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80화
2021. 9. 2. 07:2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0화
☞ 여(呂)황후의 질투
유방은 영포의 반란 사건을 평정하고 나자, 안도의 숨을 쉬며 진평에게 말한다.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 줄 미처 몰랐소이다.
처음에는 육국(六國)만 평정하면 천하 통일이 절로 이루어질 줄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육국을 평정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내부(內部)에서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구려.”
“산모(産母)가 옥동자를 낳으려면 진통을 겪어야 하듯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그만한 고통이 어찌 없을 수 있으오리까?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고난이 다 지나갔고, 이제야말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폐하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언제 어디서 누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무엇을 믿고 안심하라는 말이오?”
“이제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사옵니다.
전횡(田橫)을 비롯하여 한신, 진희, 팽월, 영포 등등 당대의 영웅호걸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가 한결같이 실패하였는데, 이제 누가 무슨 용기를 가지고 폐하에게 반기를 들 수 있으오리까!
태평성대가 이제야말로 눈앞에 전개되었사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말로 명실상부한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방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진평에게 말한다.
“회군(回軍)할 때는 지방순찰(地方巡察)을 겸해 노(魯)나라에 들러 공자(孔子)의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내 고향인 풍패에도 잠깐 들러보기로 합시다.”
유방은 명실상부하게 천하통일을 달성하고 나니 이제는 백성들에 대한 교화(敎化)에도 힘을 기울이고 싶었고, 또 고향에 들러 금의환향(錦衣還鄕)의 기쁨도 마음껏 누려보고 싶었다.
이에 따라 유방은 노나라에 들러 공자의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주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골고루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그런 후 고향에 다다르니 풍패에서는 관민(官民)이 모두 몰려나와 삼현육각(三絃六角)에 맞춰 유방을 열렬하게 환영해 주었다.
유방은 환영연 석상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감격에 어린 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나의 고향인 관계로 여기에는 나의 죽마고우(竹馬故友)가 수없이 많다. 이 기쁜 자리에 그들을 모두 모셔오도록 하라!”
유방의 명령에 따라 어렸을 때 유방과 함께 뛰놀던 옛 친구들이 모두 연회장으로 몰려왔다.
어떤 친구는 백발이 성성한 파파할아버지가 되어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너무 늙어서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유방은 그들한테서 축하의 배례를 받을 때마다 손을 잡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군신지례(君臣之禮)가 아닌 다 같은 죽마고우로서 어렸을 때 마음껏 뛰놀던 이야기나 나누기로 하세. 나도 늙었지만 친구들도 모두 다 늙어 버렸구먼.”
유방이 이렇게 격식을 풀고 나오니 환영연 술자리에는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윽고 취흥이 도도해 왔다.
그러자 유방은 음률에 맞춰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大風起兮 雲飛揚(대풍기혜 운비양) : 바람이 크게 일어나 구름이 높이 솟았도다.
威加海內兮 歸故鄕(위가해내혜 귀고향) :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도다.
安得猛士兮 守四方(안득맹사혜 수사방) : 맹장을 어떻게 많이 얻어 사방을 튼튼히 지킬 것인가!
유방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자, 죽마고우들도 다 같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윽고 더 없이 흥겹고 즐겁던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유방은 좌중을 둘러보며 감격어린 어조로 말한다.
“내 비록 지금은 귀한 몸이 되었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와 그대들과 같이 고향 땅에 묻히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고향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기로 하겠소.”
이 바람에 좌중에는 환희의 박수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유방은 고향에서 즐거운 사흘을 보내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 황후를 비롯하여 태자와 척비, 여의 공자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모두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싸움이 없어지자 세상이 화평해짐 따라 유방이 늙은 마누라인 여 황후보다 젊고 아름다운 척비의 궁전으로 자주 찾아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 황후는 워낙 성품이 고집스럽고, 질투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이 척씨 부인을 찾아가는 밤이면 이를 갈며,
“내 어떡하든지 그년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하고 무서운 앙심을 품었다.
척씨 부인도 여 황후의 무서운 질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어느 날 밤 눈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호소하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이미 춘추도 높으신 데다 근자에는 건강도 무척 약해지셨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날이면 저희 두 모자(母子)는 그날로 여후의 손에 살해되고 말 것이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
사랑하는 여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어떤 남성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유방은 척씨 부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말한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
“폐하께서 저희 모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지금의 태자를 폐위(廢位)시키고, 여의를 태자로 책봉해 주면 될 게 아니냐?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이나 가져오너라.”
척씨 부인은 기뻐하며 술상을 올렸다.
주색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유방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여도 더해 가는 나이만은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유방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척씨 부인의 무릎을 베고 옆으로 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에 정신없이 코를 골았던 것이다.
척씨 부인은 유방이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본궁에 있는 여 황후는 ‘황제께서 오늘 밤도 서궁(西宮)으로 행차하셨다’는 말을 듣고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염탐해 보니,
“폐하께서는 지금 서궁에서 척씨 부인과 단둘이 정답게 술을 드시고 계시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여 황후는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심을 억제할 길이 없어 가마를 타고 서궁으로 직접 쳐들어갔다.
서궁 수문장은 크게 놀라며 안으로 달려 들어가 척씨 부인에게 알린다.
“지금 문밖에 황후마마께서 와 계시옵니다.”
척씨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후가 오셨다면 그녀로서는 응당 영접을 나가야 옳을 일이다.
그러나 황제가 지금 자신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 영접을 나가려고 황제의 잠을 깨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척씨 부인은 부득이 방안에 눌러앉은 채로
“황후께서 납셨거든 방안으로 들어오시게 하라.”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 황후는 황제가 척씨 부인의 무릎을 베고 행복스럽게 자고 있는 꼴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하여 척씨 부인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너는 내가 방안에 들어왔는데도 일어설 줄조차 모르니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실이 어디 있느냐?”
척씨 부인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황제가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황후께서 오신 줄은 알고 있었사오나 폐하께서 잠에서 깨어나실까 두려워서 몸소 영접을 나가지 못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 황후는 척씨 부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잠을 깨워 진노(震怒)를 사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두려워 여 황후는 이를 바드득 갈며,
“네년은 황제 폐하를 핑계로 사사건건 발뺌을 하고 있으니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는 네년의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 가루를 만들고야 말리라.”
하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척씨 부인은 너무도 무서운 악담에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어찌 잘못하여 용안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황제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척씨 부인이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는 부리나케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
“네가 울기는 왜 우느냐?”
척씨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알린 뒤에
“신첩의 실수로 용안에 눈물을 떨어뜨렸음을 용서하시옵소서.
폐하께서 안 계시는 날이면 신첩은 황후의 손에 가루가 되어 죽을 것이오니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
하고 다시금 울면서 호소하는데, 그 자태가 너무나 애잔해 보였다.
유방은 척씨 부인이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복사꽃처럼 아름답고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척씨 부인이 가련하기 짝이 없어 보여 유방은 등허리를 정답게 쓸어주며 위로한다.
“내일 아침 조회(朝會)에서 중신들과 상의하여 너를 황후로 바꾸고, 여의를 태자로 책봉할 테니 아무 걱정 말거라.네가 황후가 되면 누가 감히 너를 죽일 수 있겠느냐?”
다음날 유방은 조회 때에 군신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한 번 거론한 바가 있듯이 태자를 여의로 바꾸기로 마음먹었으니 경들은 오늘 이 일의 결말을 지어 주기 바라오.
나는 이미 결심을 굳게 하였으니 경들은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의결해주기 바라오.”
유방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숫제 조회에서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중신들 간에는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런 소식은 곧 여 황후에게도 알려지게 되어 황후는 크게 놀라며, 친정 오빠인 여택(呂澤)을 궁중으로 급히 불러들여 호소한다.
- 제 18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