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60화

2021. 8. 11. 07:17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60화

☞ 한왕(漢王) 유방의 황제 등극

해가 바뀌고 나니 대한(大漢) 6년 정월.
초왕 한신과 조왕(趙王) 장이를 비롯한 모든 왕후(王侯)들이 낙양으로 신년 하례를 와서 한왕에게 아뢴다.

“이제는 천하통일의 태평성대가 되었으니 대왕께서는 속히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하시옵소서.”
“내가 알기로는 현자(賢者)가 아닌 사람은 제위에 오를 수가 없다고 들었소. 나는 본시 미재 박덕(微才薄德)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제위에 오를 수 있으리오.”
유방은 겸허한 대답으로 제위에 오르기를 사양하였다.

속으로는 계속 ‘제위에 오르라고 품하거라. 이것들아~’ 하면서...
그러자 유방의 겸허한 대답을 들은 중신들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대왕께서는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시어 앞에서는 폭진(暴秦)을 멸망시켰고, 이번에는 초적(楚賊)까지 정벌하셨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통일하신 후 모든 공신들을 왕후로 봉해 주셨는데, 이제 대왕께서 제위에 오르지 않으시면, 누가 천하를 공평무사하게 다스려 나갈 것이옵니까?
천하의 질서와 규율을 위해서라도 대왕께서는 마땅히 제위에 오르셔야 하옵니다.”
그래도 유방은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이 국태민안(國太民安)을 위하여 이로운 일이라면, 경들의 말씀대로 제위에 오르기로 하겠소.”
하고 마침내 제위에 오를 것을 수락하였다.

그해 2월, 길일을 택하여 유방이 낙양성에서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즉위식(卽位式)이 거행되는 대례석상(大禮席上)에서 만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본시 패현(沛縣)의 일개 서민(庶民)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주왕(周王) 이래로 뚜렷한 대통(大統)을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황(秦皇)은 대통을 무시하고 육국을 병탄(倂呑)하여 세상을 몹시 어지럽게 하였다.
이에 짐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진을 멸하고 초를 정벌함으로써 천하를 새롭게 평정해 놓았다.
그리하여 군신들이 짐에게 제위에 오르기를 권하기에 짐은 만백성을 위해 황제가 되기를 수락함과 동시에 형처(荊妻) 여씨(呂氏)를 황후(皇后)라 칭하고, 장자(長子) 유영(劉盈)을 황태자(皇太子)로 봉하는 바이다.
이제부터는 진초 시대(秦楚時代)와 같은 학정은 일체 없을 것이니 만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해 주기를 바란다.“

※ 여황후의 등장, 파란만장한 여황후... 여치(呂雉)가 서서히 전면에 나선다.

즉위식이 끝난 후 남궁(南宮)에서 축하연을 성대하게 벌였는데, 황제 유방은 그 자리에서 만조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짐은 만좌의 백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소. 경들은 무슨 일이나 불평이 있거든 마음속에 숨겨 두지 말고 언제든지 짐에게 말해 주시오.
짐은 본시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제 천하를 얻게 된 것은 오로지 경들의 덕택이었소.
초패왕 항우는 역발산 기개세의 만고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천하를 잃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경들의 솔직한 의견을 들어보고 싶소이다.”
대장 고기와 왕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폐하께서 기탄없는 평을 듣고자 하오시면, 저희들이 한 말씀 여쭙고 싶사옵니다.”
“오오, 어서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경들의 솔직한 평을 듣는 것은 후일 짐을 위해서는 유익한 말씀이 될 것이오.”
고기와 왕릉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매우 황공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성품이 항우보다 도도하셔서 사람을 깔보는 경향이 농후하시옵니다.
그러심에도 불구하고 싸움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는 그때그때 중상(重賞)을 내려주심으로써 공을 더욱 빛나게 하여 주셨으므로 그 점이 바로 폐하께서 천하를 얻게 되신 원인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한편, 항우는 인심(人心)이 좋아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옷을 벗어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밥을 주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논공행상을 베풀어 줄 줄을 몰랐으니 항우의 인(仁)이란 것은 결국 아녀자의 인(婦女子之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았는가 싶사옵니다.”
유방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한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그려.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세 분의 덕택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장중에 앉아서 천 리 밖의 승리를 내다볼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장량 선생을 따를 수가 없고,
백성을 잘 다스리고 군량을 풍족하게 공급해 준 점에서는 소하 승상을 능가할 수가 없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승리를 쟁취함에 있어서는 한신 장군을 따를 수가 없으니 이상과 같은 세 인걸(人傑)께서 나를 도와주셨으므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일세.
항우에게도 범증이라는 뛰어난 모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항우는 그 사람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으니 그러고서야 어찌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註) 유방이 말한 장량, 소하, 한신을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고 함.

한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탄복하였다.

“과연 폐하의 말씀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항우처럼 사람을 믿지 못해서야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유방은 웃으면서 한신에게 묻는다.

“짐이 생각하기로 한신 장군은 백만 대군을 능히 거느릴 수가 있다고 보는데, 장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의 경우는 백만 대군 뿐이 아니옵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이런... 다다익선이라니? 한제(漢帝, 이제 황제로 등극했으니, 한왕이 아니라 한제로 호칭함)의 책략에 서서히 걸려드는 느낌이네.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특히 술 한 잔하고 취중에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는 의심 많고 속이 좁은 유방에게랴! 오호통재라, 한신이여! 어쨌든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옴.‘

“음! 다다익선이라? 그러면 나의 경우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매우 죄송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 능히 거느리실 수 있는 군사의 한도는 10만인 줄로 아뢰옵니다.”
너무도 무엄한 한신의 대답에 좌중은 아연 긴장하였다.

한신 자신이 능히 거느릴 수 있는 군사는 백만도 모자란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 제왕인 유방은 10만 군사밖에 거느릴 능력이 없다고 공언했으니 그야말로 제왕을 모독한 언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제왕에 대한 불경(不敬)은 참형에 해당하는 죄악임을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방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솟구쳐 올랐고, 좌중은 아연 긴장하여 모두가 유방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신 장군이 별안간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이 기쁜 날에 왜 이런 실언을 했을까?’
유방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일순간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얼굴에 가벼운 미소까지 띠면서 한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한신 장군은 군사를 얼마든지 거느릴 수가 있어도 나는 겨우 10만밖에 거느릴 능력이 없다면, 어찌하여 장군은 나의 신하가 되었소?”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은 ‘병사들의 장수(兵之將)’가 될 소질은 충분하오나 ‘장수들의 장수(將之將)’의 재목은 되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옵서는 ‘병지장’은 못 되셔도 ‘장지장’이 되실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하오시니 신이 어찌 폐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한제(漢帝)는 그 대답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하하하, 장군은 싸움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구변(口辯)도 대단하시구려. 자신은 ‘병지장’으로 자처하면서 나를 ‘장지장’으로 치켜 올린 것은 명담 중의 명담이시오.”
이 바람에 극도의 긴장으로 치닫던 분위기가 별안간 화기애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방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한신에 대한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한신이야말로 언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무서운 존재로구나. 앞으로는 한신에 대해서만은 배반을 못하도록 각별히 견제해 나가야 하겠다.’
그때부터 유방은 한신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누구나 최고 권력자가 되면 자신보다 똑똑하거나 힘 있는 참모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날 논공행상이 있게 되자, 한신이 유방에게 아뢴다.

“일찍이 광무 대전에서 전사한 신기(辛奇) 장군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공로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도 논공행상을 내리심이 좋겠습니다.”
유방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물론 그래야 할 것이오. 그러면 신기 장군의 경우는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지내게 함과 동시에 ‘건충후(建忠侯)’의 칭호를 추증(追贈)하고 자손들에게도 관록을 내리도록 하겠소.”
그 밖에도 유방은 장량의 의견을 들어 모든 장수에게 골고루 논공행상을 베푸니 천하통일에 힘쓴 장수들은 물론이려니와 백성들조차 유방을 성제(聖帝)로 우러러 받들게 되었다.

※ 초패왕 항우의 죽음과 한제 유방의 승리로 초한대전(楚漢大戰)은 끝이 났지만, 한제국(漢帝國) 초기 정세와 고제(高帝) 유방이 죽은 이후 등장하는 여태후의 섭정(攝政)과 실권을 잡은 김에 여씨 천하(呂氏天下)를 만들고자 했던 실정(失政)이 이어진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은 후 여씨 일족을 몰아내고, 한나라의 기반이 서서히 정착되어 가는 시기까지 당분간 소설은 이어집니다.

※ 註) 呂太后(여태후) : 황제가 살아있을 때 그 정실부인은 황후라 부르고, 황제가 죽은 이후에는 태후로 승차하게 된다.
새로 황제의 위를 이어 받는 황제에게도 황후가 있을 것이니 두고 볼 일이다.

- 제 16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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