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7화
2021. 7. 9. 07:11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7화
☞ 범증(范增)의 절명(絶命)
한편, 항우는 형양성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수하가 다녀간 뒤 사흘 째 되는 날 사신을 보냈는데, 그는 우자기(虞子期)라는 사람이었다.
변설가나 모사를 보내기보다는 장수인 우자기를 보내 적의 군세(軍勢)를 살펴보게 하려는 항우의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우자기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형양성을 찾아와 한왕을 만나려고 하니 장량과 진평 등이 몸소 마중을 나와 융숭하게 접대하면서,
“대왕께서는 어제 과음(過飮)하신 관계로 아직 잠자리에 계시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하며, 우자기를 매우 호화스러운 객사(客舍)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점심상이 나오는데, 음식은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한 성찬이었고, 음식을 담은 그릇조차도 금배옥완(金杯玉碗) 뿐이었다.
장량과 진평은 우자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융숭하게 공대(恭待)하면서
“범증 아부께서는 무양(無恙)하시옵니까? 범증 아부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귀공을 이처럼 일부러 보내시더이까?”
하고 계획적으로 엉뚱한 말을 물어보았다.
우자기는 장량과 진평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고 내심 크게 놀랐다.
자기는 초패왕이 보낸 사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량과 진평은 자기를 범증이 보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해서 우자기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면 범증은 소문처럼 아무도 모르게 이들과 내통이라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러한 의심을 품으며, 자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범증 아부가 보낸 사람이 아니고, 항왕 폐하께서 보내신 특명 사신(特命使臣)입니다.”
장량과 진평은 그 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는 빛을 보인다.
“그러면 당신은 범증 아부께서 보내신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란 말이오?”
그리고 이내 심부름꾼을 부르더니,
“이 사람은 범증 군사께서 보낸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니 이 방에 모실 게 아니라 바깥사랑으로 데려가도록 하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자기는 마지못해 바깥 사랑방으로 쫓겨 나왔다.
바깥사랑은 조금 전에 있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가재도구도 형편없이 허술했다.
게다가 바깥 사랑방으로 우자기를 쫓아내고 난 장량과 진평은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음... 이제 알고 보니 범증과 한왕 간에는 내통 관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우자기는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수하가 찾아오더니 말한다.
“대왕께서 이제야 기침하셨소이다. 나와 함께 입궐하여 대왕을 알현하기로 합시다.”
우자기는 수하를 따라 입궐하여 접견실(接見室)로 들어왔다.
접견실에는 책이 여러 천 권이 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서류도 많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왕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수하는 우자기를 의자에 앉혀 놓고 나서
“대왕께서는 지금 세수를 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내가 대왕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우자기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훔쳐보았다.
그중에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서한이 한 통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항우는 지금 팽성을 비워 놓은 채 형양성을 취하려고 원정길에 올랐는데, 병력은 1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천명을 거역한 사람이니 머지않아 한군(漢軍)에 의해 패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한왕께서는 항복하지 마시고, 한신 장군을 급히 불러다가 형양성을 끝까지 수호하도록 하시옵소서. 노신(老臣)과 종이매 장군은 이곳에서 끝까지 대왕을 도와드릴 것이옵니다.
참, 지난번에 보내주신 황금(黃金)은 잘 받았습니다. 대왕께서 통일성업을 완수하시거든 이 늙은 신하를 고향의 후백으로나 봉해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우자기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 범증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소문도 있으려니와, 장량과 진평이 자기를 대해 주던 태도의 변화 등으로 미루어볼 때 범증이 한왕과 내통하고 있다는 심증을 충분히 굳힐 수 있었다.
‘범증이라는 늙은이가 이렇게도 음흉한 놈이라면 절대로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우자기는 범증을 처단할 물적 증거로 삼기 위해 문제의 편지를 가슴속에 훔쳐 넣었다.
이윽고 수하가 한왕을 모시고 들어왔다.
한왕은 수인사를 받고, 우자기에게 말한다.
“그 옛날 항왕과 내가 의제의 명을 받고 진나라로 쳐들어갈 때, 의제께서는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봉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소. 그런데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은 나였건만, 항왕은 관중왕의 자리를 나에게서 빼앗고, 나를 파촉으로 쫓아버렸소.
그리하여 나는 부모와 고향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여 부득이 군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오. 그리고 이제 관중 땅을 점령함으로써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므로 피차간에 화친을 도모하려는 것이오. 공은 이런 나의 뜻을 항왕에게 솔직히 전해주시오.”
“항왕 폐하께서도 대왕의 뜻을 충분히 짐작하시고 저를 사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사흘 안에 반드시 항왕 폐하를 찾아오셔서 그 뜻을 직접 품고해 주시옵소서.”
“나의 참모들과 상의하여 사흘 후에 항왕을 만나러 갈 테니, 공은 먼저 돌아가 그 뜻을 전해주시오.”
우자기는 초진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항우에게 문제의 편지를 내보이며,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음은 이 편지 한 통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사옵니다.”
하고 장량과 진평에게 설움당한 사실까지 소상하게 보고하였다.
항우는 그 서한을 읽어 보고 부들부들 떨며,
“범증이란 늙은이를 당장 불러다가 이실직고하도록 사정없이 고문하라!”
하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졸지에 범증이 어전으로 끌려나왔고, 본인을 모함하는 편지의 내용을 추궁 당하자, 사태의 전말을 깨닫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아뢴다.
“평생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폐하를 보필해 온 이 몸이 어찌 이심(異心)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이 편지는 장량과 진평이 신을 죽여 없애기 위해 조작한 모략이오니, 폐하께서는 속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그런 변명으로 의심이 풀릴 항우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변명은 그만 늘어놓아라. 우자기 장군이 형양성에서 이 편지를 직접 훔쳐왔는데, 이것을 어찌 장량과 진평의 모략이라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이냐?”
항우는 워낙 의심이 많은 성품인지라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닫고, 범증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의심을 하시면 굳이 변명은 아니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의 공로가 적지 않았사오니, 여생을 고향에서 지낼 수 있도록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늙은 신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아무리 포악한 항우도 70 고령의 범증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일말의 측은감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범증은 노구(老軀)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해 온 충신이 아니었던가?
항우는 범증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대의 마지막 소원이 그러하다면,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리다.”
하고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었다.
그렇게 범증은 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면하고 고향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범증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등창(背瘡)이 나서 육신조차 고통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등창이 열흘쯤 계속되자, 못 견디게 아프고 쑤셔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러 할진데 세상만사가 모두 헛것으로만 보였다.
범증은 참고 견디다 못해 아들을 불렀다.
“여기서 동쪽으로 3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에 들어가면, 토굴 속에 양진인(楊眞人)이라는 백발노인이 계실 것이다. 그 어른은 나에게 도(道)를 깨우쳐 주신 은사일 뿐 아니라, 어떤 병이라도 잘 고치는 천하의 명의(名醫)이시기도 하다. 너는 지금 곧 그 어른을 찾아가서 내가 등창으로 고생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좋은 약을 구해 오도록 하여라.”
범증의 아들은 부친의 말을 듣고 와우산으로 ‘양진인’을 찾아갔다.
과연 와우산 어떤 토굴에는 족히 100세가 넘어 보이는 호호백발의 양진인 노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범증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고하고, 부친이 등창으로 극심한 고생 중인 증상을 자세히 말하고 나서
“가친의 등창이 속히 쾌유되도록 좋은 약을 지어 주옵소서.”
하고 간곡하게 말하자, 양진인 노인은 대뜸 고개를 흔들며 냉혹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범증을 위해 약을 지어 줄 수 없노라. 그 옛날 범증이 나에게 도를 배운 것은 사실이나, 범증은 내가 가르친 정도(正道)보다는 밀모(密謀)와 기계(奇計)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기에 범증이 하산할 때에 나는 ‘부디 명군(明君)을 택하여 정도의 길을 걸어가라.’고 신신당부를 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당부를 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증은 항우 같은 암군(暗君)을 섬기다가 결국에는 몸까지 망치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런 자의 병을 고쳐 줄 수가 있겠느냐? 범증이 지금 등창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리신 천벌인 줄로 알고 있으라고 전해라.”
양진인 노인이 그렇게 나오니 범증의 아들은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범증의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양진인 노인의 말을 사실대로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범증은 너무도 슬퍼하다가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려져 죽고 말았다.
때는 대한(大漢) 4년 4월 범증의 나이 71세였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한초(漢楚)의 정국 투쟁에서 일익을 담당하였던 큰 별이 지고 말았으니 항우는 그 소식을 듣고 목을 놓아 울었고, 한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 제 12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