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47화

2021. 7. 29. 07:14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47화

☞ 장량의 오판으로 위기를 맞는 유방

항우는 워낙 성미가 급한지라 30만 대군을 몰아쳐 오기 무섭게 유방의 근거지인 고릉성에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려고 하였다.

만약 그랬다면 한군(漢軍)은 크게 패하고, 한왕 자신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었다고나 할까? 항백이 항우의 전격적인 작전을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 우리 군사들은 쉴 틈 없이 먼 길을 달려오느라고 몹시 피로해 있사옵니다.
더구나 적정(敵情)을 잘 모르면서 무작정 공격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오니 며칠 동안 여유를 갖고 적정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 총공격을 퍼붓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래야만 적을 일거에 섬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백이 기습적인 전격 작전에 반대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항백은 일찍부터 장량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 데다 한왕 유방과는 처남, 매부지간이었기 때문에 한왕을 최후의 궁지에까지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숙질(叔姪)간인 항우를 배반하고 한왕에게 돌아 붙을 생각도 없었다.
다만 한왕의 덕망과 장량의 기발한 지략을 평소부터 흠모해 왔기 때문에 마음만은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항백은 초한(楚漢) 간의 강화조약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였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친구인 장량과 처남인 유방이 절대적인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그만 시간이라도 벌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항백이 전격 작전을 반대하고 나오자, 항우는 항백의 의견을 받아들여 먼저 적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로 하였다.

한편, 한나라 군사들은 초군이 30리 밖에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움직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왕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한신, 영포, 팽월 중 단 한 사람도 달려와 주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왕이 조서(詔書)만 보내면 ‘한신, 영포, 팽월 등이 부리나케 달려와 줄 것’이라고 단언했던 장량의 커다란 계산착오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한왕은 너무도 불안스러워 장량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나는 선생의 말씀만 믿고 항우에게 선전 포고문을 보냈는데, 한신, 영포, 팽월 등은 감감무소식인 채 항우만이 대군을 몰아쳐 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장량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한신, 영포, 팽월 등이 대왕의 조서를 받아보면, 즉시 달려오리라고 믿었던 것은 신의 커다란 계산 착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지 아니하면 다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가 어렵다뿐이지, 적을 막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한나라 군사들은 수비 태세만 견고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양으로 10여 일이 지나도록 서로 간에 움직이는 기색이 전혀 없다 보니 항우가 몹시 답답함을 느끼며, 모든 대장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묻는다.

“유방은 우리에게 선전 포고문을 보낸 주제에 우리가 코앞에 와 있어도 움직임이 전혀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계포가 나서며 말한다.

“유방은 지금 우리에게 둔병지계(鈍兵之計)를 쓰고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둔병지계라니? 그러면 저들은 우리와의 싸움을 회피하고, 우리 군사들이 저절로 지쳐 버리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예, 그러하옵니다.”
항우는 이번에는 종이매에게 묻는다.

“장군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소장도 계포 장군과 똑같은 생각이옵니다. 둔병지계를 쓰지 않는다면, 선전 포고문까지 보낸 주제에 어째서 나와 싸우기를 회피하겠사옵니까?”
그러자 대장 주란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온다.

“두 분의 의견은 크게 잘못된 것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한신의 군사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싸울 자신이 없어 수비만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번 싸움은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니 오늘이라도 총공격을 퍼붓도록 하시옵소서.”
“음... 듣고 보니 과연 장군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면 내일은 아침부터 한군에게 총공격을 퍼붓기로 합시다.”
다음날 항우가 총공세를 개시했다.

한왕은 왕릉, 번쾌, 관영, 노관 등 네 장수로 하여금 적을 막아내게 하였다.
항우가 말을 달려 나와 적장들에게 말한다.

“내가 한왕과 단둘이 담판할 일이 있으니 그대들은 물러가고 한왕을 내보내라.”
그러자 왕릉이 장검을 휘두르며 대답한다.

“대왕께서는 그대가 태공을 팽살하려 했던 원한을 푸시려고, 그대를 생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시어 우리 네 사람은 그대를 생포해 가려고 나왔다.
그러니 그대는 여러 말 말고 우리의 결박을 받으라.”
이에 항우가 크게 화를 내며 장검을 휘두르며 비호같이 돌진해 왔다.

네 장수가 항우를 상대로 30여 합을 싸웠으나 항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제각기 쫓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근흠, 주창, 고기, 여마통 등 10여 명의 장수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와 싸움을 가로맡았다.

그러자 초진에서도 계포, 종이매, 환초, 우자기 등 모든 대장들이 총출동하여 양군 대장들 간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할 뿐 끝날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었다.
이때 초군 진지에서 별안간 요란스러운 철포 소리가 들려왔다.
철포 소리를 신호로 대장 주란이 대군을 몰아쳐 나와 한군을 사면팔방으로 때려 부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한나라 군사들을 마치 풀을 베듯 쓸어버리는데, 그 기세가 막강하기가 이를 데 없자, 한왕은 크게 당황하여

“모든 군사들은 즉각 성안으로 후퇴하라!”
하고 긴급 후퇴명령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군사들은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일절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는 성문 앞까지 접근해와 의기양양하게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적은 이미 독 안에 든 생쥐들이다. 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유방을 당장에 생포하라. 나의 오랜 원한을 오늘 밤에 깨끗하게 풀고야 말 것이다.”
그러자 대장들이 입을 모아 아뢴다.

“폐하! 지금은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 오니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뭐가 두려워서 내일 아침으로 미룬다는 것이냐?”
“어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함락시키려면, 적이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어 우리 측의 피해가 많게 되옵니다.
그러니 밝은 후에 공격하는 것이 우리 측의 손실을 줄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음... 그러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더라도 오늘 밤에 경계만은 삼엄하게 하라.”
한편, 성안에 갇혀 있던 한왕은 불안에 떨며 모든 막료들에게 말한다.

“적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성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초군은 진종일 싸우느라고 무척 지쳐 있어서 지금쯤은 모두 잠이 들어 버렸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오늘 밤에 성고성으로 근거지를 옮겨 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고릉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할 바에는 지키기가 견고한 성고성으로 옮겨 가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러나 적의 경계가 삼엄하여 성을 함부로 빠져나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신이 적정을 잘 알아보아서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장량은 번쾌, 주발, 시무, 근흠 등 네 장수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 적정을 면밀하게 살펴 오도록 하였다.

네 장수가 어둠 속으로 잠행하여 적정을 살펴보니 북문에는 적이 거의 없어서 북문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나라 군사들이 한왕을 모시고 북문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왕을 선두로 군사들이 절반쯤 성을 빠져나갔을 때 초장 종이매가 그 사실을 보고 받고 항우에게 급히 달려와 고한다.

“폐하! 유방을 비롯한 그의 군사들이 성을 포기하고 지금 북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하옵니다.”
자다 말고 일어나 그 보고를 받은 항우는 큰소리로 외친다.

“뭐야? 유방이 도망을 가고 있다고? 그러면 당장 군사를 보내 그자를 잡아오도록 하여라!”
항우가 급하게 호령을 내리자, 종이매가 조용히 간한다.

“폐하! 적이 도망을 갈 때는 방비책을 튼튼하게 세워 놓고 떠났을 것이 분명하오니 함부로 추격하는 것은 삼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섣불리 추격하다가 적의 복병에 말려드는 날이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항백이 종이매의 의견에 찬성하고 나온다.

“폐하! 밤도망을 갈 정도라면 유방의 운명은 이미 다 된 판이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구태여 야간추적을 하지 않아도 머지않아 유방을 완전 섬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우는 종이매와 항백의 의견을 옳게 여겨 야간추적을 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 덕택에 한왕은 남은 군사들을 고스란히 거느리고 성고성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 제 14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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