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56화

2021. 8. 7. 07:21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56화

☞ 虞兮虞兮 奈若何(우혜우혜 내약하)

항우는 밤사이에 이변(異變)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우미인과 함께 잠을 자다 문득 잠결에 들으니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웬 초나라 노래 소리냐? 내가 지금 고향에 돌아왔더란 말이냐?”
항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잠을 깬 곳은 틀림없는 군영(軍營) 막사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항우는

“밖에 누구 없느냐!”
하고 큰소리로 사람을 부르자, 주란과 환초가 부리나케 달려와 울면서 아뢴다.

“폐하! 한신이란 놈이 간밤에 산상에서 퉁소로 초나라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이 산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고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8천여 명에 달하던 병사들은 물론 계포와 종이매조차도 달아나 버려서 이제 남은 군사는 우리 두 사람과 8백여 명의 결사 대원들뿐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뭐야? 계포와 종이매까지 달아나 버렸다고?”
“그러하옵니다, 폐하! 모두 달아나 버려서 이제는 적을 막아낼 수가 없사오니 폐하께서도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럴 수가! 오오, 하늘이 정녕 나를 버리신다는 말인가?”
그 탄식성이 너무도 비통하여 주란과 환초조차 흐느껴 울기까지 하였다.

우미인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항우와 함께 듣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떨고만 있었다.
항우는 그러한 우미인을 돌아보며,

“내가 당신과 함께 창검과 화살이 난무하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싸움을 하는 틈을 타서 허술한 곳으로 스스로 도망을 쳐라.
이제 내가 당신과 헤어져 어디론가 도망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구나.
당신과 더불어 부부의 정을 나눠온 지가 이러구러 7, 8년, 천군만마의 진중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우리였건만 이제 기약 없는 이별을 하려니 가슴이 메어 오는구나!”
하고 말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항우에게는 나라가 망하게 된 목전의 위기도 슬픈 일이었지만, 내 몸같이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헤어진다는 것은 더 한층 슬픈 일이었던 것이다.

우미인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땅에 쓰러져 울기만 하였다.
숨 막히는 슬픔이 계속되자, 항우는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당신은 속히 일어나 살길을 찾아가거라!”
우미인은 정신없이 흐느껴 울다 문득 얼굴을 고즈넉이 들어 남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나무라듯 말한다.

“폐하! 지어미가 지아비를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신첩더러 도망을 가라고 하시옵니까? 신첩은 폐하의 말씀이 너무도 원망스럽사옵니다!”
항우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씹어 삼키며, 냉정한 어조로 아내를 달래듯이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젊은 몸이니 어디를 간들 살길이 없겠는가? 나를 생각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거라.”
우미인이 탄식하듯 말한다.

“신첩은 오랫동안 폐하의 은총을 입어 오면서 언제든지 폐하와 생사를 같이할 결심을 해왔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만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하시니 그 무슨 무정한 말씀이시옵니까?”
항우는 가슴이 메어 와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몸이다. 그러나 앞길이 구만리 같은 당신까지 나를 따라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항우는 그 한 마디를 씹어 던지고 부랴부랴 갑옷을 추슬러 입고 밖으로 달려 나가 애마(愛馬) 오추의 등에 올라타며 박차를 가했다.

아내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이 죽을 길을 찾아 나서려는 것이었다.
항우가 우미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적진을 향해 돌파하려는 것은 어쩌면 우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항우가 말 위에 올라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오추는 웬일인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우미인이 허둥지둥 쫓아 나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폐하! 아무리 떠나시더라도 신첩의 이별주(離別酒)를 한 잔 드시고 떠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오오, 당신이 주는 이별주라면 내 어찌 마다하겠는가! 어서 술을 가져오거라.”
우미인은 몸소 술상을 들고 나와 마상의 항우에게 이별주를 따라 올리며 말한다.

“폐하께서는 신첩의 선녀무(仙女舞)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마지막으로 선녀무를 한 가락 추어올리겠나이다.”
그리고 우미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가며, 아리따운 몸매로 선녀무를 너울너울 추기 시작하였다.

우미인의 선녀무는 그야말로 천하의 일품이었다.
그녀의 사뿐사뿐 옮기는 발걸음에서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이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기나긴 옷소매를 허공에 높이 치켜 올릴 때는 선녀가 바야흐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하려는 것 같아서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그 춤에서는 슬픔이 안개처럼 솟아올라 보여 손에 술잔을 든 채 우미인의 선녀무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항우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연실 흘러내렸다.

항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가며 춤을 추고 있는 우미인(虞美人)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춤사위에 맞추어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 또한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 때와 운이 불리하니 추 또한 달리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 추가 달리지 못하니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 우여~ 우여~ 어찌 하면 좋단 말이냐?

항우가 즉흥시를 슬프게 읊고 나자, 우미인은 춤을 추어 가며 화답(和答)을 한다.

漢兵已略地 四方楚歌聲(한병이략지 사방초가성) : 한나라 군사가 이미 이 땅을 침략하여 사방은 초나라 노래 소리 뿐이고,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대왕의기진 천첩하료생) : 대왕께서 의기를 잃었으니 신첩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항우와 우미인은 이별이 서러워 노래를 주고받으며 언제까지나 헤어질 줄을 몰랐다.
부부의 애절한 이별을 눈물로 지켜보던 주란과 환초는 먼동이 터오는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항우에게 아뢴다.

“폐하! 동이 터오기 시작하니 적의 무리가 언제 덤벼올지 모르옵니다. 어서 빨리 떠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제야 아내에게 달래듯 말한다.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나는 어디론가 떠나가야만 하겠다. 당신도 속히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토록 하라.
우리들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부둥켜 잡고 울면서 호소한다.

“낭군 혼자만 떠나시면 저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당신은 얼굴이 아름다워 유방도 당신만은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죽을 걱정은 하지도 마라.”
그러자 우미인은 몸부림을 치며 앙탈하듯 외친다.

“신첩은 폐하와 함께 도망을 가다가 적의 손에 붙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이옵니다. 설사 육신이 진토가 되더라도 혼백만은 폐하를 따라서 초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당신을 내 어찌 나와 함께 죽자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도망을 치다 죽을 결심이지만 당신까지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잡으며, 다시금 애원하듯 말한다.

“정말로 그러하시다면 신첩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시옵소서.”
항우도 ‘최후의 간청’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 판국에 무슨 소원이 있단 말이냐? 그것만은 들어 줄 테니 어서 말해 보아라.”
하고 재촉하였다.

“바라옵건대, 폐하의 보검(寶劍)을 신첩에게 이별의 정표로 내려주시옵소서. 신첩은 어디로 가나 그 보검을 폐하로 알고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눈물겹도록 슬픈 아내의 마지막 간청이었다.

아무려니 항우도 그것만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아낌없이 풀어주면서 말한다.

“그런 소원이라면 어찌 들어주지 않겠느냐? 어서 받아라.”
우미인은 보검을 받아들고 나더니 비장한 어조로 항우를 힘차게 부른다.

“폐하!”
“무슨 일이냐?”
“신첩이 폐하를 따라나서면 폐하는 저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신첩은 이 자리에서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이 순간부터 신첩을 잊으시고 신속히 피신하시옵소서.”
우미인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자리에서 항우로부터 받아든 보검으로 자진하였다.

- 제 15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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