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3화

2021. 7. 14. 07:34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32화

☞ 동자(童子) 구숙(仇叔)의 지혜

팽월이 대량성을 평정한 뒤 외황성에 진을 치고 있노라니 첩자가 달려와서 놀라운 사실을 알린다.

“항우가 대군을 몰고 팽성을 떠나 지금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그 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막강하옵니다.”
팽월은 첩자의 보고를 받고 크게 불안하여 즉시 막료회의를 열었다.

“항우가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치려고 달려오고 있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모사 연포(戀布)가 말한다.

“항우가 직접 군사를 몰고 온다면, 싸워보았자 우리에게 불리할 것은 명백합니다. 저에게는 세 가지의 대책이 있사온데, 첫째는 항우와 정면으로 싸우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북방에 있는 곡성(穀城) 땅의 창읍(昌邑)으로 피신하여 항우가 저절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것이 최상책(最上策)입니다.
두 번째는 한왕에게 급히 지원병을 요청하여 정면으로 싸우는 일인데, 그것은 중책(中策)입니다.
셋째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항우와 자웅을 결해보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전원 옥쇄(全員玉碎)하는 것인데, 그것은 최하책(最下策)이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세 가지 대책 중에 어느 것을 택하실지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팽월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말한다.

“불리한 전쟁을 강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최상책을 택하여 일시나마 창읍으로 옮겨 가기로 합시다.”
이렇게 대책이 정해졌다.

해서 외항성은 구명(仇明)과 주동(周同) 두 장수에게 지키게 하고, 주력부대는 모두가 창읍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려고 하자, 대장 구명이 팽월에게 말한다.

“주력부대가 모두 떠나가고 저희들만 성을 지키다가 항우에게 성을 내주게 되는 날이면,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항우의 손에 몰살을 당하게 될 것 같은데, 그 일은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자(童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구명에게 말한다.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옵소서. 만약 항우가 외항성을 점령한 후에 성안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한다면 제가 그렇게 못 하도록 말리겠습니다.”
팽월은 동자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자, 구명 장군이 동자의 손을 끌어당기며 대답한다.

“이 아이는 소장의 맏아들인 구숙(仇叔)입니다. 이 아이는 올해 열세 살로서 제 에미가 용꿈을 꾸고 잉태했사온데, 다섯 살에 이미 시서(詩書)에 능통하였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이 아이를 ‘기동(奇童)’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오고 있사옵니다.”
“기동이라? 그것참! 장군은 정말로 훌륭한 아들을 두셨소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자 구숙을 향하여

“네가 만약 항우를 설득하게 되면 어떤 말로 설득하려 하느냐?”
하고 물어보았다.

팽월의 질문에 동자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팽월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같은 어린 아이가 항우를 어떤 말로 설득하려는지 내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니냐?”
그러자 동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천기(天機)가 누설되면 안 되오니 장군님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면서 팽월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한동안 무언가를 소곤거린 바, 팽월은 소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그렇게도 뛰어난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만하면 너는 성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능히 구해 낼 수 있겠다.
계획대로 네가 성안의 백성들을 무사히 구해낸다면, 너는 장차 하늘로부터 홍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너를 믿고 곡성으로 떠나기로 하겠다.”
팽월은 그 길로 외항성을 떠나 곡성으로 향하였다.

항우가 외항성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후의 일이다.
항우가 성을 5리 앞둔 곳에 진을 치고 적정(敵情)을 살펴보니, 와황성에서는 한나라의 붉은 깃발만 펄럭일 뿐 군사들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가 않았다.

척후병을 보내 염탐을 해 보았지만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항백이 항우에게 아뢴다.

“팽월이 우리를 당해 낼 자신이 없어서 깃발만 내걸고 도망을 가버린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기회에 폐하께서 진두지휘하여 성안으로 시원한 공격을 한번 퍼부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성안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알아보려면 공격을 퍼부어 보는 것이 상책일 것이오.”
항우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성안으로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 보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성안에 백성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총책임자인 구명 장군에게 달려와 이렇게 호소하였다.

“항우는 한번 화가 나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강력하게 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성안의 백성들을 아무 죄도 없이 몰살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주력부대가 모두 철수해 버린 지금의 병력으로 항우와 대결하기보다 싸움을 피해 속히 항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만 저희들이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겠사옵니다.”
구명이 아들과 상의하여 대답한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백기(白旗)를 높이 올려 달고, 사대문을 활짝 열어 줄 테니 백성들은 모두 문밖으로 달려 나가 항우를 쌍수로 맞아들이면서 ‘우리들은 모두가 본시부터 초나라 백성들인데, 그동안 마지못해 한나라의 지배들 받아 왔노라.’하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제아무리 무지막지한 항우라도 백성들을 죽이려 하겠습니까?”
곧이어 구명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성루에 백기를 높이 올려 달았다.

그런 다음 사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구름떼처럼 성 밖으로 달려 나가며, 저마다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저희들은 본시 초나라 백성들이온데, 팽월이 성을 점령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부역(附逆)을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런 백성들의 고충을 감안하시와 저희들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항우는 대군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였으나 아직도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항백을 불러 명한다.

“팽월이 진작 도망을 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안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끝까지 항거하다 이제야 항복했으니 나는 저놈들의 항복을 진심이라고 믿을 수가 없소이다.
그러니 성안에 있던 젊은 놈들은 모두가 팽월과 한패로 볼 수밖에 없소. 지금부터 십오 세 이상의 젊은 사내놈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토굴을 파고 생매장을 시켜버리시오. 그래야만 나의 분이 조금이라도 풀리겠소.”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대성통곡을 하자, 구숙 동자가 어른들을 달래며 말한다.

“여러분! 조금도 걱정 마세요. 제가 항왕을 직접 만나 뵙고, 성안에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지 않도록 진언을 올려보겠습니다.”
그리고 중군으로 달려가 항우에게 면담을 요청하자, 항우는 동자를 만나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 같은 꼬맹이가 어찌 두려움을 모르고 감히 나를 찾아왔느냐?”
그러자 구숙 소년은 당당한 기세로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신은 폐하의 적자(赤子)이옵니다. 폐하는 신의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어른이십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찾아뵈러 오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하기는 네 말을 들어 보니 그렇기도 하구나. 자식이 부모님을 만나러 오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을 것이냐? 그건 그렇고, 도대체 너는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느냐?”
“폐하의 성덕(聖德)은 탕무(湯武)와도 같으시고, 요순(堯舜)과도 같으셔서 만백성에게 자비를 골고루 베풀어 주실 줄로 믿사옵니다. 그런데 저같이 어린 것이 감히 무슨 말씀을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항우는 ‘성덕이 탕무와도 같고 요순과도 같다.’는 말을 듣고 내심 매우 기쁘면서도 의아심이 없지 않아

“내가 팽월에게 부역한 젊은 것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냐?”
하고 꼬집어 물으니 구숙 소년이 다시 대답한다.

“그런 문제로 폐하를 찾아온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 문제라면 네가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소용이 있고 없는 것을 떠나서 어린 제 말씀을 한 번 들어 보기만이라도 해주시옵소서.”
항우는 하도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면서

“그것참! 맹랑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러자 구숙 소년은 옷깃을 바로잡고 말한다.

“제가 배우기를 ‘천하를 사랑하는 사람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천하를 미워하는 사람은 백성들을 미워한다.’고 배웠습니다.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과 한도 끝도 없이 미워하는 이해(利害)관계는 백성들보다는 폐하 같은 대왕께서 베풀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팽월이 성을 점령하였을 때 그 사람이 너무도 포악하여 성안의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폐하께서 하루속히 우리들을 구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입성하시어 팽월에게 부역한 죄를 물어 저희들을 죽이려 하신다면, 팽월의 학정(虐政)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다른 고을의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폐하를 사모하는 백성들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점을 각별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우는 그제야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구숙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과연 듣고 보니 네 말이 옳은 말이로다. 그러면 네 말대로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거라.”
그러면서 항우는 즉석에서 성안 백성들에게 특별 사면령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외항성을 지키다가 스스로 항복해 온 구명과 주동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 제 13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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