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37화
2021. 7. 19. 06:4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37화
☞ 제왕(齊王)이 되는 한신(韓信)
한신은 제나라를 점령하고 나자, 제왕의 궁전이 있는 임치(臨淄)로 거처를 옮겼다.
제나라의 궁전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궁전 안에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어느 것이든지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어서 바라만 보아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에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궁전을 한 바퀴 돌아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니 수행하던 괴철이 그러한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한신에게 아뢴다.
“제나라로 말하자면, 오악(五岳)을 등에 지고 바다에 임해 있는 동해의 웅지(雄地)이옵니다. 원수께서는 육국을 평정하시어 무위(武威)를 떨치고 계시오니, 이제는 한왕에게 표(表)를 올려 제왕이 되셔서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계시도록 하시옵소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제왕이 되시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괴철의 말대로 한왕에게 표를 올리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한왕으로부터 조서가 왔다.
조서를 읽어 보니 한왕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의 싸움에서 초나라의 수십 고을을 평정하였소. 그러나 나의 양친께서 아직도 항우의 손에 붙잡혀 계셔서 일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소이다. 게다가 항우는 머지않아 대군을 일으켜 성고성을 먼저 점령한 뒤에 나와 더불어 자웅을 결하자고 요청할 모양이오.
그리하여 여러 중신들과 숙의를 거듭한 결과 성고성을 원수가 지켜야만 무사하리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소. 그러하니 원수는 대군을 거느리고 급히 귀환하여 성고성을 지켜 주기 바라오.
우리가 항우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서로가 합동작전을 펴는 길밖에 없으니 원수는 지체 없이 성고성으로 돌아와 성을 굳게 지켜 주어야 하겠소.
한신은 한왕의 조서를 받아 보고 성고성으로 떠나가기 위해 삼군에게 출동 준비를 명했다.
그러자 괴철이 다시 품한다.
“원수께서 이곳을 떠나시기 전에 한왕에게 표문을 올려 ‘장래에는 원수를 제왕으로 봉한다.’는 언약을 미리 받아 놓도록 하시옵소서. 그런 언약도 없이 이곳을 떠나셨다가는 후일에 이곳에 다시 돌아오시기는 매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한신은 그러잖아도 제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참인지라 괴철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한왕전에 표문을 올리려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주숙(周叔)이 말을 잘하니까 그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한신은 그날로 표문을 써 주면서 주숙으로 하여금 형양성으로 한왕을 찾아뵙게 하였는바, 한왕에게 올린 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대원수 한신은 삼가 대왕 전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나라에 주인이 없으면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사옵고, 권력이 약해도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법이옵니다. 신은 대왕의 천위(天威)에 힘입어 초장 용저를 유수에서 참살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사옵고, 제왕 전광(田廣)까지 생포하여 천위를 떨치는데 다소나마 공이 있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옵니다.
신이 이번에 평정한 제나라는 국정(國情)이 매우 불안하여 백성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형편이옵니다. 따라서 이곳은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진압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매우 외람된 청원이오나 대왕께서는 신을 임시로나마 제왕으로 봉해 주시면 고맙겠나이다.
만약 신을 제왕으로 봉하여 주신다면, 신은 제나라의 민심을 신속히 진정시키고 나서 대왕 전하의 통일성업에 전력을 기울여 노력하겠사옵나이다.
대원수 한신 올림.
한왕은 한신의 표문을 읽어 보고 크게 노했다.
“한신이라는 자가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지금 곤경에 빠져 있는데, 급히 달려와 도와줄 생각은 아니 하고, 제나라에 눌러앉아 왕이 되려는 궁리만 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배반 행위임이 분명하다.”
장량과 진평도 한신이 보내온 표문을 읽어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놀랄 뿐만 아니라 한신을 몹시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량은 불쾌한 감정을 억눌러 가면서 한왕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품한다.
“대왕께서 이미 초나라 영토 수십 고을을 평정하셨사오나 항우는 아직도 광무(廣武)에 진을 치고 있어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한 판국에 제왕이 되고 싶어 하는 한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아니하시면 금후의 사태가 매우 복잡하게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한신을 일단 제왕에 봉하시어 통일성업에 전력을 기울이게 하시옵소서. 만약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한신은 홧김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간언을 듣고 등골이 서늘함을 느끼면서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선생의 말씀대로 한신을 제왕에 봉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리고 한왕은 주숙을 불러들여
“역이기 대부가 제왕의 손에 팽살(烹殺) 되었다고 하는데, 역이기 대부가 어째서 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역이기 대부는 한신 장군에게 제나라를 무력 점령하지 말도록 두 번이나 편자를 보냈으나 한신 장군이 기어코 군사를 끌고 왔기 때문에 제왕이 크게 노하여 역이기 대부를 팽살하게 된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니 한왕은 한신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한탄한다.
“역이기 대부는 다시없는 충신이었으니, 나는 그의 공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왕은 역이기 대부의 억울한 죽음을 탄식만 하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기에 장량에게 ‘제왕의 인수’를 내주며 말한다.
“선생의 말씀대로 한신을 제왕에 봉하는 ‘제왕 인수’를 만들었으니, 이것을 선생께서 직접 한신에게 가지고 가셔서 그의 마음을 잘 도닥거려 주시옵소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신이 한신 장군을 직접 만나 잘 위무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량은 임치로 한신을 찾아가 제왕의 인수를 직접 전하며 말한다.
“대왕께서는 장군의 표문을 받아 보시고, 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한 공로를 높이 사시면서 장군을 제왕에 봉해 주셨소이다. 그래서 신을 직접 보내셨으니 장군은 즉시 왕위에 오르시고 나서 성고성으로 달려가 항우를 막아내고 초나라를 평정해 주시오.
그리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장군의 공로는 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오.”
한신은 제왕의 인수를 받아들고 크게 기뻐하며, 한왕의 조서를 읽어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신 장군은 지금까지도 공로가 많았지만, 이번에 제나라까지 평정했으므로 그 공로를 치하하는 마음에서 제왕으로 봉하는 바이오. 그러하니 제나라를 속히 안정시키고, 즉시 성고성으로 달려와 마지막 남은 초나라를 평정하는 데 힘을 모아 주시오.
한신은 한왕이 있는 남쪽을 향하여 사은숙배를 올린 뒤에 장량에게 융숭한 주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장량은 임치를 떠나면서 한신에게 말한다.
“대왕께서 지금 형양성에 계시오나 인질로 잡혀계신 태공 내외분 때문에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더구나 근간에 항우가 대군을 몰아 성고성을 공략하리라는 정보를 들으시고 부터는 밤잠도 못 주무신다오.
그러하니 장군은 성고성으로 속히 가셔서 항우를 섬멸시키고 태공 내외분을 기어이 구출해 주시기 바라오.”
“나는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군사들을 추가로 많이 징발해 가지고 열흘 후에는 성고성으로 기필코 떠나도록 하겠으니 대왕전에 그 말씀을 꼭 전해주소서.”
한신은 장량을 보내고 나자, 그날로 대전(大殿)에 올라 제왕으로서의 즉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한신은 본시 생각이 깊은 장수였으나 괴철의 감언(甘言)에 현혹되어 제왕의 자리를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한왕은 항우와의 결전을 앞둔 관계로 부득이 한신을 제왕에 봉해 주었지만 심사는 매우 불쾌하였다.
※ 註) 이렇게 한왕 유방의 심사가 꼬였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신이 필요하여 제왕으로 임명은 했지만 장차 천하를 통일한 연후에 힘이 커진 한신을 두려워 한 유방은 결국 그를 토사구팽 한다.
이런 것을 꼭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마련이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인 즉, 현세의 위정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을지어다.
- 제 13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