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450화

2021. 7. 27. 08:4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45화

☞ 태공의 구출

다음 날 후공이 항우의 사신과 함께 초진을 다시 찾아가니 항우가 묻는다.

“후공은 무슨 일로 나를 다시 찾아오셨소?”
“한왕은 폐하께옵서 강화조약을 응낙해주신데 크게 감동하고 계시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내일 만나실 때 무장병을 일체 배치하지 말 것과 그 자리에서 태공 일가족을 모두 돌려보내주심으로써 형제의 정리를 더욱 두텁게 하시자는 한왕의 분부를 말씀드리고자 찾아왔사옵니다.”
“뭐? 태공 일가족을 모두 돌려보내달라고?”
항우는 뜻밖의 조건에 적잖이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후공이 다시 말한다.

“두 분께서 강화를 맺으시고 태공을 돌려 보내주시면, 세상 사람들은 폐하의 성덕을 크게 찬양할 것이 분명하오니 폐하께서는 그 점을 감안하시어 이번 기회에 태공 일가족을 모두 돌려주시도록 하시옵소서.”
항우는 강화조약을 맺는 것만은 불감청이언정 고소원(不敢請, 감히 요청할 것은 아니지만, 固所願, 바라던 바)이었다.
그러나 태공을 돌려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한왕이 장래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까닭에 그의 부모를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자신에게는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답을 주저하고 있노라니 후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한다.

“강화를 맺고 형제의 의를 새롭게 하는 이 마당에 만약 폐하께서 태공 일가족을 돌려보내 주시지 않으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폐하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옵니까?
그런 것은 한왕께서도 같은 생각이시어 태공 내외분과 왕후를 돌려받지 못하신다면 강화조약을 맺는 의미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시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항우로서는 아무리 싫어도 태공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잠시 생각한 끝에 항우가 선뜻 말한다.

“좋소이다. 그러면 강화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태공 일가족을 모두 돌려보내기로 하겠소.”
후공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레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따져 묻는다.

“고맙사옵니다. 그러면 소생은 폐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곧 돌아가 한왕께 사실대로 품고하겠습니다.
만약 폐하의 말씀에 추호라도 어긋남이 있게 되면, 소생은 목숨이 살아남기 어려우니 부디 그런 일은 없으시도록 거듭 바라옵니다.”
그러자 항우는 대뜸 나무라는 어조로 말한다.

“대장부의 일언은 천금보다도 무겁게 하라 하였소. 귀공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아무려니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소? 아무런 걱정을 말고 속히 돌아가 한왕에게 나의 뜻을 솔직히 전하도록 하시오.”
후공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고 나자, 계포와 종이매가 항우에게 간한다.

“만약 한왕과 강화조약을 맺으시더라도 태공만은 절대로 돌려주지 않으셔야 하옵니다. 태공을 돌려주고 난 뒤에 한왕이 강화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해 오면, 저들을 제지시킬 방어막을 잃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모르는 소리 그만하오. 강화조약을 맺은 뒤에도 태공을 그냥 붙잡아 두고 있으면 제후(諸侯)들이 나를 얼마나 비겁한 자라고 비방할 것이오?
태공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강화조약 자체부터가 성립되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장량과 친분이 두터운 항백이 이때다 싶어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태공이 비록 우리에게 억류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요 며칠 한군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태공 일가족에 대한 폐하의 대접이 극진하셨으니 이제 그들을 고이 돌려보내 준다면, 한왕은 그동안 태공에 대한 폐하의 보살핌을 생각해서라도 감히 다른 생각을 못할 것이옵니다.”
항우는 항백의 말을 옳게 여겨 다음날 태공 내외와 여왕후(呂王后)를 수레에 태워 친히 국경지대로 설정한 홍구(鴻溝)를 향해 떠났다.

이리하여 홍구에 도착한 항우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유방과 회견장(會見場)에서 오랜만에 서로 반가운 얼굴을 하고 만났다.

두 사람은 함양(咸陽)에서 서로 헤어진 이후로 초한 양국(楚漢兩國)으로 나뉘어 싸움을 계속하기를 4년 만에 처음으로 가깝게 만나는 감격적인 상봉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 온 두 영웅이었지만, 서로 간에 강화조약을 맺으려는 이 마당에 와서는 피차간에 옛정을 새롭게 나누며 감격적인 포옹까지 나누었다.

이윽고 강화 조약에 서명이 끝났다.
그리하여 항우는 조약문서 한 통을 유방에게 나눠주며 말한다.

“우리가 서로 강화조약을 맺었으니 이제부터는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국경선을 존중하며, 피차간에 싸우지 말기로 합시다.
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곧 팽성으로 돌아갈 것인데, 그 전에 태공 일가족을 모두 돌려드리기로 하겠소.”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머리를 수그리며 말한다.

“대왕께서 나의 일가족을 모두 돌려주신다니 이렇게도 고맙고 기쁜 일이 없소이다.”
이리하여 태공 일가족은 인질로 붙잡힌 지 3년 만에 아들인 한왕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 항우는 곧 군사를 거두어 팽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편, 한왕은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태공 일행을 모시고 본진으로 돌아오니 장량, 진평 등이 멀리까지 영접을 나와 주었다.
한왕은 희색이 넘치는 시선으로 장량을 보며 말한다.

“이번에 태공 내외분을 무사히 모시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덕분입니다. 선생의 출중하신 계략이 아니었던들 태공 내외분께서 어찌 이처럼 무사히 돌아오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장량이 항우의 곤궁함과 유방의 절실함을 상쇄시키는 한초(漢楚) 간에 강화조약을 추진하지 않았던들 태공이 결코 항우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왕은 장량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나서 다시 말한다.

“항왕은 강화조약을 체결하기가 무섭게 팽성으로 돌아갔으니 우리도 속히 철군하여 함양으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장량은 그 말을 듣자,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우리가 함양으로 철군한다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이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오니까?”
“대왕께서는 거듭 생각해 보시옵소서. 우리 군사들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온 것은 오로지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불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초군과의 강화조약으로 인하여 고향을 지척에 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포기하고 함양으로 철수해 버린다면, 어느 군사가 우리 진영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태반의 군사들이 도망을 가버리면, 대왕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꾸려나가실 것이옵니까?”
한왕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걱정스러웠다.

고향에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서역(西域)에 그냥 눌러앉아 버리면 태반의 군사들이 도망을 가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방 선생! 그러면 이 문제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우리가 항우에게 강화조약을 요청한 것은 태공을 구출해 오기 위한 일시적인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이제 우리가 태공 일행을 모셔오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이제 우리의 성패(成敗) 여부는 오로지 대왕의 결단에 달려있사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강화 조약을 액면 그대로 이행하여 천하를 한초(漢楚)로 양분한다면, 변방의 제후들은 누구를 임금으로 섬기고, 누구의 신하라고 말할 수가 있으오리까?
자고로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天無二日), 백성들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는(民無二王( 법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은 십중팔구 대왕께서 가지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초패왕이 지금처럼 팽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분명히 천하통일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군사를 부쩍 키우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인데,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후일에 호랑이를 키워 커다란 피해를 입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이까?”
이론이 정연한 장량의 설득을 듣고, 한왕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나는 이미 초패왕과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조약에 먹물도 마르기 전에 약속을 배반한다면, 이번에는 만천하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 아니요?”
그러자 장량이 즉석에서 반론한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시옵니다. 조그만 신의에 구애되어 대의(大義)를 저버리시는 것은 명지자(明智者)가 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그 옛날 탕무(湯武)는 폭군이었던 걸왕과 군신지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하여 걸왕을 쫓아내고 새 나라를 창업한 일이 있사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폭군 초패왕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려고 애쓰는 대의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재고하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장량이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진평, 육가, 수하 등 지낭(智囊, 꾀주머니, 모사)들이 한왕에게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방 선생의 말씀은 금과옥조같이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저희들이 오늘날까지 대왕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것은 오로지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만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는데 있었던 것이옵니다.대왕께서는 그 점을 거듭 통촉하시어 신속히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장량을 비롯한 모든 중신들이 열화 같은 결심을 촉구하므로 한왕은 드디어 최후의 단안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의 생각이 모두 그렇다면, 나는 초패왕과의 약조를 파기하고, 여러분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겠소이다.”
이리하여 한나라 군사들은 그날부터 팽성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다시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 제 14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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