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57화

2021. 8. 8. 08:0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57화

☞ 궤멸(潰滅)되는 초군(楚軍)

우미인이 항우에게 이별의 보검을 달라고 한 것은 스스로 자결을 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벌어진 참극을 눈앞에서 당한 것이다.

항우는 말에서 뛰어내려 우미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한참을 지켜보던 주란이 다가와 항우를 붙잡아 흔들며 간한다.

“폐하께서는 이 판국에 천하 대사를 잊고 슬픔에 잠기실 때가 아니옵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속히 이 자리를 떠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눈물로 우미인의 시체와 작별하고, 8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울면서 도망 길에 올랐다.

얼마를 앞으로 가니 한군의 포위망이 보이는 것이다.
항우는 일행을 두 패로 나눠 항우가 먼저 포위망을 뚫고 나가자, 한나라 대장 관영이 많은 군사들로 앞길을 막아선다.

항우가 폭풍처럼 달려 나가 관영과 싸우기를 10여 합, 관영이 힘에 부쳐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길만 달려 나갔다.

이때 번쾌가 산상에서 이 광경을 보고 붉은 깃발을 사방으로 휘두르니 이번에는 한나라 군사들이 사면팔방에서 일시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주란과 환초도 항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장(漢將) 조참이 유가, 왕수, 주종, 이봉 등의 네 부장들과 함께 총공격을 퍼부어 오는 것이다.

주란과 환초는 결사적으로 싸워 적들을 가까스로 물러가게 하고,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병사라고 해보아야 고작해서 20여 기만 남았을 뿐이 아닌가?

“이제 앞으로도 적군을 수없이 만나게 될 터인데, 20여 기로서 어찌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적의 손에 처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어 버리자!”
주란과 환초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마지않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나머지 20여 명의 친위대 군사들도 두 사람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항우는 주란과 환초가 자결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항우는 1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회하(淮河)에 당도하니 마침 물가에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

“모두들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몇 번의 나룻배 행보로 항우를 비롯한 남은 백여 명의 친위대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10여 리를 더 달려 음릉(陰陵)이라는 곳에 당도하니 산길은 두 갈래로 갈려져 있어서 어느 길이 강동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늙은 농부 하나가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항우는 농부 곁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게! 강동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항우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비단 전포(戰袍)에 황금 투구를 쓴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닌 게로다! 그렇다면 초패왕이 아니런가?
초패왕이라면 우리네 백성들을 무던히도 괴롭혀 온 인물이니 이런 자를 구해주었다가는 천벌을 받게 되리라.‘
늙은 농부는 이런 생각이 들어 대답을 아니 하고 있자, 항우는 다급한 어조로 다시 묻는다.

“이 사람아! 나는 초패왕일세, 한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강동으로 피신하는 길이니 길을 빨리 알려 주게!”
농부는 상대방이 항우라는 것을 확신하자,

“강동으로 가는 길은 왼쪽 길이옵니다.”
하고 일부러 엉뚱한 길을 가리켜 보였다.

항우는 농부의 말을 믿고 그 길로 달려가다가 깊은 수렁에 빠져 무진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수렁에서 빠져나와 얼마를 더 달려가다 우연히 그 지방 태수(太守)인 양희(楊喜)를 만나게 되었다.

양희는 한 무리의 군사를 몰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크게 기뻐하며 양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여보게 양희 장군! 그대는 과거에 나의 부하가 아니었던가? 나는 지금 강동으로 가는 길이니 그대도 나와 함께 강동으로 가기로 하세.
내가 강동에서 재기(再起)하는 날에는 자네를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주기로 하겠네.”
양희가 냉소를 하면서 대답한다.

“당신은 현사(賢士)들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이 꼴이 된 게 아니오? 당신이 강동으로 도망간다 한들 어떻게 재기를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이미 한왕에게 귀순하여 당신을 잡으러 나온 길이오. 그러나 옛날의 의리를 생각해 당신을 차마 내 손으로 잡아갈 수는 없구려. 당신도 나처럼 한왕에게 귀순하여 오래도록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합시다.”
항우는 양희에게 ‘항복 권고’를 듣는 순간 모욕감이 열화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장창을 번개같이 휘둘러 양희를 찔러 죽이려고 하니 양희가 몸을 번개같이 피하며 정면으로 대들었다.
두 장수가 무섭게 싸우기를 20여 합, 항우가 양희의 머리 위로 최후의 철퇴를 내려 갈기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벼락같이 양무, 왕익, 여승, 여마통 등의 맹장들이 일시에 함성을 울리며 항우에게 덤벼들었다.
항우는 그 많은 한군 대장들과 단독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무서운 싸움이었다.
항우의 용맹이 어떻게나 뛰어났던지 7, 8명의 맹장들과 싸워도 오히려 항우가 유리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포, 팽월, 왕릉, 주발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항우에게 덤벼들었다.
항우는 그들을 상대로 10여 합을 더 싸우다가 승리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비호같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항우가 타고 있는 ‘오추〉는 천하의 명마인지라 그를 따라잡을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항우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깊은 산길을 한없이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5, 60리쯤 쫓겨 가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를 따라오는 부하는 불과 5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해는 서산 너머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때 항우 일행이 문득 깨닫고 보니 모두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부하들이 항우에게 아뢴다.

“말도 말이지만, 우선 저희들이 배가 고파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사옵니다.
적들이 여기까지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밤은 가까운 민가(民家)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야간 행군을 무리하게 계속하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있을지 염려 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방을 둘러보니 저 멀리 아득한 숲속에 가냘픈 불빛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인가가 있는 모양이니 저기로 가보자.”
일행이 말을 끌고 불빛을 찾아가 보니 그 집은 여염집이 아니라 흥교원(興敎院)이라는 고원(古院)이었다.

그곳은 뜰 앞에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마당가에는 기암괴석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었다.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건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항우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부하에게 말했다.

“칼이 무뎌졌으니 여기서 내 칼을 좀 갈아다오!”
그러나 부하들은 일어날 생각도 아니 하고, 주저앉은 채 대답한다.

“지금은 한 걸음도 움직일 기운이 없으니 저녁이나 먹은 후에 칼을 갈아 드리겠습니다.”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참형(斬刑)에 해당한다.

그러나 항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따라온 그들의 충성이 너무도 고마워 누구 하나라도 벌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칼만은 미리 갈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서 항우는 몸소 물가로 걸어가 자기 칼을 손수 갈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장군이 된 이후 자기 손으로 칼을 갈아 보기는 처음으로 칼을 다 갈고 난 뒤 애마 ‘오추’에게도 손수물을 먹여주었다.
이렇게 부하 군사들조차도 꼼짝도 할 수 없도록 피곤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말에게 물까지 먹여 주고 나서 홍교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후원으로 들어가 보니 4, 5명의 호호백발 노인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원에는 사람이 이렇게나 적으니 웬일이오?”
항우의 질문에 노인들이 대답한다.

“이곳의 원생(院生)들이 20여 명이나 있었으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모두들 피난을 가버리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이 원을 지키고 있다오.
그런데 귀공은 누구시기에 이 밤중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초패왕이오. 싸움에 져서 몸을 피하며 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노인들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땅에 엎드리며 말한다.

“폐하이신 줄도 모르고 대죄를 지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항우는 그들을 일으켜 앉히며 말한다.

“그대들은 속히 일어나 밥을 지어주시오. 우리들은 지금 하루 종일 싸우기만 하고, 밥을 먹어 보질 못하였소.
그리고 지금 밥을 지어 준다면 고마움의 표시로 강동에 돌아가는 길로 백 섬의 쌀로써 갚아 드리겠소.”
노인들 중에 유식한 노인 한 사람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이곳은 초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이옵니다. 저희들이 폐하께 진지를 지어 올렸기로 어찌 황공하게도 보상을 바랄 수 있으오리까? 진지를 넉넉히 지어 올릴 터이니 마음껏 드시옵소서.”
그리고 노인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저녁상을 차려 왔는데, 식탁에는 온갖 산채(山菜)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항우와 그 부하들은 노인들 덕택에 여러 날 만에 밥을 배불리 먹었다.
그렇게 그날 밤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이렇게 잠자리에 들게 된 항우는 새벽녘에 있었던 사랑하는 아내, 우미인(虞美人)과의 이별 시(詩)의 마지막 구절이 자꾸 되뇌어져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虞兮虞兮 奈若何(우혜우혜 내약하) : 우야, 우야,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우혜우혜 내약하!
우혜우혜 내약하!
우혜우혜 내약하...
우혜우혜...
우(虞)...

- 제 15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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