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4화

2021. 7. 6. 07:2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4화

☞ 한신의 조(趙)나라 정복(征服)

조(趙)나라로 진군해 온 한신은 국경지대 요새(要塞)인 정경성 30리 밖에 진을 치고, 대장 장이(張耳)를 불러 상의한다.

“지금 정형성을 지키고 있는 광무군 이좌거(廣武君 李左車)는 지략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들었소. 그러니 첩자를 많이 보내 적의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소이다. 만약 경솔하게 움직였다가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면 큰일이니 말이오.”
“지금 조왕(趙王)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는 사람은 성안군 진여(成安君 陳餘)입니다. 진여는 병법에 통달했다고는 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진여와 이좌거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진여는 이좌거의 말을 좀처럼 들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정경성으로 대담하게 치고 들어가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속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오. 적의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전에 무작정 진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니 우선 첩자를 보내 정형성의 사정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한신은 10여 명의 첩자들을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많은 돈을 주어 정형성으로 들여보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첩자들은 정형성 안으로 들어가 일부는 주막에서 날마다 술을 마시며 술꾼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민심의 향배를 정탐했고, 일부는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사람이 많은 시장을 배회하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왕 조알은 한나라 군사들이 곧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만에 이르는 군사들을 비상 대기 시켜놓고, 진여와 함께 정형성으로 순시를 와서 이좌거에게 묻는다.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대부라면 어떤 방비책을 세우겠소?”
“한신은 위나라를 평정하고 대주의 하열을 정복한 여세를 몰아 우리한테까지 쳐들어오고 있사온데, 그 기세가 매우 험악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형편에 소상한 장이까지 가세하고 있어서 무력으로 맞서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저들은 군량과 군수 물자를 천 리 밖에서 날라 와야 하기 때문에 군량 사정만은 매우 곤란할 형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유능한 장수를 시켜 3만 군사를 데리고 후방으로 돌아가 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면, 저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조왕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좌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장군 진여가 즉석에서 반대하고 나왔다.

“대부의 계략은 일종의 사술입니다. 싸움에 있어서는 의(義)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싸울 일이지 무엇 때문에 잔꾀를 부린답니까? 한신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확대 과장된 숫자이옵고, 실상인즉, 4, 5천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정면으로 싸워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려니와, 저들은 이미 천 리 길을 달려온 관계로 군사 전체가 피로에 쌓여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비겁하게 정면으로 싸우기를 회피합니까?”
이좌거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신은 군량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좌거의 계략대로 한군의 보급로가 조군에 의해 끊어진다면, 한신은 꼼짝 못하고 철수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신의 운이 좋았던지 진여는 이좌거의 작전 계획을 무시해 버리고,

“적의 병력은 4, 5천에 불과하니 전면 공격을 퍼부어 송두리째 때려 부숴야 합니다.”
하고 총 공격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자, 이제는 조왕 자신이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왕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는 이 장군의 계획은 너무 소극적이오. 이왕이면 진여 장군의 의견대로 적에게 정면 공격을 퍼부어 정정당당하게 승리를 거두도록 합시다.”
이좌거는 조왕의 말을 듣고,

‘조나라는 이제 꼼짝없이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한신은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고 크게 안도하였다.
그리하여 대장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적장 진여는 우리 병력이 4, 5천 명뿐인 줄로 알고 정면으로 공격해 오기로 했다니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면만강(綿蔓江)을 등지고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있다가 적이 오는 대로 격파할 것이오.
주발 장군은 정병 2천을 데리고 산중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일선으로 달려 나오거든 그 기회에 정형성을 점령한 후 우리의 붉은 깃발을 성루에 걸어 놓고, 성을 굳게 지키도록 하시오.”

한신이 ‘배수진’을 치겠다는 말을 듣고 모든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강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것은 만일의 경우에 후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병법상으로는 가장 졸렬한 포진법(布陣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하필이면 배수의 진을 치려고 하시옵니까?”
하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한신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배수의 진을 치기로 하였으니, 여러 말 말고 내 명령대로 하시오.”
하고 일언지하에 다른 대장들의 반론을 막아버렸다.

다음날 조나라 군사들이 진열을 단단히 갖추고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정찰병을 통해 한나라 군사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진여는 크게 웃으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한신이라는 자의 지략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로다. 우리는 일시에 총공격을 퍼부어 한나라 군사들을 모조리 수장(水葬)시켜 버리자.”
조나라 군사들은 함성을 울리고 전고를 두드려 사기를 한층 올리며, 노도와 같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조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몰려오자, 한신은 조참, 번쾌, 근흠 등을 불러 긴급 군령을 내렸다.

“적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소.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배수의 진을 치고 있으니 모든 장수들은 병사들을 결사적으로 독려하여 적을 남김없이 쳐부수도록 하시오.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만약 한 걸음이라도 후퇴하는 자는 즉석에서 목을 베어 버리도록 하시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한신의 군사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처참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나라 군사들은 적의 병력이 4, 5천 명밖에 안 되는 줄로 알고 마구 덤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한신의 군사들은 구름떼처럼 계속해 몰려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병력의 숫자에서 밀리기 시작한 조나라 군사들은 크게 당황하여 자기네 본거지인 정형성으로 급히 쫓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문 바로 앞에 다다라보니 성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성루에는 한나라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어느 사이에 적에게 본거지까지 빼앗겨 버렸단 말인가?”
군사들은 도망갈 곳이 없어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였다.

최고 지휘관인 진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좌충우돌하며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 홀연 관영 장군이 말을 달려와 진여의 머리를 한칼에 베어 버리는 바람에 조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 바람에 허둥대던 조왕도 졸지에 생포됨으로써 조나라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완패하고 말았다.
한신이 정형성에 입성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나자, 여러 대장들이 한신에게 입을 모아 물었다.

“자고로 배수진(背水陳)이라는 것은 병법에서 가장 기피하는 진법이온데, 원수께서는 어찌하여 배수의 진을 치셨습니까?”
한신이 웃으며 대답한다.

“병법에는 ‘함지사지 이후생(陷之死地 而後生)’ 이라는 말이 있소.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불리할 줄을 알면서도 부득이 배수의 진을 쳐야 할 때가 있는 것이오. 어제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소.”
“부득이한 경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우리가 이번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新兵)들을 많이 데리고 왔소. 그런 탓에 정작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대개는 도망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오. 그러기에 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배수의 진을 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던 것이오.
우리가 이런 계획으로 이번 전투를 치렀으니 앞으로 이 병사들은 이번 싸움에서 큰 경험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강군(强軍)으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오. 이것이 내가 배수의 진을 쳤던 가장 큰 이유요.”
모든 장수들은 한신의 임기응변의 능란한 병법 전개에 혀를 차며 감탄하였다.

한신은 이번 전투에서 조왕을 생포함으로써 조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셈이었다.
그러나 한신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나라의 명철한 대부인 이좌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이좌거를 생포하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에 한신은 다음과 같은 방문을 널리 써 붙였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좌거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 황금 천 냥을 상금으로 줄 것이다.’
방문을 써 붙인 지 사흘 만에 이좌거는 어느 농사꾼의 손에 붙잡혀 결박을 당한 채 끌려 왔다.

이로써 무능한 조왕의 생포보다 어쩌면 비중이 더 큰 문무겸전의 이좌거 장군을 생포함으로써 조나라의 정복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 제 12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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