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84화
2021. 9. 4. 06:3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 (楚漢誌) - 184화
☞ 척비((戚妃)와의 마지막 밤
유방은 장량이 종남산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부터는 마음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마음의 지주(支柱)를 잃어버린 것 같아 매사가 공허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하다 보니 건강조차 제대로 유지될 턱이 없었다.
유방은 지난 해 가을 영포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적장 ‘난포’에게 화살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치료를 잘한 덕택에 완전히 치유(治癒)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그때의 상처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공허한 마음조차 한 몫 하여 몸이 날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몸이 불편할 때면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유방은 이렇듯 몸이 괴로워지자 여 황후가 있는 장락궁(長樂宮)보다 척비가 거처하는 서궁(西宮)에만 머물렀다.
여 황후보다 척비가 자신에게 더욱 정성을 다하여 살뜰하게 대해 주니 자연히 그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 황후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여 황후는 궁녀(宮女)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불편하시다고 하는데, 서궁에만 머물러 계시니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구나.”
말은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사실 여 황후로서는 남편 유방이 척비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는 것만 같아 괘씸하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녀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병중에 계신 폐하께서 본궁을 버리시고 서궁에만 머물러 계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마마께서는 특별 분부를 내리시와 태자마마로 하여금 관영, 주발 등 원로 대부를 대동하고 서궁을 방문케 하여 황제 폐하를 장락궁으로 모셔오도록 하시옵소서.
법도 상으로 보아도 황제께서 장락궁을 놔두고, 서궁에서 치료하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옵니다.”
여 황후는 궁녀들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태자로 하여금 관영과 주발을 거느리고 서궁으로 가서 황제를 장락궁으로 모셔오게 명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태자와 원로 대부들의 말을 좀처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짐은 장락궁보다는 여기에 있는 편이 마음이 훨씬 편하다. 당분간은 여기서 병을 치료하기로 하겠다.
병이란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해야 속히 나을 것이 아니냐?”
하며 태자와 동행한 원로 대부들의 제의를 단박에 거절하였다.
이렇게 태자가 황제를 모셔오는데 실패하고 돌아와 여 황후에게 사실대로 고하니 성미가 사나운 여 황후는 길길이 날뛰며 큰소리로 외쳐댔다.
“황제가 계집년에게 정신이 빠져도 분수가 있지, 그년의 치마폭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떤 일이 있어도 황제를 기어이 장락궁으로 모셔와야만 한다.”
여 황후는 입술을 깨물며 어떤 결심을 굳혔는지 태자와 여택, 심이기, 번쾌 등 측근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서궁으로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장락궁으로 모셔오도록 하오.
만약 황제가 환궁을 거절하시거든 당신들은 황제를 모셔올 때까지 서궁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오지 마시오.
나의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소.”
여 황후의 분노가 이처럼 극도에 달했던 것이었다.
네 사람은 서궁에 당도하자, 복순문(福順門) 밖에서 알현을 고하였다.
유방은 태자 일행이 또다시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를 장락궁으로 데려가려고 여후(呂后)가 뒤에서 이런 장난을 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척비가 울상이 되어 호소하듯 말한다.
“폐하께서 신첩을 버리고 장락궁으로 가시오면, 신첩은 여후의 손에 죽게 되어 용안(龍顔)을 다시는 뵈올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자, 유방은 척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은 내가 책임지고 지켜줄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마라.”
그리고 태자 일행을 병실로 불러들여 만났다.
이때 유방의 몸은 몹시 수척한 상태였다.
처남인 여택이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성상께서는 몸이 너무도 쇠약해지셨사옵니다.
젊은 부궁(副宮)과 오랫동안 같이 계셔서 건강이 악화된 것이 분명하오니 지금이라도 장락궁으로 환궁하시어 조용히 정양을 하도록 하시옵소서.”
하고 말하면서 병이 악화된 책임을 노골적으로 척비에게 뒤집어씌우는 말을 하였다.
이에 척씨 부인은 너무나 억울하여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실상인 즉, 유방이 병석에 누운 이후에는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일이 없었던 그녀였다.
유방은 워낙 색을 밝히는 편인지라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때때로 몸을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척비 자신은 남편의 건강을 생각해 그런 요구를 번번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자기 딴에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남모르게 정성을 다해 왔건만, 유방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만 돌려 말을 하니 척비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반박을 할 수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모사 심이기가 병석의 유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폐하! 효성이 지극하신 태자를 비롯하여 만조백관들이 한결같이 폐하의 환궁을 고대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속히 환궁하시어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시옵소서.”
심이기 역시 유방의 병이 악화된 책임을 은연중 척씨 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유방은 여택과 심이기의 충고 모두가 역겹게 들리기만 하였다.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 척씨 부인 때문이란 말인가?
건강악화의 원인이 척씨 부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당사자인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몸이 이렇게 약해진 것은 과색을 했기 때문은 아니라 여러 해 전쟁을 계속해오다 보니 피로가 쌓이고 쌓였다가 뒤늦게 몰려 왔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동안 척비의 따뜻한 간호를 받아 오면서 섭생을 잘한 덕택에 이만큼이나 유지되고 있는 중이라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병이 더욱 악화될 우려가 있으니 당분간은 이대로 편히 있게 해 주시오.”
유방은 장락궁으로 가서 보기 싫은 여 황후에게 들볶이기보다는 서궁에서 척씨 부인의 따뜻한 간호를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번쾌가 별안간 얼굴을 실룩거리더니 문득 담판이라도 하듯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닌가?
“폐하! 신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필부로 몸을 일으켜 진과 초를 모두 정벌하시고, 이제는 천하를 통일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대업을 완수하시는 동안에 여 황후는 폐하와 생사고락을 같이해 오신 정실부인이시옵니다.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라는 말이 옛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옛글에서조차 조강지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여 황후와의 의리를 저버리시고, 척씨 부인과의 애정에만 연연해하시옵니까?
만약 폐하께서 그런 근본을 외면하시고 환궁하지 않으신다면, 그로 인해 부부간(夫婦間)의 정리는 상하게 될 것이 분명한 일이고, 군신간(君臣間)의 의리도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니옵니까?
사태가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법도는 무엇으로 지탱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저희들의 간언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폐하께서 환궁하실 때까지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번쾌도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니 유방도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고, 더구나 번쾌는 유방과 동서지간이 아닌가!
“음... 경들이 그토록 나의 환궁을 갈망한다니 내 어찌 끝까지 고집을 부리리오.
그러면 여기서 하룻밤만 더 자고 내일 환궁하기로 할 테니 오늘은 일단 물러들 가오.”
유방은 어쩔 수 없어 환궁을 승낙을 했다.
하지만 여후의 곁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태자 일행이 돌아가고 나자, 유방은 척비를 가까이 불러 얼굴을 쓰다듬어 주면서 고백하듯 말한다.
“내 일찍부터 색을 좋아하여 그동안 수많은 계집들과 살을 섞어 왔건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온 여인은 오직 너 한 사람뿐이었다.
여후(呂后)는 조강지처로 정궁(正宮)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녀의 성품이 워낙 강맹(强猛)하여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가 전혀 없었느니라.
그러다가 양같이 온순하고 진실한 너를 만났으니 내 어찌 너를 진심으로 아끼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유방의 고백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백 명의 계집들과 살을 섞어 왔으나 정작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은 오직 척씨 부인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척비를 그렇게나 사랑해 왔었고, 척비 또한 유방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 왔었다.
그러면서도 유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겨 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와서 유방이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해 오므로 척비는
‘이 어른이 혹시 돌아가시려고 유언(遺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폐하! 신첩이 어찌 폐하의 각별하신 은총을 모르오리까? 내일은 장락궁으로 환궁하시는 날이오니 오늘 밤은 아무 생각도 마시고 편히 주무시도록 하시옵소서.
신첩은 오직 폐하께옵서 편히 주무시는 것만이 소망이옵나이다.”
척비은 이렇게 말하면서 유방의 이마를 짚어 보기도 하고, 이불을 감싸 주기도 하였다.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애써 감추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방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말한다.
“오오, 고마운 말이로다. 네가 아니면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위로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느냐?
내 비록 천하를 얻었다고는 하되, 죽고 나면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네 곁에만 있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하도 분분하여 내일은 어쩔 수 없이 환궁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척씨 부인은 이를 악물어 슬픔을 씹어 삼키며 대답한다.
“폐하! 신첩은 폐하의 신금(宸襟)을 모두 다 알고 있사오니 아무 말씀도 마시고, 오늘밤은 편히 주무시도록 하시옵소서.”
“고마운 말이로다. 그러나 내가 네 곁을 떠나기 전에 꼭 한 가지 당부를 해둬야 할 말이 있다.”
‘당부’라는 소리에 척씨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했다.
- 제 18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