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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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방랑기24화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24화 [月白雪白 天下地白(월백설백 천하지백) :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얗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장판은 거울처럼 반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 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 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허나 이 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따뜻한 방에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마주 대했던 미모의 여인의 환영이 눈앞에 어..
2020.09.03 -
방랑시인김삿갓23화
★ 방랑시인 김삿갓-023화 [此日彼頃 今百年(차일피적 금백년 : 이 핑계 저 핑계 하는 사이 백 년이 되고 말 것이오)]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뿐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듯하다가 단념한 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 듯..
2020.09.02 -
김삿갓22화
#방랑시인 김삿갓-022화 [김삿갓의 수작(酬酌)] 아침을 거르고 나선 길이라 오전이 지나니 몹시 시장기가 들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춥고 보니 따뜻한 불기운이 더욱 그리웠다.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시름없이 걷고 있는데 삼거리가 나타났다. 오른쪽 길 저만치에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행했다. 사실 수중에는 엽전 한 닢 없었지만 그곳으로 가면 무엇인가 생길 것 같았다. 주막은 마당도 넓고 마루도 넓었다. 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있는 사립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게 아무도 없소?”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우선 호기롭게 주모를 찾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한 번 주모를 불렀다. 잠시 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삼십이 넘었을까, ..
2020.09.01 -
김삿갓이야기 보넛 스
★ 김삿갓 이야기 보너/사또 書信풀이 - 來不往~ 來不往 김 삿갓이 산길을 진종일 걸어오다가 해거름에 어떤 마을에 당도하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 마당에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떡을 치고 한편에서는 부침개를 부치고김 삿갓은 부침개 냄새를 맡자 새삼스러이 허기가 느껴져 옆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무슨 큰 잔치가 있기에 이렇게도 법석 거리오?” 마을 사람들은 김 삿갓을 나무라 듯 대답 했다. “당신은 내일이 오진사 댁 진갑 날이란 것을 모르오. 이번 진갑 날에는 본관 사또님을 모시기 위해서 돼지 다섯 마리와 황소 한 마리를 잡았다오.“ 옆에 있는 사람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이 사람아! 사또께서 내일 오실지 안 오실지 몰라서 오진사 어른은 지금 똥줄이 타고 계시다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2020.08.31 -
방랑시인 김삿갓 21화
#방랑시인 김삿갓-021화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 듯 우뚝 솟아 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오십 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솟을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 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
2020.08.31 -
방랑시인 김삿갓 20화
#방랑시인 김삿갓-020화 [眼中七子 皆爲盜(안중칠자 곤위도 : 눈앞에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다)]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 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바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 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을 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
202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