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20 화
2021. 7. 2. 07:2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0화
☞ 서위왕 위표의 정벌
위표는 주숙을 하옥시킨 후 천자가 되기 위해 한왕을 치려고 백장(栢長)을 군사(軍師)로 삼고, 백직(栢直)을 총사령관, 풍경과 경택을 기병과 보병 대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10만 군사 출동을 서둘렀다.
그러나 한왕을 치려면 항우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기에 항우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보냈다.
“본인은 한왕을 정벌하기 위해 함양을 공략하고자 하오니 항왕 폐하께서는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시어 본인에게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항우는 그 표문을 받아 보고 크게 웃으며 범증에게 이렇게 물었다.
“위표가 이런 글을 보내왔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위표가 별안간 한왕을 배반하기로 한 것은 관상가 허부의 농간 때문인 줄로 아뢰옵니다.”
“허부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위표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했단 말이오?”
그러자 범증은 허부가 위표를 만나 그를 설득한 과정을 소상히 설명해 주면서
“허부는 위표에게 폐하께 다시 돌아가라고 직접 말하기가 거북하여 ‘당신은 천자의 천명을 타고났으니 초나라 황제와 협력하여 함양을 점령해 버리면 그대로 천자가 될 것이다.’라고 엉뚱한 술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위표는 천자가 되고 싶어서 우리에게 이런 표문을 보내 온 것입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자 배를 움켜잡고 웃는다.
“하하하, 위표가 천자가 되기 위해 나의 힘을 빌려 유방을 치겠다고? 어리석은 자의 백일몽(百日夢)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소? 하하하...”
“아무튼 위표가 우리가 던진 낚싯밥을 물었으니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옵니다.”
한편, 형양성에 있는 한왕은 위표가 반란을 일으켜 함양을 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역시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위표가 10만밖에 안 되는 군사로 함양을 치러가겠다고 한다니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오. 그러나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니, 누가 나가서 그를 쳐부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모사 역이기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우리 군사들은 그동안 초군과 싸우느라고 몹시 지쳐 있사옵니다. 따라서 지금 다시 위나라로 출병하는 것은 삼가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다행히도 신이 위표와 친분이 두텁사오니 위표를 만나 이해(利害)로써 설득하여 우리를 배반하려는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위표가 신의 설득에 응해주지 않으면, 그때 가서 정벌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무력을 쓰지 않고 말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러면 광야군(廣野君)께서는 수고스러우신 대로 위표를 직접 만나보고 오시오.”
역이기 노인이 그날로 길을 떠나 위표를 찾아가자, 위표는 역이기 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여 대뜸 이렇게 물었다.
“역 노인께서는 한왕의 명을 받고 나를 설득하려고 오신 모양이오?”
“나는 누구의 명을 받고 대왕을 찾아온 것은 아니요. 다만 옛정을 생각해서 대왕에게 어느 편이 이로운가를 말씀드리고자 찾아온 것이오. 그에 대한 판단은 대왕 자신이 내리실 일인데, 나의 말을 듣기도 전에 어찌하여 친구의 호의를 의심부터 하시오?”
역이기 노인이 정색을 하고 나무라자, 위표는 약간 계면쩍은 기색을 보이며 말한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용서하시오. 그렇다면 선생이 내게 말씀하고 싶은 이해(利害)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대장부가 두 가지 마음을 가져도 옳지 못하고, 사건을 일으키는데 있어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도 안 되는 법이오. 대왕은 처음에는 초나라를 섬기다가 한나라에 귀순하였소. 그런데 이제는 한왕에게 불만을 품고 또다시 초나라로 가려고 하니, 이래 가지고서야 무슨 이득을 보겠다는 말씀이오?
지금의 천하대세를 냉철하게 관망하건데, 초나라는 세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항우가 워낙 포악하여 언제 망할지도 모르오. 그와는 반대로 한나라의 세력은 초나라에 비해 약하기는 하지만, 한왕 자신이 덕이 많고 지혜로워서 매사를 순리로써 처리하여 인근 제후들의 덕망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조만간에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오. 뿐만 아니라 백성들 입에서조차 ‘초는 망하고 한은 흥한다.’는 말이 회자하고 있는 터이오. 이런 일련의 상황을 감안하건데, 대왕이 초를 등지고 한나라에 귀순한 것은 참으로 잘하신 일이었소. 지금처럼 한왕을 성실하게 섬기고 있으면 장래에는 더욱 고귀하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인데, 어찌하여 한나라를 배반하여 스스로 손해를 보는 길을 택하려 하시느냐 말씀이오.”
위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결연히 말한다.
“한왕은 나를 너무도 무시하고 냉대를 해왔소. 나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지 말아 주시오. 사내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어찌 남의 밑에서만 살다가 죽을 것이오.
나는 내 비위를 거스르는 자를 정벌해 버리고 당당하게 천하를 호령해 볼 결심을 굳힌 사람이오.”
위표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밝히자, 역이기 노인은 더 이상의 설득은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가.
그리하여 형양성으로 돌아와 한왕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한왕은 크게 실망하며 묻는다.
“그렇다면 위표는 머지않아 우리에게 덤벼올 텐데, 그쪽 장수들의 면면은 어떠합니까?”
“최고 사령관에 백장, 총대장에 백직을 비롯하여 각 군 대장으로는 보장, 경택, 기장, 풍경 등등이 있기는 하오나 모두가 한결같이 대단치 않은 장수들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장 따위가 어찌 우리의 한신 장군을 당해 낼 수 있으리오. 다만 그중에는 풍경이라는 자가 가장 현명한 편이나 그자도 우리의 관영 장군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즉시 한신을 불러 명한다.
“장군에게 정병 10만을 줄 테니 지금 곧 조참, 관영 장군 등과 함께 위표를 쳐부수도록 하오.”
한신은 왕명을 받자,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아뢰었다.
“신은 어명을 받자옵고 곧 출정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나라로 출정한 줄 알면, 항우가 반드시 허를 찔러 대군을 몰아쳐 올 것이니 대왕께서는 거기에 대한 대비도 강구해 주시옵소서.”
“음... 항우가 장군이 위표를 정벌하러 간 줄 알게 되면 우리의 허를 찔러 공격해 올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된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는지 장군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한신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조용히 들며 아뢴다.
“신이 생각하옵건데, 많은 장수들 중에서 그만한 큰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장수는 오직 왕릉 장군이 있을 뿐이옵니다. 그러니 왕릉 장군을 형양성 수호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한왕은 대번에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그건 안 될 말씀이오. 지금 항우가 왕릉 장군의 어머니를 볼모로 붙잡아 두고 있기 때문에 왕릉은 전력을 다해 싸울 형편이 안 될 것이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왕릉 장군의 어머니는 현명한 부인이기 때문에 자식을 키울 때 지조(志操)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해 키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왕릉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변하는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니, 대왕께서는 왕릉을 최고 지휘관으로 삼고, 진평을 참모로 삼으시면 항우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싸움에서 불리한 기색이 보이거든 장량 선생과 상의하시어 처리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안심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장군의 의견대로 할 테니 장군은 위표를 정벌하는 대로 속히 돌아와 주시오.”
한신이 조참, 관영 등과 함께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포판(浦坂) 땅에 이르니 위군(魏軍)은 어느새 강을 앞에 두고 진을 치고 있었다.
한신이 군사들에게 말한다.
“적의 군사들은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도강에 필요한 배가 백여 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어찌 10만 군사가 일시에 도강(渡江)을 할 수가 있겠나? 그러나 내게 비책(秘策)이 있으니 그것은 목앵(木罌)을 만들어 일시에 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러자 관영이 묻는다.
“목앵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옵니다. 목앵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목앵을 장군도 모르고 계셨소? 목앵이란 나무를 엮어 만든 일종의 뗏목으로 부교(浮橋)를 말하는 것이오. 이것을 넓고 튼튼하게 만든다면 많은 군사는 물론이고 전차(戰車)와 수레까지 한 번에 싣고 강을 건널 수가 있을 것이오.”
관영은 수백 명의 군사를 차출하여 불과 2, 3일 만에 목앵을 수없이 다 만들어 놓고 나자, 한신은 관영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장군은 1만 명의 군사를 군선(軍船)에 나누어 싣고 강을 건너가면서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기세를 보이시오. 그러면 적은 크게 혼란해질 것이니 저들이 혼란해지거든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부으시오.”
관영이 명령을 받고 군사들을 몰고 강으로 달려 나가자, 이번에는 조참을 불러 별도의 명령을 내린다.
“장군은 2만 군사를 데리고 목앵을 타고 하양(下陽)에서 도강하여 안읍(安邑)에서부터 적의 후방을 기습하시오. 나는 후진(後陳)을 거느리고 별도로 도강하여 관영과 함께 삼면으로 공격하면 위표를 생포할 수가 있을 것이오.”
조참도 명령을 받고 하양으로 떠났다.
한편, 위표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려고 하는데, 홀연 강 건너편으로부터 적병이 수백 척의 군선을 나눠 타고 강을 건너오며 함성을 지르고 군고를 울려대는데, 그 기세가 천지를 뒤집을 것만 같았다.
위표의 군사들은 적의 공격을 받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양으로부터 비마가 달려와
“한나라 장수 조참이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목앵을 타고 하양으로 건너와 안읍에서 대왕 가족을 생포해 가지고 지금 이리로 진격해 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위나라 군사들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데, 후방에서는 어느새 조참이 덜미를 눌러 오고, 전방에서는 한신과 관영이 거의 동시에 앞길을 막으며 죄어 오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위나라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가는 바람에 위표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신의 손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한신은 위표를 땅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추상같이 꾸짖는다.
“주상께서는 초나라를 치기 위해 그대를 총대장으로 발탁하셨거늘, 그대는 주색에 미쳐 30만 대군을 대패하게 하였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자하신 대왕께서는 그대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다만 고향에 돌아가 편히 쉬게만 해주셨다.
그런데 그대는 그와 같은 은총을 모르고 오히려 반기를 들고 일어났으니, 그대의 죄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손으로 죽이기는 안 될 일이므로 형양성까지 끌고 가 주상께서 직접 단죄를 내리시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위표를 ‘감차’에 가두어 감시를 엄하게 하고, 평양성에 입성하여 민심을 평온하게 수습하였다.
그리고 옥중에 갇혀 있던 대부 주숙을 불러내 그로 하여금 평양성을 지키게 하였다.
- 제 12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