹에 한신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았다.
괴철의 말대로 한왕을 배반하고 항우와 타협하여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가지면 자신도 황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괴철에게 말했다.

“한왕은 처음부터 나를 극진하게 대해 주었는데, 내 어찌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의리를 배반할 수 있으리오?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소이다.”
“얼마 전까지 항왕의 휘하에 있다가 한나라에 귀순한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는 진여(陳餘)와 형제지의를 맺은 바가 있었으나, 진여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장이의 가족을 몰살시킨 일이 있사옵니다.
하물며 대왕과 한왕은 그런 사이도 아니면서 무엇을 주저하시옵니까? 자고로 사냥꾼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반드시 잡아 없앤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도 있지 아니합니까?
만약 대왕께서 한왕을 위해 천하를 통일해 놓았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때는 대왕의 신변이 지극히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옵나이까?”
한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음... 공의 말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럴 것도 같구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도 중대한 일이니 며칠 동안 말미를 두고 신중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한신은 며칠을 두고 궁리해 보았으나 자기를 키워 준 한왕을 배반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리하여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괴철이 다시 찾아와서 들쑤신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옵니까? 기회라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옵고,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라야 그 결단의 효과가 배가(倍加)되는 것이옵니다.
쓸데없는 의리에 현혹되어 유리한 계획을 제 때에 단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100가지의 화를 초래할 뿐이옵니다.
성패(成敗)는 반드시 시기에 달려있는 법이오니 대왕께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절대 놓쳐 버리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한신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왕을 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워 왔다. 한왕은 그때마다 나의 지위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고깝게 여기는 기색을 한 번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관후(寬厚)하고 인자한 한왕을 어떻게 배반하고 등을 돌린단 말인가?’

한신이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에 잠겨 있는데, 문득 방문이 발칵 열리면서 대부 육가(陸賈)가 선뜻 방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육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대부가 별안간 웬일이시오?”
대부 육가가 불현듯 나타난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한신만이 아니었다.

한신에게 배반을 종용하던 괴철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육가는 한왕의 충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육가가 두 사람의 밀담을 엿듣기라도 했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육가는 한신과 괴철 앞에 우뚝 멈춰 서더니 먼저 괴철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더니 한신에게 얼굴을 돌리며 분노에 찬 어조로 말한다.

“소생은 조금 전에 대원수를 찾아뵈러 왔다가 문전에서 두 분이 주고받는 말씀을 죄다 엿듣게 되었습니다. 대원수께서는 괴철의 요언(妖言)에 현혹되시어 인신(人臣)의 절개(節槪)를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그 말에 한신의 가슴이 철렁하였고, 괴철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육가는 그런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소생은 대원수께 꼭 여쭤야 할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릇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그 실세와 그 외형을 올바르게 관찰해야 하는 법이옵니다.
오늘날의 천하대세를 관찰하건데, 초나라는 강한 듯이 보이나 실세가 허약하기 짝이 없사옵고, 한나라는 약한 듯이 보이오나 실제는 놀랍도록 강한 편이옵니다.
게다가 대원수 자신은 아직 새로운 나라에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한왕이 지금 일시적으로 불리한 듯이 보이기는 하오나 천하의 인심은 이미 한왕에게 기울어져 있사옵니다.
더구나 한왕에게는 소하라는 만고의 명재상이 계신데다 장량, 진평 같은 명모사(名謀士)가 있사옵고, 영포, 팽월, 번쾌, 주발, 왕릉, 관영, 조참과 같은 만부 부당(萬夫不當)한 명장들이 수두룩한 판인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당해 낼 것이옵니까?
괴철이 조금 전에 대원수께 미친 소리를 지껄인 듯싶사오니 대원수께서 만약 이 미친 사람의 광언에 속으셔서 한왕을 배반하신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한신은 육가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대부는 참으로 나에게 좋은 충고를 해 주셨소이다. 대부의 충고가 없었던들 나는 광부(狂夫)의 요언(妖言)에 현혹되어 어떤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소.”
한신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괴철은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번개같이 달아나 버렸다.

만약 모든 비밀이 한왕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자신은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그제야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히 깨닫고 육가에게 조용히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삼군을 거느리고 형양성으로 대왕을 찾아가 함께 초나라를 쳐부수기로 할 테니 대부도 나와 함께 떠나십시다.”

- 제 1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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