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85화

2021. 9. 5. 07:45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5화

☞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사망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들려주시옵소서.”
유방은 한동안 숨을 가다듬다가 속삭이듯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죽고 나면 황후가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여기를 떠나는 길로 아무도 모르게 여의(如意)가 있는 ‘한단’으로 피신을 하도록 하여라.
그렇잖으면 네 신변에 어떤 참변(慘變)이 일어날지 모른다. 허니, 너는 내 말을 명심하여 반드시 민첩하게 행동하도록 하여라.”
유방으로서는 척비를 위한 최후의 애정 어린 배려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척씨 부인은 사무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어 유방의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폐하께서 생존해 계시는 한 신첩은 장안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을 생각이옵니다.”
사실 척씨 부인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살아 있는 남편을 내버려두고 피신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유방은 척씨 부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 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네 심정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로다. 그러나 내가 장락궁으로 돌아가면 너를 다시 만나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서로 만나 보지도 못하면서 장안에 남아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허니 너는 내가 죽기 전에 속히 여의한테로 피신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척씨 부인은 울면서 도리질을 하였다.

“설사 폐하를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해도 신첩은 폐하와 같은 궁(宮)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스럽사오니 피신하란 말씀만은 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척비의 운명이 점점 걱정스러웠기에 나중에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너는 피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너는 피신조차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후가 무서운 계집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가슴이 메어 오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이 몸이 황후의 손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께서 생존해 계시는 동안만은 장안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겠사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지 땅이 꺼질 듯 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 결심이 이처럼 확고부동하니 이것도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운인가 보구나.
그러면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 내가 숨이 답답하구나! 네 손으로 내 가슴을 좀 쓸어다오.”
척씨 부인이 가슴을 쓸어주자, 유방은 몹시 지쳐 있는 듯 이내 잠이 들었다.

‘이것이 남편에 대한 나의 마지막 봉사가 될지 모르겠구나...’
척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설움과 슬픔이 밀려들어 뜬눈으로 밤을 새워 가며 남편의 가슴을 마냥 쓸어주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유방은 만조백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봉련(鳳輦) 위에 누워 장락궁으로 향하였다,
많은 시의(侍醫)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척씨 부인만은 따라갈 수가 없어서 서궁 담장 밖에 몸을 기대고 서서 멀어져 가는 봉련을 눈물로 전송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유방이 장락궁 내전에 자리를 보존하고 눕자, 여 황후는 신바람이 나는 듯 시종들을 별실로 불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황제께서 환궁하셨으므로 척녀(戚女)가 도망을 갈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년이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하라.
그리고 서궁에서 많은 의원들이 황제를 따라온 모양인데, 그 엉터리 의원들을 모조리 쫓아내거라. 내가 명의를 따로 불러와야 하겠다.”
유방이 중태에 빠진 원인을 척씨 부인에게 있는 듯 한 말투였다.
다시 여 황후가 진평에게 묻는다.

“명의가 어디 있는지 진평 대부는 명의를 빨리 불러오시오.”
“여기서 산속으로 2백 리쯤 들어가면, ‘역양’이라는 명의가 있사옵니다. 이미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을 불러올리고 있사오니 그 사람이 치료하게 하시면 반드시 신효가 있을 줄로 아뢰옵니다.”
얼마 후 불려온 역양은 유방을 신중히 진찰을 해보고 유방에게 품한다.

“폐하의 병은 결코 못 고칠 병이 아니옵니다. 소생의 약을 한 달만 잡수시면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사옵니다.”
유방은 그러잖아도 자기가 데리고 온 의원들을 모조리 쫓아 보낸 여 황후의 처사가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 판인지라 역양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어느 산골에서 굴러먹던 돌팔이 놈이냐? 나는 한 자루의 검(劒)으로 천하를 얻을 만큼 천명(天命)을 타고난 사람이다.
따라서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너 같은 돌팔이가 감히 어느 앞이라고 병을 고치느니 어쩌니 하고 돼먹지 않은 수작을 하고 있느냐?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
역양은 혼비백산하여 어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유방은 이미 각오한 바가 있는지 그날부터는 약도 먹지 않았다.
그는 서궁에서 억지로 끌려온 것이 그렇게도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유방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이자, 여 황후는 만일의 경우에는 대권(大權)을 자기가 장악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슬쩍 이렇게 물어보았다.

“소하 승상이 건강이 좋지 않아 하야(下野)하겠다는 말이 있사온데, 만약 소하가 사임을 하겠다고 하면 승상의 자리를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까?”
유방은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소하가 기어코 승상의 자리를 내놓겠다면, 조참(曹參)을 승상에 임명하도록 하오.”
하고 대답하니 여 황후가 다시 묻는다.

“조참 이외에 승상이 될 만한 인물로 누가 또 있사옵니까?”
“그다음 적임자는 왕릉(王陵)이오. 그러나 왕릉은 지혜가 다소 부족한 편이므로 왕릉을 승상으로 등용하려면 진평을 보필자(輔弼者)로 곁들여 줘야 하오.”
“그러면 진평을 직접 승상으로 등용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진평은 지혜롭기는 하나 나라를 혼자서 다스려 나갈 만한 도량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유방은 수많은 인물들을 수족처럼 써 오며 천하를 통일하는데 성공한 위인인지라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여 황후는 남편이 죽고 난 뒤 대권을 장악하게 되면 유방의 의견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크게 기뻤다.
이왕이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여 황후는 다시 물었다.

“주발(周勃)은 어느 정도의 사람이옵니까?”
“주발은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학식이 없는 사람이오. 그러나 우리 유씨 일가(劉氏一家)를 위해서는 주발처럼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다음에 믿을 만한 사람은 또 누구누구가 있사옵니까?”
여 황후가 끈질기게 물어보니 유방은 그제야 무슨 눈치를 챘는지 별안간 짜증스럽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내가 죽으면 태자가 내 뒤를 이어 나갈 것인데,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오?”
여 황후는 그제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황태자 영(盈)이 병문안을 오자, 유방은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유언하듯 말했다.

“나는 암만해도 이번에는 살아날 것 같지 않구나. 그러나 태자인 네가 워낙 인후(仁厚)하여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것이니 그 점은 마음이 든든하구나.
마지막으로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태자는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눈물을 씹어 삼키며 아뢴다.

“아바마마의 말씀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어서 분부를 내려 주시옵소서.”
“음... 고마운 말이로다.”
유방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아들의 손을 새삼스럽게 잡아 흔들며 조용히 말한다.

“네게 여의(如意)라는 이복동생(異腹同生)이 있지 않으냐? 내가 죽고 나면 그들 모자의 운명은 순전히 네 손에 달려 있게 된다.
너의 어머니는 그들 모자를 몹시 미워하지만 나로서는 그들 역시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마누라로다.
애비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들이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너는 그 점에 각별히 유념하여 조왕 모자(趙王母子)를 끝까지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임종이 눈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유방은 여의와 척씨 부인의 운명이 그렇게도 걱정스러워 말하자, 태자는 유방의 손을 움켜잡고 맹세하듯 말한다.

“아바마마! 소자가 아바마마의 은혜와 동기간의 관계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오리까? 그 점은 아무 걱정 마시고, 속히 병이나 치료하도록 하시옵소서.”
“아니로다. 나는 이미 천명이 다 된 사람이다. 허니 너는 나의 유언을 꼭 지켜 주기 바란다.”
유방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어 버리니 때는 대한(大漢) 12년 4월 갑진일(甲辰日)이었고, 그의 보령(寶令)은 63세였다.

그리고 태자 유영이 새로 보위에 올라 혜제(惠帝)라 하였으며, 혜제는 유방을 한고조(漢高祖)라는 존호(尊號)로 부르게 하였다.

- 제 18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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