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83화

2021. 9. 4. 06:30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3화

☞ 종남산으로 들어가는 장량

“어떤 자가 그런 고자질을 했는지 모르오나, 소하 승상이 공지를 개간하여 사리를 도모했다는 것은 커다란 오해이시옵니다.
실상인 즉, 폐하께서 진희의 반란과 영포의 반란을 평정하시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셨을 때 소하 승상은 군량을 풍족하게 공급해드리기 위해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공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였던 것이옵니다.
상림원의 공지도 그때 개간하여 곡식을 심은 것이옵니다. 소하 승상께서는 거기서 나온 곡식을 한 톨도 사유(私有)한 일이 없사옵니다.
국가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공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심게 한 것은 승상의 임무인 줄로 아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소인배의 말을 듣고 승상을 의심한 것은 내가 너무도 불민한 탓이로다. 승상을 직접 찾아가서 사과해야 하겠으니 나를 옥으로 인도하거라.”
황제가 몸소 감옥에 납신다는 것은 법도 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방은 승상을 함부로 하옥시킨 죄책이 너무도 심하여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소하를 직접 석방시키면서 말한다.

“내가 워낙 불민하여 승상을 일시나마 하옥시켰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경은 아무런 죄도 없이 하옥 당하면서 어찌하여 한마디의 변명조차 아니 하셨소이까?”
소하가 국궁 배례하며 아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이 조금만 참고 견디면 주상께서 반드시 알아주실 일이온데, 구차스럽게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나이까?”
유방은 그 말에 더욱 감격해 하며 말한다.

“경은 진실로 현명한 재상이시오. 경같이 어질고 너그러운 분을 참소한 소인이 있었으니 내 그런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소이다.”
그리고 유방은 소하를 무고한 자를 당장 잡아다가 목을 베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한편, 소하가 아무 죄도 없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장량이었다.
장량은 한숨을 쉬며 혼자 탄식해 마지않았다.

‘소하 같은 명재상을 투옥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주상은 제위(帝位)에 오르고 나자 한신, 영포, 팽월 같은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더니 이제는 소하도 처치해 버릴 생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이 아니겠는가?‘
장량은 문득 태자의 계승 문제를 자기가 배후에서 조종해 왔음을 깨닫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만약 ‘상산사호’를 통해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았던들 지금쯤 유방의 뜻대로 ‘여의’가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 분명했겠기 때문이었다.

그런 막후의 비밀이 지금이라도 유방에게 탄로 나는 날이면 자기 자신도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량은 ‘상산사호’들을 찾아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나서

“나는 아무래도 종남산으로 들어가 수도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하고 말하자, 상산사호들은 즉석에서 찬성하며 말한다.

“태자 책봉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저러나 선생께서 종남산으로 들어가신다면 저희들도 선생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를 따라 들어가겠다는 말씀이 고맙기는 하오. 그러나 우리가 한꺼번에 모두 떠나 버리면 주상께서 오해를 하실지 모르니 그 점도 생각하셔야 하오.”
무슨 일에나 용의주도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장량이었으니 장량의 말에 ‘상산사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나중에 떠나기로 할 테니 선생은 주상의 윤허를 받아 종남산으로 먼저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장량은 유방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려고 오랜만에 입궐하자, 유방은 크게 반가워하며 말한다.

“선생을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되어 이렇게도 기쁜 일이 없소이다. 그간 건강은 어떠하시옵니까?”
장량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이 그동안 신병으로 인해 자주 문후를 여쭙지 못해 죄송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신병이라고요?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제는 신도 나이가 많아 심신이 모두 노쇠해졌사옵니다.
앞으로는 산수가 좋은 종남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고 싶사오니 폐하께서는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낙심하며 말한다.

“선생께서 내 곁을 떠나시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선생은 그동안 공로가 너무도 많으셨기에 나는 선생에게 관작을 수여한 바 있었지만, 선생께서 굳게 사양하시며 관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하시니 혹시 내게 무슨 불만이라도 계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만약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소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관후 인덕하신 폐하께 신이 어찌 불만이 있을 수 있으오리까! 신이 관작을 사양한 것은 다만 신의 신념일 따름이었사옵니다.
또한 신이 종남산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몸이 쇠약해진 때문이오니 폐하께서는 쾌히 윤허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다른 일도 아닌 건강을 위해 종남산으로 들어가시겠다면 어찌 무리하게 붙잡을 수 있으오리까? 그렇다면 선생의 뜻대로 떠나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나 나 역시도 몸이 자꾸만 쇠약해 와서 우리가 지금 작별을 하게 되면, 차후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될는지 그 일을 생각하면 단장(斷腸)의 비애를 금할 길이 없구려.”
이렇게 말하며 유방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유방은 장량과 이제 작별하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그 얘기만은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더니, 영원한 것도 없는 것이 인생무상이로다!’
하는 생각이 내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렇게 장량이 종남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상산사호’들도 유방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이제 천하는 통일되어 사해가 안정되었사옵고, 태자 또한 영명하시기 그지없사와 이로써 한(漢)나라의 국기(國基)는 튼튼하게 다져졌사옵니다.
저희들은 이미 팔십을 넘어 기동이 자유롭지 못하오니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게 해 주시옵소서.”
장량과의 약속이었다.

그들도 장량의 뒤를 따라 종남산으로 들어가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상산사호’들을 서글픈 얼굴로 바라보며 만류한다.

“장량 선생이 내 곁을 떠나신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오. 장량 선생이 떠나셔서 가뜩이나 마음이 서글픈데 선생들조차 왜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하시오?
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선생들은 하산하신 김에 끝까지 태자를 지도하며 보살펴 주소서.”
그러나 ‘상산사호’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지금 조정에는 현신들이 가득 차 있어서 이미 늙어버린 저희들로서는 이 이상 할 일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수많은 현명한 대부들로 하여금 태자를 교육케 하시오면, 태자께서는 다양한 여러 방면의 지식을 얻으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소생들이 비록 산으로 들어가더라도 그동안 베풀어 주신 성은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상산사호’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음을 알게 되자, 많은 사례를 내려주며 그들을 산으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장량을 비롯하여 ‘상산사호’까지 떠나보내고 나니 유방의 심정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태자 영을 불러서 말한다.

“나는 혈혈단신으로 군사를 일으켜 강대국인 진나라와 초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간에 나를 배반하고 돌아선 자들도 많았지만, 기모 묘산(奇謨妙算)으로 나를 도와준 공신들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천하를 통일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고 나니 지난날의 공신들 생각이 새삼스러이 간절하구나.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마음에서 이미 작고한 공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공신들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모셔 놓고,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 내려가도록 해야 하겠다.”
유방은 그날로 화공(畵工)들을 불러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목수들을 불러 공신각을 대규모로 짓게 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에 공신들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모시게 되었다.
유방은 태자에게 공신들의 초상화를 일일이 돌아보며, 그들의 내력과 공적을 태자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태자는 기신(紀信)의 초상화 앞에 이르자,



“형양성 싸움 때 만약 기신 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저를 구출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했고, 또 하후영의 초상화 앞에서도 발을 멈추고,

“만약 하후영 장군께서 초나라 팽성에 잡혀있던 저를 구출해 오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저는 태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자, 유방은 매우 기뻐하며 이렇게 칭찬하였다.

“네가 근본을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에 이렇게도 기쁜 일이 없구나.”
그러나 공신각에는 초나라 대사마(大司馬)였던 항백(項伯)의 초상화는 걸려 있지 않아 항백의 아들 항동(項東)이 그 사실을 알고,

“홍문연 연회 때에 폐하를 구출해드린 사람은 저의 아버지셨는데, 제 아버님의 초상화는 어찌하여 걸려 있지 아니하옵니까?”
하고 항의하니 유방은 즉석에서

“그것은 나의 실수였노라. 너의 아버지의 초상화를 새로 그려 걸게 하고, 너는 내 사위로 삼으리로다.”
하고 말하며, 소화공주(小華公主)를 항동에게 주기로 하였다.

- 제 18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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