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54 화
2021. 8. 5. 08:3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54화
☞ 십면매복(十面埋伏)을 돌파하는 항우의 괴력
“하하하,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하여도 끝까지 어리석을 뿐이구나.”
항우는 유방이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장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항우와 유방이 단둘이 싸운다면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유방이 달려오는 항우를 옆으로 피했다.
이때 좌우에 대기하고 있던 공희와 진하가 싸움을 가로맡고 나섰다.
항우는 성난 사자처럼 좌충우돌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큰소리로 외친다.
“요, 강아지 같은 놈들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른다는 말이냐?”
과연 항우의 창검술은 번개 같았으나 공희와 진하도 일당백의 용장이었다.
1대 2로 싸우기를 무려 30여 합, 공희와 진하는 점점 힘에 부쳐 가건만, 항우의 기세는 싸울수록 왕성해 갔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항우는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비호같이 달려들어 공희의 가슴을 창으로 찔러 버린다.
진하가 크게 당황하여 덤벼들려는 순간 항우는 다시 창을 돌려 이번에는 진하를 찌르는데, 천만다행하게도 창이 빗나가 진하의 투구만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진하는 전신이 오싹해 오는 공포감에 본진으로 쏜살같이 쫓겨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근흠과 자무가 달려 나가 항우와 접전을 벌였다.
항우가 근흠과 자무를 상대로 싸우다가 문득 유방을 찾아보니 유방은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유방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싸우다 말고 그쪽으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항우가 언덕으로 달려 올라가는 도중에 하후영이 일군을 몰고 와 길을 가로막고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나 하후영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후영은 불과 2, 3합을 겨룬 후에 동북쪽으로 쫓겨 가는데, 어느 사이에 유방의 모습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유방이란 놈이 패잔병들과 함께 도망간 것이 분명하니 추격하여라.”
항우는 좌우 군을 거느리고 앞장서 5리쯤 추격을 계속했다.
어지럽게 쫓겨 가던 한나라 군사들이 거기서부터는 좌우로 정연하게 갈리면서 양분되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계포가 항우에게 급히 간한다.
“적들이 좌우로 질서 정연하게 갈리는 것을 보니 적은 거짓으로 쫓겨 온 것이 분명하옵니다.
이 부근에 복병이 있는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의 추격은 삼가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계포의 간언을 옳게 여겨 말을 멈추고 적진을 관망하고 있었다.
한신의 위장 도주(僞裝逃走)에 여러 차례 골탕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추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적진에서는 이좌거가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이좌거를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기도 모르게 장창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이놈아, 잘 만났다. 거짓 항복으로 나를 여기까지 꾀어 온 놈이 바로 네놈이 아니었더냐?”
이좌거가 말을 멈추더니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지난날 제가 폐하를 찾아갔을 때는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폐하는 지금 한신의 계략에 빠져 있사오니 모든 것을 체념하시고 깨끗이 항복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그러면 제가 한왕에게 품고하여 목숨만은 건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항우는 우뢰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이 우라질 놈아! 네 놈이 아직도 나를 속일 셈이냐?”
하고 덤벼들었다.
이좌거가 잡힐 듯 잡힐 듯 쫓겨 가니 항우는 더욱 약이 올라 추격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10리쯤 추격하여 어떤 숲속에 다다랐을 때 돌연 이좌거는 간 곳이 없다.
오히려 사방에서 복병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오는 것이다.
항우와 그의 군사들은 불시에 사면으로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숨 가쁘게 퇴각하고 있는데, 5리도 채 못 갔을 때 이번에는 한신이 대군을 몰고 나타났다.
계포와 종이매가 항우를 호위하며 가까스로 군사들을 추슬러 본진 쪽으로 되돌아가려는데, 이번에는 근흠과 자무가 사방에서 겹겹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었다.
항우는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아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신이 대군을 몰고 추격해 왔다.
그 기세는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끓어오르듯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항우는 그런 기세에 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쫓겨 가고 있었다.
이때 주란이 대군을 몰고 와 항우를 구하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본진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 또다시 적의 기습을 당하게 될지 몰라 항우는 본진을 지키고 있는 우자기에게 말한다.
“적의 기세가 워낙 막강하여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오늘 밤에 일단 팽성으로 철수했다가 전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오기로 하자.”
그러자 우자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뢴다.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한신의 군사들이 이미 팽성을 점령하고 폐하의 일가족을 모조리 생포했다는 소리가 있었사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팽성으로 가신다한들 대책이 묘연하옵니다.”
항우는 그 소리를 듣고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며 말한다.
“뭐야? 한신이란 놈이 이미 팽성까지 점령해 버렸다고?”
항우가 대경실색하는 꼴을 보고 우자기는 얼른 위로의 말을 한다.
“폐하!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우리에게는 아직 10만 가까운 군사가 남아 있사옵니다.
오늘 밤 그들을 형초호(荊楚湖) 방면으로 후퇴시켜 후일을 기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팽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은 적의 첩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일단 팽성에 들러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그래서 산동(山東)에 있는 노군(魯郡)을 근거지로 하여 재기(再起)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대장들은 항우의 의견에 따라 한밤중에 삼군을 거느리고 팽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밤을 새워 가며 행군하여 소현(蕭縣)에 도착하였다.
거기서부터 팽성까지는 50리가 남았을 뿐이다.
항우는 그제야 군사들과 함께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여기저기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어 정찰병을 보내 정탐해 보았다.
아니 이게 왠일인가?
적병들이 남쪽에서 구름 같이 집결해 오고 있고, 동쪽에서는 수백 개의 붉은 깃발이 새벽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수십만 명이나 되어 보인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며 좌우를 돌아보며 외친다.
“적병들이 그렇게나 많다 하니 천하의 군사들이 모두 유방의 군사들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냐?”
종이매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앞에서는 적병이 가로막고, 뒤에서는 한신이 맹렬히 추격해 오는 걸 보니 팽성이 함락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재빨리 산동으로 피신함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팽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서 어물거리다가는 재기의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되시옵니다.”
주란도 뒤를 이어 이렇게 간한다.
“종이매 장군의 간언은 지당한 말씀인 줄로 아뢰옵니다. 폐하께서는 신속히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항우는 격노한 어조로 외친다.
“내 일찍이 수많은 곤경에 봉착해 보았으되, 완패(完敗)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적의 대세가 막강하기로 나를 당할 자가 과연 누가 있더란 말이냐? 내가 여기서 쫓겨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대들은 나를 따라와 나 혼자서 적장들을 모조리 때려죽이는 광경을 보고만 있으라.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팽성을 빼앗기고 지지리 못나게 쫓겨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항우가 매우 완강하게 나왔다.
이에 대장들은 싫든 좋든 간에 항우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팽성으로 달려가고 있노라니 얼마 후 비마가 달려와 항우에게 아뢴다.
“팽성이 적에게 함락되어 성루에는 붉은 깃발이 수없이 펄럭이고 있사옵니다. 게다가 그들은 사대문(四大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듣고 초군 대장들은 크게 낙심하였으나 항우는 투구 끈을 새삼스럽게 졸라매며 외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팽성만은 탈환하여야 한다.”
항우는 팽성 탈환전을 전개하려고 구리산으로 향해 전진했다.
그런데 문득 산 위에서 커다란 붉은 깃발이 전후좌우로 펄럭이더니 사방에서 복병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서북방에서 왕릉의 군사, 북쪽에서는 노관의 군사, 동북방에선 조참의 군사, 동쪽에서는 영포의 군사, 동남방에선 팽월의 군사, 남쪽에서는 주발의 군사, 서남방에선 장이의 군사, 서쪽에서는 장다의 군사 등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렇게 여덟 무리의군사가 항우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죄어 들어오니 깊은 산중에는 살기가 등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항우는 분노가 극에 달하여 장창을 꼬나 잡고 여덟 명의 적장들을 둘러보며 외친다.
“오냐! 여덟 놈이 한꺼번에 덤벼 오너라. 나의 장창은 너희 놈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항우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덟 명의 장수들은 일시에 항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항우의 행동은 번개같이 날쌔고 벼락같이 강해서 여덟 명의 적장들의 공격을 귀신처럼 막아내며 공격에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이에 초진에서도 종이매, 주란, 우자기 등이 총동원되어 양군은 격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한군이 쫓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군에서는 박소, 손가회, 고기, 장창, 척사 등의 제2진이 파상 공세를 가해 온다.
그러나 항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20여 합을 싸우면서 손가회를 창으로 찔러죽이고, 척사를 장창으로 후려갈겨 죽였다.
이에 박소, 고기, 장창 등이 쫓겨 달아나니 번에는 성녀산 계곡에서 진희, 전관, 자무, 오예 등이 무리를 지어 공격을 가해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부터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항우와 부딪쳐 불과 10여 합을 넘기지 못하고, 제풀에 뿔뿔이 쫓겨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신은 ‘주역 진법’에 의하여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항우를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항우는 60여 명의 적장들을 거의 혼자 힘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십면매복’의 겹겹이 둘러친 무서운 전법을 혼자 힘으로 극복해 낸 항우의 위력은 실로 초인적인 위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자, 모든 장수들은 땅에 엎드려 항우의 위력에 탄복하였다.
“폐하는 진실로 하늘이 내리신 신장(神將)이시옵니다. 폐하가 아니면 60여 명의 적장들을 어떻게 혼자서 물리칠 수가 있었겠나이까?”
사실 항우는 이날 60여 명의 적장들과 싸웠지만 창검을 손에서 떨어뜨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상처조차 한 군데도 입지 않았다.
항우는 장수들의 찬사를 받자, 용마 오추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한다.
“오늘 싸움에서 내가 적의 대장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오추’의 덕택이었다.”
그러자 오추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머리를 들어 먼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히히히히힝!”
하고 큰 소리로 울어댄다.
이윽고 항우가 장중으로 돌아와 투구를 벗어 놓았다.
이때 우미인이 달려 나와
“폐하께서 무사하셨음을 축하하나이다.”
하고 큰절을 올린다. 항우는 아리따운 아내의 용모를 보고 흔쾌히 웃으며 말한다.
“당신은 오늘 엄청난 적군을 보고 무척 떨었겠구먼!”
우미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첩은 폐하의 천위(天威)와 모든 장수들의 노력으로 적군을 물리친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하옵니다.
폐하께서는 60여 명의 적장을 상대로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피곤하시겠사옵니까?”
“무슨 소리! 나는 그 옛날 장한과 아홉 번을 싸우면서 여러 날을 굶은 일도 있었지만, 그때도 피로를 몰랐노라. 오늘 정도의 싸움으로 피로를 느낄 내가 아니로다.”
항우의 말을 듣고 좌중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주란이 항우에게 아뢴다.
“폐하! 적들은 오늘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야간 기습을 감행해 올지도 모르옵니다. 지금부터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옵니다.”
항우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한다.
“그놈들이 그만큼이나 혼이 났는데, 설마 또다시 덤벼 올라고...”
주란이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자고로 매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일러 오니 설사 적이 오지 않더라도 대비만은 꼭 해두어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사방에 진을 치고, 중군을 철저히 방비하게 하라.”
항우는 군명을 내려놓고, 우미인을 상대로 장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크게 싸우며 적을 모두 물리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마시는 술맛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감미롭고 좋았다.
- 제 15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