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81화
2021. 9. 2. 07:28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1화
☞ 상산사호(商山四皓)
“황제가 척비 년에게 미쳐 태자를 폐위시키고, 그년의 몸에서 태어난 여의를 태자로 책립하려고 한다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제가 워낙 지혜가 부족하여 이런 중대한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자신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장량 선생은 지혜가 많으신 어른이시니 비밀리에 그 어른을 찾아뵙고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어른이시라면 우리에게 좋은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옵니다.”
여 황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장량 선생이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그러나 그 어른은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파묻혀서 수도(修道)나 하고 계시니 이런 일에 관여하려고 하시겠소?”
“장량 선생은 세상을 등진 어른이니까, 좀처럼 관여하지 않으시려고 할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장량 선생에게는 ‘벽강’이라는 아들이 있사온데, 벽강과 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하니 제가 벽강이를 내세워서 장량 선생에게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여황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장벽강을 데리고 가서 장량 선생을 꼭 만나보도록 하오.”
여택은 장벽강을 앞장세워 가지고 장량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장량은 태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도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고작 한다는 소리는
“나는 이미 세상을 버린 지 오래 된 사람이어서 세상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여택은 등이 후끈 달았다.
그리하여 떼를 쓰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 황후의 특명을 받고 선생을 찾아온 몸이옵니다.
만약 선생께서 아무 계책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죽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장량은 그래도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혼잣말 비슷하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황제께서는 평소에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무척 흠모하셨으니까, 그분들을 찾아가 보면 해결할 길이 있기는 있을 것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택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다급하게 물었다.
“선생님! ‘상산사호’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여기서 북서쪽으로 3백 리쯤 들어가면 ‘상산(商山)’이라는 산이 있소. 그 산속에는 네 분의 현인(賢人)이 계시는데, 그들은 영지(靈芝)라는 버섯만 따먹고 살아가는 신선(神仙)들이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상산사호’라고 부르오.
한제께서는 일찍부터 그들을 흠모하신 나머지 예우(禮遇)를 다해 모셔오려고 하셨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소.
만약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태자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보시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움직여 줄지는 그들을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오.”
“선생님! 좋은 길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상산사호’로 불리는 그분들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옵니까?”
장량은 입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네 명의 이름을 붓으로 종이에 쓰기 시작하였다.
동원공(東園公) : 성은 중(重), 명은 선명(宣明), 한단 태생.
서원공(西園公) : 성은 기(綺), 명은 리계(里季), 제국(齊國) 태생.
하황공(夏黃公) : 성은 최(崔), 명은 소통(少通), 제국 태생.
각리공(角里公) : 성은 주(周), 명은 술(術), 하내(河內) 태생.
장량은 이처럼 쓴 종이를 여택에게 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귀공은 이 종이를 가지고 여 황후께 돌아가 이분들에게 정중한 사신을 보내도록 하시오.
이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태자께서는 오랫동안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오.”
여택이 대궐로 급히 돌아와 그 사실을 알리니 여 황후는 크게 기뻐하며, 이공(李恭)에게 비단 4천 필과 황금 4천 냥, 명마(名馬) 4필을 선물로 내주면서 상산으로 곧 떠나게 하였다.
상산은 험난하기 짝이 없는 산이었다.
이공은 험악한 산을 아무리 헤매어도 ‘상산사호’를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10여 일을 두고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영지를 따고 있는 네 명의 백발노인들을 어느 숲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옷이 남루하고, 머리는 봉두난발(蓬頭亂髮)인 것으로 보아 물어보나마나 그들이야말로 ‘상산사호’임이 분명해 보여 이공은 그들에게 덮어놓고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 분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소생은 유영 황태자(劉盈皇太子)의 분부를 받들고 네 분 선생님을 찾아뵈러 온 몸이옵니다.”
‘상산사호’들은 일순간 어리둥절해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
“황태자의 사신되시는 분이 우리 같은 기세인(棄世人, 세상을 버린 사람)을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다는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황태자께서는 진작부터 네 분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시와, 장차 보위에 오르시면 네 분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태평 성세를 기필코 이루고자, 네 분 선생님을 꼭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소생이 선생님들을 모시러 왔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선생님들께서는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무사태평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부디 하산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상산사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황태자의 뜻은 매우 갸륵하시오. 그러나 우리 네 사람은 세상을 등진 지 이미 오래된 사람들이오.
황태자께서 장차 황위에 오르신다 하기로서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가 무슨 보필을 할 수 있겠소?
황태자께서 우리를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오. 귀공은 섭섭한 대로 그냥 돌아가서 황태자께 우리의 말을 전하도록 하시오.”
이공은 그들을 설득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 같아 너무 기가 막혔다.
그러나 중대한 사명을 띠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이공으로서는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이공은 생각다 못해 ‘상산사호’들에게 새삼스럽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애원하였다.
“실상인즉, 소생은 황태자께서 네 분 어르신께 드리는 예물로 비단과 황금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리고 네 분께서 장안에 오실 때에 타고 오시라고 말도 네 필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런데 네 분께서 황태자의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소생은 무슨 면목으로 혼자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옵니까?”
‘상산사호’는 황태자가 예물을 보내왔다는 소리를 듣고 적이 놀란다.
“허어... 황태자가 우리한테 예물을 보내 왔다고요? 예물까지 보내온 것을 보면, 황태자가 사람을 제대로 대접할 줄을 아시는구먼.
그러나 산속에 살고 있는 우리한테는 비단과 황금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이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재물에 매수될 속물은 아니란 말이오.”
이공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지자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공박하였다.
“네 어르신께서는 황태자가 보내드린 예물을 어찌하여 ‘뇌물’로 말씀하시옵니까?
존경하는 어른을 찾아뵈러 올 때는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당연한 예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황태자가 네 어르신네를 모셔가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일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이런 기회를 네 분 어르신께서 거절하신다면, 네 분 어르신께서는 억조창생이 잘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저로서는 황태자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시는 여러 선생님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처럼 이공이 조목조목 공박하고 나오자, ‘성산사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연 태도를 바꾼다.
“귀공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우리가 너무도 고집을 부린 것 같구려.
황태자가 우리를 그처럼 만나고 싶어 하신다면, 우리가 함께 황태자를 만나러 하산하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상산사호’들은 이공과 함께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여 황후는 그 소식을 듣고, 황태자와 함께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상산사호’들을 극진히 맞아들이며 간곡히 부탁한다.
“황태자는 장차 이 나라를 통치하여 만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분이오니 네 어르신께서는 황태자가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도록 통치학(統治學)을 철저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에 ‘성산사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황태자에게 성학(聖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황제 유방은 여 황후가 비밀리에 그와 같은 공작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 날 숙손통과 주창 두 대부를 불러 이렇게 따져 물었다.
“나는 전일에 경들에게 ‘태자의 폐립(廢立)’ 문제로 특별 지시를 내린 바 있었소.
그런데 그 후에 중신회의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결의하였는지 아무 소식도 없으니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유방은 태자 유영을 기어코 폐위시키고, 척비 태생인 여의를 태자로 책봉할 결심이었는데, 이에 숙손통과 주창은 머리를 조아리며 유방에게 간한다.
“폐하! 유영 태자는 매우 영명하신 분이므로 그를 폐위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 옛날 진(晉)나라의 헌왕(獻王)은 여희(驪姬)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태자로 바꾸었다가 40년간이나 나라를 어지럽힌 일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도 간신 조고의 말을 듣고, 태자를 부소(扶蘇)에서 호해(胡亥)로 바꾸었다가 나라가 망해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금의 황태자는 누구보다도 영명하신 분이옵니다.
폐하께서 만약 적자(嫡子)를 폐위하시고, 서자(庶子)인 여의 공자를 태자로 바꾸신다면, 저희들은 태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겠사옵니다.”
중신들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니 유방은 불쾌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나 중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태자를 억지로 바꿔 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유방은 이렇게 되어 불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신궁(長信宮)에 가려는데, 태자 유영이 문덕전(文德殿)에서 나왔다.
그런 태자의 뒤에 네 명의 노인들이 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웬 늙은이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네 명의 노인들은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저희들은 상산에서 내려온 ‘사호(四皓)’라는 늙은이들이옵니다.”
하고 아뢰자, 유방은 ‘상산사호’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반문한다.
“아니, 당신들이 ‘상산사호’라면, 내가 불렀을 때는 그토록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연유로 태자를 모시고 다니시오?”
‘상산사호’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폐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어 현사들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러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인효공경(仁孝恭敬)한데다 현사를 소중히 여길 줄 아시고, 장차 대위(代位)를 이어받으시게 되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힘쓰셔야 하겠기에 우리들은 태자를 도와 통치학(統治學)과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고자 모두들 산에서 내려온 것이옵니다.
장차 태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그때야말로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태평성대가 도래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나자, 태자를 바꿀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산사호’들이 유영을 성군(聖君)으로 인정해 준다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이처럼 다행한 일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장신궁으로 찾아가 척씨 부인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알려주니 척비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자는 언젠가 황후의 손에 죽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유방은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한다.
“여의가 비록 태자는 못 되더라도 어느 큼직한 나라의 왕으로 보내주도록 할 테니 조금도 염려 마라.”
“저희들 모자는 오직 폐하의 은총만을 믿겠사옵니다.”
척씨 부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장차 그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운명을 예감했는지 공포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제 18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