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2화

2021. 7. 4. 07:2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2화

☞ 왕릉 어머니의 자결

“장군님! 큰일났사옵니다. 항우가 지금 장군님의 자당(慈堂) 어른을 팽성에서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하옵니다.”
왕릉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항우가 볼모로 붙잡아 두었다는 나의 어머님을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너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자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최후의 말씀을 저쪽에서 전하는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장군께서 지금 당장 달려가시지 않으면 자당을 영원히 못 뵙게 되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왕릉은 그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울다가 한왕에게 달려가 자신의 고충을 사실대로 아뢴다.

“신의 노모가 70이 넘었사오나, 신은 아직까지 노모에게 변변한 효도 한 번 한 일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항우가 신의 노모를 볼모로 끌어와 죽이려 하므로 노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를 구해 드리고 싶사오니 신이 항우를 찾아갈 수 있도록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신이 비록 항우를 찾아가더라도 대왕에 대한 일편단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장량을 불러 물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지 선생께서 슬기로운 지혜를 알려주소서.”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더니 조용히 머리를 들며 왕릉에게 말한다.

“장군이 노모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그러나 노모를 구하기 위해 항우를 찾아가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오. 항우는 며칠 전 장군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장군을 쉽게 제거해 버리려고 이런 못된 사술(詐術)을 쓰고 있는데,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면 어떡하오?
노모께서 실제로 항우의 진지에 끌려오신지 확실한 사실조차 모르면서 심부름꾼의 말만 믿고 달려가면 어떡하느냔 말이오? 그러하니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노모가 그곳에 나와 계신 것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오. 아울러 노모께서 일선에 붙잡혀 오셨다면, 노모의 친필 서한을 받아 오게 합시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항우를 찾아가는 것은 그 후의 일이오.”
과연 장량의 논리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으니 한왕은 장량의 논리에 크게 감탄하고, 왕릉에게 달래듯 말했다.

“자방 선생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모사 숙손통(叔孫通)을 보내 자당께서 정말로 항우의 진영으로 끌려나와 계신지 어쩐지 우선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합시다. 이후의 문제는 확인이 되는 대로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모사 숙손통이 어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항우를 찾아가니, 항우는 매우 퉁명스러운 어조로 숙손통에게 말한다.

“왕릉은 나와 고향이 같은 패현(沛縣) 사람이오. 따라서 왕릉은 같은 고향사람인 나를 섬겨야 옳을 일인데, 그자는 유방을 도와 나를 크게 해치고 있소. 그래서 나는 그자의 어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지금이라도 그자가 나를 찾아와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을 한다면, 어미와 함께 아들을 모두 살려 줄 용의가 있소. 그러나 그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자의 어미를 죽여 불효자의 악명(惡名)을 천추에 남게 할 생각이오.”
이렇게 말하는 항우의 기세는 매우 험악하였는바, 숙손통이 조용히 반문한다.

※ 註) 이 부분에서 작가 정비석은 뭔가 착각에 빠진 듯하다.
왕릉이 패현(沛縣) 출신인 것은 맞으나, 항우가 같은 패현(沛縣) 사람은 아니다.
항우는 하상(下相)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히려 패공 유방이 왕릉과 같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패공(沛公)이라 부른 것도 고향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왕릉 장군의 어머니를 한 번 만나 뵙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여봐라! 왕릉의 어머니를 이 자리에 끌어내 오너라!”
이윽고 왕릉의 노모가 형리들에게 끌려 나오자 숙손통에게 묻는다.

“귀공은 어디서 오신 누구시기에 나 같은 늙은이를 만나자고 하시오?”
숙손통은 허리를 굽혀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왕릉 장군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자당께서 지금 고초를 겪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릉 장군이 몹시 괴로워하고 계시옵니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장군께서는 자당을 구하시기 위해 이리로 직접 찾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자당께서는 아드님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한 장만 써 주시옵소서. 장군께 그 서한을 전달해 올리면 즉시 이곳으로 달려오실 것이옵니다.”
숙손통은 왕릉의 어머니가 이 같은 아들의 전갈을 들으면 응당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 죽게 된 자신을 아들이 달려와 살려 주겠다는데,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으니 숙손통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얼굴에 노기를 띠며 큰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귀공은 어찌하여 말 같지 않은 말씀을 하고 계시오. 한왕은 워낙 관인대도(寬仁大度)하신 관계로 만천하의 창생(蒼生)들이 그분을 부모님처럼 받들어 모신다오. 내 아들이 천만다행으로 그와 같이 훌륭한 어른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어 이 어미는 항상 하늘에 감사하고 있다오.
만약 내 아들이 한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다소나마 공을 세운다면, 나는 공신의 어미로써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이거늘, 어찌하여 구차하게 일시적으로 생명을 건지자고, 내 아들을 역적에게 항복하여 악명을 천추에 남게 하겠소.
귀공은 속히 돌아가서 내 아들에게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 주시오.”
왕릉의 어머니는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호위병의 허리에서 단도를 낚아채더니 자기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고, 땅바닥으로 엎어지며 자결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말릴 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숙손통은 물론 항우를 비롯하여 입시했던 호위병과 형리들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항우는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며 눈앞에서 장렬하게 죽어가는 왕릉 모친의 광경을 보자 분통이 터져 올랐다. 그리하여

“저년의 시체를 당장 끌어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버려라!”
하고 무서운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용저가 항왕에게 간한다.

“폐하! 저 늙은이의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파의 장례를 예를 갖추어 지내 주게 되면, 왕릉이 그 은공에 탄복하여 결국에는 우리에게 귀순해 올 수 있는 계기가 되겠사오나 만약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면, 왕릉은 원한이 골수에 맺혀 반드시 보복을 하려고 이를 악물고 덤벼 올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장래를 생각하시어 노파의 시체를 고향인 팽성으로 곱게 보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도 그 말에는 수긍 되는 점이 있어 노파의 시체를 팽성으로 보내주도록 허락한 뒤에 숙손통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공은 형양성으로 돌아가거든 왕릉더러 지금이라도 귀순하도록 권고해 주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군을 일으켜 왕릉뿐만 아니라 한왕 유방까지 모두 사로잡아 목을 잘라 버릴 것이오. 유방에게도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시오. 살고 싶거든 왕릉을 하루속히 내게 보내라고 말이오.”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폭언이었다.

항우는 막강한 힘을 가진 강자(强者)인지라 그가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온다면 한왕이 나라를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숙손통은 그와 같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항우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한왕은 현사(賢士)들에 대한 태도가 이만저만 불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작부터 폐하에게 귀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왕릉 장군 역시 평소부터 저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이번에 제가 돌아가게 되면 왕릉 장군과 상의하여 머지않아 폐하 앞으로 귀순해 오기로 하겠습니다.”
“귀공도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오. 그러면 속히 돌아가 왕릉을 꼭 데려오도록 하시오. 그래 주면 귀공에 대한 대우는 특별히 생각해 주기로 하겠소.”
항우는 숙손통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이번에는 한나라의 군사 비밀을 알아내려고 이렇게 물었다.

“유방은 지금 병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 항복을 아니 하고 버티는 것이오?”
“지금 한나라의 병력은 20만이 넘고, 대장만도 6, 70명 가까이 있사옵니다. 게다가 무기와 군량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 폐하께서 장기전을 펼치시면 불리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런 군사력과 군비가 있음에도 이번 전투에서 시종일관 수비 태세로 나오는 것은 그 나름대로 깊은 계략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 계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실상인즉, 한신이 위나라를 평정하고 난 후 지금 폐하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팽성으로 쳐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는 태공과 여왕후를 탈환해 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런 뒤에는 일단 형양성으로 돌아와 제(齊)나라와 연(燕)나라를 차례로 정벌하여 폐하를 오도 가도 못하도록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을 꾸미고 있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유방과 한신이 그렇게도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한신이 팽성으로 쳐들어가면, 그때는 한왕도 정면으로 공격해 올 것인데, 전후방에서 일시에 공격해 오게 되면, 폐하께서도 이번만은 저들을 막아내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속히 팽성으로 돌아가셔서 한신의 공격을 막아 낼 태세를 미리 갖추어 놓으시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알겠소. 그러면 귀공과 왕릉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팽성으로 철군할 테니 빨리 다녀오시오.”
숙손통은 항우를 팽성으로 즉시 철수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부득이 형양성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우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데는 크게 성공한 셈이었다.

숙손통이 형양성으로 돌아와 왕릉 장군의 어머니가 처참하게 자살한 경위를 자세히 말해 주니 왕릉은 미친 듯이 통곡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는다.

“항우란 놈이 내 어머니를 죽게 했으니 항우는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로다. 이제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항우를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리라.”
한편, 항우가 아직도 팽성으로 철군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장량이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항우가 한신 장군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팽성으로 철수하고 싶어 하면서도 숙손통과 왕릉 장군이 귀순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우리는 우리대로 손을 써야만 할 것 같구려.”
“손을 어떻게 써야한다는 말씀입니까?”
“항우가 숙손통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울화통이 터져서 무섭게 덤벼올 것 같으니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겠다는 말이오.”
“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면 어떤 대책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에게 비책이 있으니 대왕 전하의 윤허를 받아 그 비책을 쓰기로 합시다.”
장량은 한왕의 윤허가 내려지자, 곧 전옥(典獄)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옥중에 있는 두 사람의 사형수 목을 잘라 성문 위에 높이 매달아 놓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옆에는 방문을 써 붙이되, 숙손통과 왕릉이 항우와 내통을 하고 있었기에 이를 적발하여 두 반역자의 목을 베어 효수(梟首)한다는 사실을 자세히 써넣어라.”
전옥이 장량의 명령대로 죄수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성문 위에 높이 걸어 놓고 방문까지 써 붙였다.

그러자 성안의 사람들은 효수형을 당한 죄수가 숙손통과 왕릉인 줄로 믿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정찰병의 입을 통해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가니 항우는 놀라움과 동시에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저런, 저런! 숙손통과 왕릉은 틀림없이 나에게 귀순해 올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모두 효수형을 당했다니 이런 애석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내가 이번 전투에서는 운이 나쁜 모양이니, 이제는 빨리 철수하여 팽성이나 굳게 지켜야 할 것이로다.‘
한왕은 항우가 철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량에게 물었다.

“항우가 철군을 시작했다니 이 기회에 적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은 어떠하겠소이까?”
“지금의 우리 형편에서는 그런 때가 아니옵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마시옵고 때를 기다려 주시옵소서.”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와 범증에게 형양성에서의 철군 과정을 말해 주니 범증은 땅을 치며 탄식하였다.

“숙손통과 왕릉이 귀순을 약속했다는 것도 말짱 거짓말이었사옵고, 두 사람이 효수형을 당했다는 것도 폐하를 속이기 위한 장량의 사술(詐術)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서야 숙손통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 제 12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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