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43화

2021. 7. 16. 07:40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34화

☞ 세 치 혀로 제나라를 얻는 역이기

한왕이 성고성과 형양성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떠난 후 한신은 제나라로 쳐들어갈 준비를 착착 진행 중에 있었는데, 때마침 항우도 성고성과 형양성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몰고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한신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한왕을 구원하러 가기 위해 성고성과 형양성의 전투상황을 수집하면서 제나라 정벌을 차일피일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제왕 전광(齊王 田廣)은 한신이 불원간에 쳐들어오리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싸여 있었다.

한편, 형양성에서 한왕을 모시고 있던 모사 역이기는 제왕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 제왕을 설득시켜 자진 귀순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제나라의 70여 성을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공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역이기 노인은 어느 날 한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연(燕)나라와 조나라는 한신 장군이 이미 평정을 했사오나 제나라는 워낙 힘이 강하고 땅이 넓어서 쉽게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게다가 항우가 지원병을 보내 도와주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수십만 대군을 몰고 가도 점령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면 대부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시오?”
“대왕께서 제왕을 설득하는 조서(詔書)를 써 주시면, 신이 제나라로 가서 제왕을 이해로써 설득해 보면 어떨까 생각되옵니다.
만약 설득이 주효하여 제왕 스스로가 자진하여 우리에게 항복해 온다면, 그보다 좋을 일이 어디 있겠나이까?”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대부께서 제왕을 자진해 항복하게 해 주신다면, 그 공로는 천추에 길이 남을 것이오.
한신 장군이 아직 발군(發軍)을 아니 하고 있는 모양이니 그러면 대부께서 나의 조서를 가지고 제나라로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역이기 노인은 한왕의 조서를 가슴에 품고 곧 제나라를 향하여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역이기는 제나라에 도착하여 제왕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대궐로 들어갔다.
역이기는 제왕을 만나서도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만나자, 제왕은 역이기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크게 분노하여

“그대는 내가 자진 항복하도록 설득하러 온 모양인데, 그대의 태도가 왜 이다지도 불손한가? 그대가 이처럼 불손한 까닭은 우리가 그대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 때문인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군사력으로 그대들의 생각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나 역이기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대왕을 찾아왔는지 나의 말을 들어 보시면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제왕은 끝까지 노하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얼굴빛을 누그러뜨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서 말해 보오.”
그러자 역이기는 당당하게 말한다.

“한왕은 지금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그 위세를 만천하에 떨치고 있소. 게다가 지금 조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한신 장군까지 합세하여 쳐들어오면, 제나라는 그날로 풍비박산이 되고야 말 것이오.
그렇게 되면 대왕은 왕위를 보존하기가 어렵겠기에 나는 제나라의 백성들도 구하고, 대왕도 구해드리고 싶어 이렇게 대왕을 찾아왔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대왕에게 허리를 굽실거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니 대왕 자신이 왕위를 보존하고 싶지 않거든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 버리시오.”
제왕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대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그만 지껄이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나라는 국토가 동서 사방으로 수천 여 리, 게다가 서쪽에는 위, 조 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에는 초나라, 북쪽에는 연나라가 있지 아니한가? 그나 그뿐인가? 우리는 그동안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기치로 살아온 관계로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형편인데, 우리가 어찌 유방을 두려워할 것인가?”
그러자 역이기가 탄식하며 말한다.

“대왕은 어찌 허장성세(虛張聲勢)가 그렇게도 심하오. 제나라가 아무리 강해도 항우는 당해 내지 못할 것이오. 그런 항우조차도 한왕에게 관중 땅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제나라가 한왕에게 항거하려는 것은 ‘사마귀가 팔을 벌려 수레바퀴를 막아내려는 것(螳螂拒轍, 당랑거철)’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란 것을 왜 모르시오?”
“............”
제왕은 그 말에는 찔리는 바가 있는지 입을 다물고 대답을 못하자, 역이기가 이번에는 제왕을 달래듯이 말한다.

“그러나 대왕은 너무 심려치 마소서. 이제부터라도 천하의 추세를 잘 살펴서 흥망의 태도를 명백하게 결정하면 되실 것이오.”
제왕은 골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세상이 어떻게나 변화무쌍한지 나는 천하대세의 추세를 가늠하기가 어렵구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역이기는 ‘이때다’ 싶어 다시 말을 한다.

“대왕이 천하의 추세를 잘 모르시겠다면 내가 설명을 해 드리지요.
지금 초패왕은 강한 듯 하면서도 약하기 짝이 없고, 한왕은 약한 듯 하면서도 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왕은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는데, 항우는 영토의 3분의 1도 채 못 되게 가지고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천하의 대세가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제왕 전광은 역이기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역이기가 계속하여 말한다.

“초패왕 항우가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것은 분명한 역적지거(逆賊之擧)였소. 그러나 한왕은 의제의 유해를 국장으로 정중히 모심으로써 천하의 민심을 한 몸에 모으게 되었지요. 한왕이 제후들로부터 열광적인 존경을 받게 된 원인이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입니다.
천하의 민심이 그러할 진데, 대왕도 천하의 추세에 따라서 제나라를 온전하게 보존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오로지 대왕을 위하여 이런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왕은 그제야 납득이 가는지 역이기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간청하듯 말한다.

“나는 천하의 추세에 가늠을 못하다가 오늘 대인의 말씀을 듣고서야 크게 깨달았소이다. 그러면 앞으로 한왕과 친하게 지내야 좋겠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지 대인께서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소.”
역이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뻤다.

“참으로 올바른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왕은 한왕께 사신을 보내어 정중한 항표(降表)를 보내도록 하소서. 나는 한왕께서 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요.”
이리하여 역이기는 입만 가지고 제나라의 70여 성을 고스란히 한왕에게 귀속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두 사람이 일단 합의를 하고 나자, 그 자리에 있던 제나라 대장 전횡(田橫)이 제왕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대왕 전하! 우리가 역 대인과 합의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조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한신 장군이 대군을 휘몰아쳐 온다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사옵니까. 대왕께서는 그 점을 각별히 고려하셔야 하옵니다.”
제왕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얼굴빛이 변했다.

“과연 듣고 보니 그 점이 걱정이구려. 역 대인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주시렵니까?”
역이기가 즉각 대답한다.

“그 문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한왕의 명령을 받들고 찾아왔으니 한신 장군인들 어찌 마음대로 쳐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로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만일을 위해서 대인께서 한신 장군에게 그런 일이 없도록 편지를 한 통 써 보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곧 한신 장군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역이기는 한신에게 곧 편지를 보냈다.

바로 그 무렵 한신은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 제나라를 공략하려고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돌연 제나라에 머물고 있는 역이기 대부로부터 편지가 온 바, 한신이 편지를 받아 보니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대부 역이기는 삼가 한신 대원수께 글월을 보내옵니다.
본인은 대왕의 전지를 받들고 제나라에 와서 제왕을 간곡히 설득한 결과 싸우지 않고 제나라 70여 성을 고스란히 귀순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많은 생령(生靈)들을 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서도 전쟁의 노고를 면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한 대왕의 성덕(聖德)과 한 원수의 위무(威武)의 덕택인 줄로 압니다.
이런 까닭에 원수께서는 제나라를 공략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성과 성고성으로 가셔서 푹 쉬셨다가 마지막 남은 초나라를 공략하심이 좋을 줄로 알리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미 다섯 나라를 모두 평정하였으므로 이제는 마지막 남은 초나라를 공략하여 통일 성업을 성취하면 원수의 공적은 청사에 영원히 길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께서는 더욱 자중자애 하시기 바라옵니다.

한신은 역이기의 편지를 읽어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회신을 역이기에게 써 보냈다.

역 대부께서 능수능란하신 변론으로 싸우지도 아니하고 제나라의 70여 성을 입수하시는데 성공하셨다니 그보다 더 큰 공로가 어디 있으오리까!
삼가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나는 이제 형양성으로 달려가 대왕을 받들고 초나라를 공략할 계획을 진행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그때에 이르러 제나라도 우리와 합동 작전으로 초나라를 공략할 수 있도록 역 대부께서는 계속하여 많은 애를 써 주시기 바라옵니다.

역이기가 한신의 편지를 제왕에게 내보이니 제왕은 그제야 안심하고 역이기를 더욱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이렇게 역이기 노인이 순전히 입만 가지고 제나라의 70여 성을 얻는 공로를 세웠으므로 그때부터는 기쁨에 도취하여 날마다 술만 마시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제 13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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