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50화
2021. 8. 1. 07:29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50화
☞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의 위계(僞計)
항우는 곧 장중으로 달려 나와 긴급 중신 회의를 소집했다.
상서령 항백을 비롯하여 항장, 계포, 주란, 종이매 등 대장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자리에 앉은 채로 굵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리에 함께한 대장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중에 종이매가 묻는다.
“폐하께서는 긴급회의 주재는 하지 않으시고,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시옵니까?”
항우는 그제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범증 군사께서는 일찍이 나에게 ‘유방은 무서운 야망가(野望家)이니 일찌감치 죽여 없애지 않았다가는 큰일 난다. 그리고 한신을 크게 쓰지 않으려면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간언을 한 일이 있었소.
그때 나는 그 간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오늘날 이런 변을 당하게 되었으니 작고하신 범증 아부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하구려.
우리 군사는 30만인데 유방은 백만 대군을 몰고 오고, 게다가 한신이란 자는 총사령관이라니 이를 어찌해야 좋겠소.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범증 군사를 돌아가시게 만든 것이 생각할수록 애통하구려.”
그러자 주란이 위로하며 말한다.
“폐하!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서육성(舒六城)을 지키고 있는 주은(周殷)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긴급 소집령을 내리시면 주은도 10만 명을 즉각 몰고 올 것이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은은 본래 영포와 가까운 관계로 나를 돕기보다는 유방의 편에 가담하기 쉬운 인물이오. 차라리 배반의 우환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은을 넌지시 불러다가 미리 처치해 버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오.”
항백이 그 말을 듣고,
“주상의 말씀대로 주은은 위험한 인물이니 미리 없애 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항우는 이녕(李寧)을 시켜 주은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은 장군은 보시오. 장군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이 편지를 보는 대로 급히 와 주기를 바라오.〉”
편지를 받아 본 주은은 편지를 보낸 항우의 의도를 수상하게 여겨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해 본다.
‘항우가 무엇 때문에 별안간 나를 부를까? 그는 지금 정세(情勢)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내가 의심스러워 죽여 없애려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일찌감치 영포 장군을 통해 한왕에게 협력하는 편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주은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치미를 떼고 이녕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패왕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지만, 이곳은 워낙 도둑이 많아 치안이 몹시 어지러운 까닭에 나는 일시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귀공은 돌아가셔서 폐하께 그렇게 전해 주소서.”
항우의 사신 이녕은 주은의 거절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면서
“이제부터 초한전(楚漢戰)이 크게 벌어질 판인데, 장군이 도둑 때문에 폐하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하고 노골적으로 나무랐다.
그러자 주은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귀공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귀공은 초한전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는 모양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내 고을의 치안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오.”
이녕은 주은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육을 떠났다.
그리하여 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계(會稽) 고을에 들렸다.
‘회계 태수 오주(吳舟)도 군사를 몰고 오게 하라.’는 항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의 서한을 받아 본 오주는 부장(副將) 정형(鄭亨)과 상의하더니 이녕에게 말한다.
“폐하의 명령에 따라 본인은 열흘 안으로 군사 8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가겠습니다.”
이녕이 팽성으로 돌아와 주은과 오주를 찾았던 경위를 소상하게 보고하자, 항우는 주은의 배반에 격노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주은이란 놈을 먼저 때려 부수고, 유방은 다음번에 쳐부수기로 하자.”
그러나 항백이 간한다.
“유방이 몰고 온다는 백만 대군을 상대하기에 앞서 다른 곳에 힘을 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유방에 맞서려고 모든 군사를 규합해 보니 이럭저럭 50만에 달했다.
한편, 한신은 구리산 지형을 속속들이 담은 현지 지도를 소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지도를 앞에 놓고,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와 상의한다.
“구리산 계곡에서 싸운다면, 우리는 항우에게 승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올 수 있을지 좋은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는 그 방도를 가르쳐 주소서.”
“항우는 워낙 우둔한 사람이므로 그를 속이기는 쉬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의 막하에는 항백, 종이매 같은 우수한 모사들이 있어서 그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오기는 좀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올 방도가 전혀 없으시단 말씀입니까?”
이좌거는 고즈넉히 머리를 숙이고,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다가 머리를 들며 말한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결국은 위계(僞計)를 쓰는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어떤 위계를 쓰면 되겠습니까?”
“항우를 구리산 계곡으로 유인해 오려면, 초군도 믿을만한 우리 측의 한 사람을 위장 투항(僞裝投降)시켜서 항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위계를 써야 합니다.
항우는 고지식한 성품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利害)로 부추겨 놓기만 하면 항우는 반드시 구리산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매복해 있던 우리 군이 공격을 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과연 묘계 중의 묘계이십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장 투항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위장 투항이란 워낙 고도한 지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적임자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한신은 한참 동안 깊은 궁리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이좌거에게 말한다.
“매우 미안한 부탁이오나, 선생께서 몸소 그 일을 맡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처럼 막중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선생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사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오니 선생께서 몸소 나서 주시옵소서.”
이좌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제가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항우는 그 사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본시 조(趙)나라의 명망 있던 대부이셨으니, 선생이 투항하신다면 항우는 틀림없이 선생을 믿을 것이옵니다.
만약 선생의 수고로 초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면, 선생의 공로는 누구보다도 크실 것이옵니다.”
이좌거는 그 말을 듣고 흔쾌히 웃으며 대답한다.
“좋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원수의 각별한 우대를 받아오면서 아무런 보답을 못했었는데, 이번 일로 그동안의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일이라도 항우를 만나러 떠날 테니, 원수께서는 구리산 계곡에 진을 치고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좌거는 다음날 길을 떠나 팽성에 도착해서 우선 상서령 항백을 찾아가자, 항백은 이좌거를 정중히 맞아들이며 묻는다.
“선생은 본시 조나라의 대부이셨다가 조나라가 한신에게 멸망한 뒤에는 그의 장하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습니까?”
이좌거가 숙연한 얼굴로 대답한다.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본시 조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왕께서 나의 간언을 듣지 아니하시고 진여(陳餘)의 속임수에 넘어가 한나라와 싸우는 바람에 조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한신 장군의 그늘에서 기식(寄食)을 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제가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은 한나라를 탈출하여 이리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항백은 ‘탈출’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탈출이라뇨? 한신의 그늘에서 이리로 도망을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이좌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그렇습니다. 사내대장부가 남의 그늘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지내자니, 세상만사가 비위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면서 한숨조차 쉬어 보이자, 항백이 고개를 기울여 보이며 말했다.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생 같은 분이라면 한신이 극진히 대우해드렸을 것인데, 뭐가 못마땅해 비위에 거슬렸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한신 장군도 처음에는 저를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삼제왕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에 없는 거드름을 피우며 저를 마치 자신의 졸개처럼 여기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초한전이 벌어질 판이기에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초패왕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곳으로 도망을 오게 된 것이옵니다.”
항백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신은 권모술수가 누구보다도 능한 사람입니다.
선생이 한신의 사주(使嗾)를 받고 위장 투항을 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선생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이까?”
그 말에 이좌거는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십니다. 나는 한 사람의 모사(謨士)일 뿐이지, 나 자신이 무기를 들고 직접 전쟁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더라도 취사선택(取捨選擇)은 장군 자신께서 하실 일이 아니옵니까?”
“음, 그건 그렇지만...”
항백이 끝끝내 믿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이좌거는 개탄해 마지않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나는 초패왕의 위덕을 크게 사모하여 이곳까지 왔건만, 이제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항백은 그 말을 듣자, 자신의 불찰을 크게 깨달은 듯 이좌거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는다.
“선생 같은 분을 의심했던 것은 나의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선생 같은 분은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법인데, 일시나마 의심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폐하께서는 선생같이 훌륭한 분이 스스로 찾아오신 것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 집에서 술이나 한잔씩 나누시고, 내일 아침 일찍 입궐하여 폐하를 알현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이좌거는 이날 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항우를 만나기로 하였다.
항우는 이좌거가 투항해 왔다는 말을 듣고, 어쩔 줄 몰라 기뻐하며 말한다.
“뭐요? 이좌거가 투항을 해왔다고? 세상에 이런 경사(慶事)가 있나!
그러잖아도 지금 나의 주변에는 모사다운 모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몹시 아쉽던 판인데, 이좌거가 왔다니 즉시 모셔 들이시오.”
이좌거가 항백의 안내로 어전에 나오자, 항우는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한다.
“나는 진작부터 광무군을 무척 사모하고 있었소이다. 그러기에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찾아와 주셔서 이런 고마운 일이 없구려.”
이좌거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은 조왕(趙王)의 버림을 받고 한신 장군을 찾아갔으나, 한신 장군도 저를 처음과 달리 중요하게 써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자결할 결심까지도 했었는데, 폐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니 한없이 감격스럽사옵니다.”
“선생같이 훌륭하신 분이 그런 설움을 당하게 되신 것은 조왕이나 한신이 모두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없었기 때문이오.
나만은 선생을 잘 알고 있으니, 오늘부터는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시기 바라오.”
이리하여 위장 투항한 이좌거는 그날부터 항우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모사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었다.
한편, 한왕은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눈앞에 두고 한신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초전부터 승리를 하려면 지용(智勇)을 겸비한 장수가 선봉장이 되어야 할 것인데, 누구를 선봉장으로 내세우는 게 좋겠소?”
“신이 조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지용을 겸비한 장수를 찾던 중에 천만다행으로 두 사람의 효장(驍將)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이번 싸움에 선봉장으로 내세우면 초전부터 우리가 대승을 거둘 수 있겠사옵니다.”
“오오, 그런 장수가 있다면 내가 직접 만나보고 싶구려.”
한신은 즉석에서 두 사람의 장수를 어전으로 불러왔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이 당당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효장임이 틀림없었다.
한신은 그들을 한왕에게 소개한다.
“이쪽은 원요현 태생으로 이름을 공희(孔熙)라 하옵고, 이쪽은 비현 태생으로 이름은 진하(陳賀)라고 하옵니다.
두 사람 모두 지모(智謨)와 궁마(弓馬)에 능한 백전노장들이옵니다.”
한왕은 그들을 만나보고, 지극히 만족스러워하면서 즉석에서
“내 그대들의 출신지방 이름을 따서 공희 장군을 ‘요후(蓼侯)’에 봉하고, 진하 장군은 ‘비후(費侯)’에 봉할지니, 부디 선봉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워 주기 바라오.”
하고 특별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한왕과 한신의 협력으로 백만 대군의 출정 태세는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다.
- 제 15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