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6화

2021. 7. 8. 08:2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6화

☞ 진평의 반간지계(反間之計)]

대한(大漢) 3년 11월.
한신이 위(魏), 대주(代州), 조(趙), 연(燕) 등의 네 나라를 차례로 정복함에 따라 한왕 유방의 세력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초패왕 항우의 마음은 지극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범증이 입궐하여 항우에게 품한다.

“한신이란 자가 육국을 휩쓸고 돌아가는 바람에 한왕 유방은 형양성에 가만히 앉아서도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들의 세력 확장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에게 어떤 불상사가 닥쳐올지 모르니 저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지금 당장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러잖아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오. 그러기에 내가 불원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성으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하겠소. 이렇게 내가 나선다면 유방 따위는 문제가 안 될 것이오.”
항우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런 항우의 호언장담은 한나라 첩자에 의해 한왕에게 즉시 알려졌다.
한왕은 항우가 조만간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크게 불안해하며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항우가 불원간, 10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형양성으로 쳐들어오겠다고 하는구려, 한신 장군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아직 북방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영포 장군은 구강(九江)으로 돌아가 버렸고, 왕릉 장군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으니 항우의 내습(來襲)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지 크게 걱정이오.”
그러자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에게 좋은 계략이 있사오니 대왕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무슨 계략이 있기에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구려.”
“초패왕이 믿고 있는 사람은 범증과 종이매, 용저와 주은 등 몇몇 군사와 장수에 불과하옵니다. 그러하니 우리가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써서 항우와 범증을 반목(反目)하게 만들면 저들 사이에는 반드시 내분(內紛)이 일어나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성품이 워낙 우직하기 때문에 떠도는 소문만 듣고서도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범증이 제아무리 좋은 계략을 상신해도 듣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또 하나의 계략을 써서 항우를 저절로 망하게 만들어 놓겠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첩자를 매수할 공작금으로 황금 4만 근을 내주었다.
진평은 그 돈으로 적의 첩자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범증과 종이매는 지금까지 많은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왕이 아무런 논공행상도 베풀어 주지 아니하므로 그들 두 사람은 항왕에게 원한을 품고, 지금은 한왕과 내통하여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진평이 매수한 첩자들을 통해 퍼뜨려 놓은 이 같은 유언비어는 확대 재생산되어 초나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고, 마침내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항우는 그 소문을 듣고 대로하였다.

“나는 범증을 ‘아부(亞父)’로 대접해 오고 있는데, 그자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유방과 내통하여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그자가 이렇게 나온다면 당장 불러서 목을 베어 버리리라!”
항우는 워낙 성품이 불같이 급하고 우직한 사람인 지라 앞뒤를 가릴 새도 없이 길길이 분노하였다.
그러자 대장 용저가 간곡히 간한다.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누군가의 모략으로 퍼뜨린 말이 분명하오니 믿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범증 군사께서 폐하에게 원한을 품고 계실 리가 만무하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그대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가? 범증이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면,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전시에는 적이 이간책(離間策)으로 그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일이 흔히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범증 군사를 끝까지 믿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듣고서야 반신반의하며 분이 풀렸다.

그러나 한번 의심을 품고 나니 그때부터는 범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형양성을 공략하는 일만은 단독으로 결행하기로 하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단독으로 출정하였다.

그리하여 형양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밤낮 사흘 동안이나 무지무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성안에 칩거해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일체의 반응이 없으니 적들은 이미 도망쳐 버리고 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모두들 성벽을 기어 올라가 성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이다!”
초군들이 기다란 사다리와 밧줄을 성벽에 걸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틈에 한나라 군사들이 나타나 성벽을 기어오르던 초군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펄펄 끓는 물을 퍼붓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 보니 초군은 크게 당황하여 그때부터는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크게 노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성벽을 타고 넘어라!”
하고 불호령을 내리니 거머리 같은 초군의 끈질긴 공격이 계속되자 장량이 한왕에게 품한다.

“초군의 공격이 자심하여 끝까지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으니 임시방편으로 사신을 보내 항우에게 화친(和親)을 제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항우는 화의(和議)를 수락할 것 같으니 그때 가서 진평의 ‘반간지계(反間之計)’를 다시 한 번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한왕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에 잠겨 있자, 장량이 다시 간한다.

“병서에 이르기를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란 말이 있사옵니다. 이것은 전시에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법이옵니다. 이번만은 항우에게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여 위기를 넘기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우리가 화친을 제의해도 항우가 들어주지 아니하면 어떡하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항우가 성품은 포악하여도 결단성은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친을 제의하면 고민하는 듯하다가 결국에는 들어 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해 봅시다.”
그리하여 변설에 능한 수하가 왕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향하여 항우를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그 옛날 한왕은 폐하와 함께 회왕(懷王)의 명을 받아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고, 동서로 나누어 진(秦)나라를 정벌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 한왕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중왕(褒中王)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고향이 하도 그리워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지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한왕이 이미 관중(關中)을 얻었으므로 소원이 성취된 셈입니다. 그러하니 이제부터는 형양성을 경계로 동쪽은 초나라가 서쪽은 한나라가 각각 통치하여 피차간에 부귀를 오래도록 다 같이 누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두 분께서는 과거에 형제의 의까지 맺으신 사이인 관계로 이 문제도 역시 형제의 의리로써 해결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고개를 몇 번이고 기울이다 대답한다.

“그렇다면 한신이 지금 나의 예하국(隸下國)인 연(燕)나라를 점령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하고 묻자, 수하가 다시 대답한다.

“폐하께서 화친을 수락만 하시면, 한신 장군을 즉시 연나라에서 철수시키겠습니다.”
항우는 대답을 아니 하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범증을 불러 물어본다.

“한왕이 수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이번에는 일단 화친에 응해 주었다가 후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연후에 유방을 다시 쳤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부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범증이 대번에 머리를 흔든다.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저들은 형양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화친을 제의해 온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형양성을 철저히 때려 부숴야 합니다.
이번에 형양성만 때려 부수면 그 후에는 한신이 100만 대군을 몰고 와도 맥을 못 추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수하의 감언(甘言)에 속아 대사를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범증은 워낙 지략이 출중한 모사인지라 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정확하였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크게 흔들렸다.
그리하여 수하를 다시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직 화친에 응할 결심이 서지 않았으니 대부는 일단 돌아가서 하회를 기다려 주시오.”
항우는 수하를 돌려보내고 나서 형양성을 본격적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하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군사상의 비밀입니다만, 한왕께서 화친이 성립될 줄로 알고 연나라에 주둔 중인 한신 장군에게 긴급히 철수하라는 군령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신 장군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불원간에 형양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내심 적잖이 놀라 끝까지 싸우려던 결심이 크게 흔들려서

“가부간에 내가 사신을 보내기로 하겠으니 그리 알고 일단 돌아가 주시오.”
하고 말했다.

사람을 보내 한왕이 주둔하고 있는 형양성 내의 허실을 정확히 알아보고 나서 최후의 판단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하가 형양성으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교섭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니 진평은 크게 기뻐하며 한왕에게 아뢴다.

“항우가 사신을 보낸다고 했다니 우리로서는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사옵니다. 만약 사신이 오면 우리는 그자를 이용하여 항우와 범증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아야 합니다.
초나라에서 범증 한 사람만 제거해 버리면 항우를 거꾸러뜨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항우와 범증 사이를 어떻게 갈라놓겠다는 말씀이오?”
“장량 선생과 저에게 절묘한 복안(腹案)이 있사오니 그 점은 염려치 마시옵고 저희들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옆에 앉아 있던 장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 제 12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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