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35화

2021. 7. 17. 07:0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35화

☞ 팽살(烹殺) 당하는 역이기

한편, 한신은 장이와 함께 군사를 거두어 형양성으로 막 떠나려고 하는데, 불현듯 연나라의 모사였던 괴철이 한신에게 말한다.

“한 원수께 아뢰옵니다. 만약 원수께서 역이기 노인의 말을 그대로 믿으시고 철군하시면, 그것은 한 원수로서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일생일대의 과오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 보시옵소서. 한 원수께서 오늘날까지 여러 나라로 동분서주하시면서 점령하신 성(城)은 50여 성밖에 안 되는데, 역이기 노인은 순전히 입만 가지고 70여 성을 대번에 얻어 놓았다고 하니 원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형양성으로 돌아가 한왕을 뵈올 수 있을 것이옵니까?”
한신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괴철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음... 그래서 이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인가?”
“만일 지금 형편대로 나간다면, 후일에 한왕께서 천하통일의 성업을 완수하셨을 때 일등 공신은 한 원수가 아니고, 역이기 대부라는 결과가 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원수께서는 대군을 철수하시기 전에 그 점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음...!”
한신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따지고 보면 역이기는 일개의 세객(說客)에 불과한 유생(儒生)이 아니던가!
그가 아무리 변설로써 제나라 70여 성을 귀순시켜 놓았다 하더라도 생사(生死)를 걸고 천군만마(千軍萬馬)로 온갖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자신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순전히 평정시킨 성 수(城數)만 가지고 따진다면, 역이기가 앞서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신은 괴철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의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인가?”
“이대로 철수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제나라는 지금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므로 원수께서는 대군을 몰고 들어가 제나라를 형식적으로나마 무력으로 점령해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공로가 원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한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역이기 대부가 왕지(王旨)를 받들고 이미 항표를 받아 놓은 제나라를 내가 무력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대왕에 대한 거역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생각하기에 달린 일이옵니다. 대왕께서는 한 원수께 제나라를 공략하라는 왕지를 이미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이기 대부가 제나라로 달려간 것은 자신의 공로를 세우기 위한 사사로운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원수께서 역이기 대부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철수하셨다가는 후일에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기 쉽사옵니다. 원수께서는 그 점을 십분 고려하셔야 하옵니다.”
괴철이 거기까지 말하자, 장이도 거들고 나선다.

“제가 들어 보아도 괴철의 말이 지극히 가당합니다. 원수께서는 이미 왕명에 의하여 제나라를 평정할 권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계시온데, 또 다른 왕명이 어찌 있을 수 있으오리까?
그러하니 우리가 형양성으로 가기에 앞서 먼저 제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해 놓고 봐야 합니다.”
한신은 그러잖아도 역이기에게 공로를 빼앗길까 봐 불안하던 참이었는데, 괴철과 장이가 무력 점령을 극력 주장하고 나오니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한신이 여러 해 동안 애써 꾸미고 만든 전략이 막판에 역이기의 제나라 귀순 성공으로 큰 공이 역이기에게 넘어가 버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한신은

“두 분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나는 대왕으로부터 ‘제나라를 평정하라.’는 대명을 직접 받았기 때문에 역이기 대부가 설혹 제나라를 귀순시켜 놓았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형식적이나마 제나라를 일단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옳을 것 같구려.
그럼 먼저 제나라를 거쳐서 형양성으로 가기로 합시다.”
하고 대군을 제나라로 몰아쳐 나갔다.

조나라에서 제나라로 가려면 북방으로 황하(黃河)를 건너 머나먼 대로를 우회하여야 한다.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자, 제나라 백성들은 모두 공포에 떨며 피난을 가기에 바빴다.

한편, 제왕 전광은 전쟁이 없으리라 안심하고 날마다 역이기 대부와 어울려 술만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종이 달려와 급히 아뢴다.

“대왕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한신이 30만 대군을 몰고 이미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제왕은 대경실색하며 중신 회의를 급히 열었다.
회의석상에서 대장 전횡(田橫)이 말한다.

“한신이 지금 30만 대군으로 휘몰아쳐 오고 있으므로 우리가 정면으로 항전하다가는 전몰(全歿)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황하의 물을 끌어다가 개울을 깊게 파고 흙벽을 높게 쌓아 저들의 행군을 저지시키는 동시에 초나라에 긴급 특사를 보내어 초패왕의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시옵소서.
초패왕이 구원병을 거느리고 오거든 그때 우리도 달려 나가 양면으로 협공을 퍼부으면 한신을 능히 대파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제왕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그 문제는 전횡 장군의 말대로 하기로 합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역이기의 말만 믿고 있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역이기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전횡이 다시 대답한다.

“역이기가 우리를 속인 셈이니 당장 죽여야 마땅한 일이오나, 당분간은 죽이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 이유는?”
“한신이 대군을 몰고 성하(城下)까지 육박해 왔을 때 역이기로 하여금 한신에게 다시 한 번 서한을 보내게 해서 한신이 그대로 철수해 버리면 우리는 예정대로 한나라에 귀순하기로 하되, 만약 한신이 군사를 계속 전진시키면 그때에는 역이기를 죽여 버리고 초패왕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실상인즉, 한신이 지금 대군을 몰아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생각으로 역이기와의 약속과 다른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확실한 진상은 아직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침 그때 한나라 군사가 이미 성 밖 30리 앞까지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하고, 제왕은 크게 당황하여 역이기를 불러내어 따지듯 묻는다.

“일전에 한신이 대부에게 보내온 회신에 의하면, 한신은 형양성으로 가겠다고 분명히 밝혔었소. 그런데 한신은 지금 대군을 이끌고 우리한테 오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생각컨대 대부가 나를 속여 전쟁준비를 못하게 해놓고, 우리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일거에 점령하려는 사술(詐術)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역이기가 분노의 빛을 보이며 대답한다.

“한대왕의 명령을 받고 온 나더러 속임수를 썼다니 그게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나는 대부의 권고에 따라 한왕에게 귀순하기로 이미 결정한 사람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이 대군을 몰고 오다니 나는 대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소.
지금이라도 한신에게 서한을 보내 대군을 즉시 철수하도록 해주시오. 그렇게만 되면 대부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믿을 것이로되, 만약 그렇지 않으면 대부를 사기꾼으로 대할 수밖에 없겠소.”
역이기는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말한다.

“이런 일이란 편지로서 양해시키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한신 장군을 직접 만나보고 오기로 할 테니 대왕은 사신 한 사람을 딸려 주소서. 그러면 사신과 함께 내가 한신 장군을 직접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제왕은 역이기의 손목을 꽉 움켜잡는다.

“그것은 안 될 말씀이오. 대부가 한신을 설득시켜 대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하면 돌아오게 되겠지만, 만약 그러지 못했을 경우는 대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호랑이를 산으로 놓아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러니 대부는 이곳에 볼모로 머물러 있고, 나의 사신이 대부의 편지만 가지고 가게 해야 하겠소.”
제왕으로서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역이기는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아, 이제 나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구나. 그러면 한신 장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써 줄 테니 사신에게 곧 보내도록 하시오.”
역이기는 즉석에서 한신에게 보내는 서한을 썼는데, 한신이 받아 본 역이기의 편지 내용은 이랬다.

장군께서 형양성으로 대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서한을 받아 보고, 본인은 한왕 전에 이미 전말의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대군을 몰고 제나라로 오셨으니 본인은 제왕을 속인 결과가 되어 나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내 목숨은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왕명을 받든 내가 죽음으로써 대왕의 신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니 장군께서는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시어 대군을 곧 철수시켜 주소서.
엎드려 바라옵니다.

한신은 역이기의 편지를 받아 보고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괴철이 묻는다.

“장군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시옵니까?”
“역이기 대부가 왕명을 받고 제나라를 이미 귀순시켜 놓았는데, 내가 군사를 몰고 가 제나라를 치면, 제왕은 역이기 대부를 죽여 버릴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면 나는 왕명을 거역하는 셈이 되니 그것도 함께 걱정이 되는구려.”
“한왕은 제나라를 평정시키라는 왕명을 두 사람에게 내린 셈이니 잘못이 있다면 한왕에게 있지 장군에게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무엇을 주저하시옵니까?”
“아무리 그렇기로 역이기 대부를 제왕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노인 목숨 하나쯤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나라 하나를 평정하는 공로를 세우기는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옵니다. 이렇게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사리가 명백하온데, 장군께서는 아녀자들처럼 왜 쓸데없는 일로 결정을 미루십니까?”
괴철의 설득에 한신의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서 보내온 사신에게 답장을 써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돌아가거든 역이기 대부에게 나의 말을 이렇게 전하라.
역 대부가 왕명을 받들고 제나라에 가서 설득하려 했다면 우선 제나라를 공략할 준비를 마친 나에게 먼저 찾아와서 그 사실을 알려 줬어야 옳을 일인데, 그런 사실을 나에게는 알려 주지도 아니하고, 비밀리에 제나라를 마음대로 귀순시켜 놓았다고 하니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 그런 방식으로 귀순을 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제나라를 지금 평정시켜 놓지 않으면 후일에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므로 설사 역 대부가 희생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애초의 계획대로 반드시 제나라를 평정시켜 놓고야 말 것이다.
만약 역 대부의 공로가 후일에 명백하게 밝혀지면, 비록 대부는 오늘 희생되더라도 그의 후손들만은 반드시 열후(列侯)에 봉해질 것이니 역 대부는 오늘의 나의 처사를 너무 야속하게 생각지 마시도록 여쭈어라.”
제왕의 사신이 즉시 돌아와 제왕과 역이기 앞에서 한신의 말을 사실대로 전하니 역이기는 땅을 치며 한탄한다.

“아아, 내가 한신에게 당하고야 말았구나!”
그러나 제왕은 그와 반대로 크게 노하며,

“나는 이 늙은이에게 단단히 속았다. 이 늙은이를 그냥 죽일 수 없으니 당장 끓는 기름 가마에 처넣어 삶아 죽이도록 하여라!”
하고 명했다.

그 후 한신은 역이기 대부가 팽살(烹殺, 삶아 죽임)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즉시 대군을 발동하여 제나라를 무자비하게 쳐부수기 시작했다.

- 제 13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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