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28화
2021. 7. 11. 07:19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8화
☞ 진평의 고육계(苦肉計)
항우는 범증이 결백했음을 사후(死後)에서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아! 나는 장량과 진평의 반간지계에 속아서 둘도 없는 충신을 잃었구나!”
하고 며칠 동안이나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아무리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항우는 여러 날 동안 비통에 잠겨 있다가 하루는 종이매를 불러 말한다.
“나는 범증 아부와 함께 그대를 의심해 왔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은 이제 깨끗이 지워졌으니 그대는 새로운 각오로 나를 도와주기 바라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폐하를 섬기는데 어찌 두 마음이 있을 수 있으오리까. 지난번에 우자기 장군이 훔쳐 온 편지는 진평과 장량이 교묘하게 조작한 반간지계였던 것이옵니다.”
“나도 이제는 모든 것을 명백히 알았노라. 그러므로 유방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혀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형양성에 있는 유방을 철저히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항우는 즉석에서 항백을 군사(軍師)로 삼았다.
그리고 전군을 총동원하여 형양성 정복의 길에 올랐다.
한편, 한왕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하여 중신회의를 긴급 소집하였다.
“항우가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전군을 총동원하여 쳐들어오는 모양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의 지금 병력으로는 그들과 대적하기에 절대 부족한 데다 한신 장군도 북방 정벌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우리 측 장수와 병력으로는 항우를 당해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구려.”
장수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이 없자, 장량이 조용히 입을 연다.
“범증이 우리의 계략으로 죽었기 때문에 항왕은 매우 격분하여 형양성을 대번에 함락시키려고 덤벼 올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적은 팽성에서 군량도 많이 수송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군량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만약 형양성을 포위하고 나서 형양강(滎陽江)에 둑을 쌓고 물을 가두어 두었다 일시에 터뜨려 버리는 수공법(水功法)을 쓰게 되면,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손을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으니 대왕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런 다음 진평을 바라보며,
“진 대부는 어떤 신출귀몰한 묘책이 없겠소이까?”
하고 물었다.
“묘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묘책을 쓰게 되면, 형양성을 적에게 일시에 빼앗기지는 않고 대왕께서 무사히 피신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다만, 우리네 장수들 중에서 대왕을 위해 그만한 묘책을 실천해 옮겨줄 용장이 과연 있을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진평의 말이 끝나자, 모든 장수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그것은 진평의 말이 모든 장수들을 겁쟁이로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장수들은 한결같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중 대장 주발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선생은 어찌하여 저희 장수들을 이처럼 업신여기는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희들은 오늘날까지 주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해 왔사옵고, 앞으로도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선생께서 어떤 묘책을 쓰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들은 주공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감당해 낼 각오가 되어 있사오니 묘책을 이 자리에서 밝혀주소서.”
진평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장군들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계시다니 나로서는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묘책은 비밀을 요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모두 공개할 수 없는 것을 양해하시오.”
그리고 진평이 한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로 무언가 수군거리니 한왕이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 지면서
“참으로 기가 막힌 묘안이오. 장량 선생과 상의하여 그 계책을 꼭 쓰도록 합시다.”
하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장량은 진평과 단둘이 마주 앉아 문제의 묘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러면서 장량이 말한다.
“이 계책을 실천에 옮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수들의 사기를 크게 돋우어 놓을 필요가 있겠소. 오늘 밤에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의하여 내일 실천에 옮기도록 합시다.”
다음날 장량은 느닷없이 주연(酒宴)을 성대하게 베풀고, 모든 장수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청하였다.
그리고 주연이 벌어지는 석상에는 한 채의 수레와 그 수레를 추격하는 수백 명의 무장 군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귀인(貴人)인 듯한 사람 하나가 수레에서 내려 우거진 숲으로 쫓겨 가는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장수들이 그림을 감상하다가 장량에게 물었다.
“자방 선생! 이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그림이옵니까?”
장량이 대답한다.
“이 그림은 그 옛날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이 진(晉)나라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단신(單身)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오. 뒤에서 맹렬하게 추격하는 군사들은 모두가 진나라 군사들이지요.”
“그러면 경공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시에 경공은 꼼짝없이 적에게 붙잡혀 죽을 판이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난데없는 어떤 촌부(村夫)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경공더러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사오니 대왕께서는 소인과 옷을 바꿔 입으시고, 빨리 숲속으로 도망을 가십시오. 이 수레는 소인이 어의(御衣)를 갈아입고 대왕을 대신하여 몰고 가겠습니다.’하고 말하더란 거예요.”
장수들은 장량의 이야기에 흥미가 진진하여
“그래서 제경공은 옷을 갈아입고 무사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며, 눈을 반짝이면서 장량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량은 장수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일부러 약간 뜸을 들였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나라 경공은 우리 대왕님처럼 매우 인자하신 어른이셨소. 이처럼 인자하신 어른이 어찌 자기가 살려고 남을 대신 죽으라고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제경공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기를 거절하셨지요.”
그러자 장수들이 모두들 혀를 차면서
“저런, 저런... 그러면 제경공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셨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자,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런 것은 아니요. 제경공이 옷 바꿔 입기를 거절하자, 촌부는 화를 내면서 ‘소인 하나 죽는 것은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오나, 대왕께서 돌아가시면 나라가 망할 것이 아니옵니까? 이런 판국에 무엇을 주저하시옵니까?’하고 말하며 옷을 억지로 갈아입혀서 경공을 숲속으로 쫓아 보내고, 자기는 수레를 유유히 몰아 나갔다는 것이오.”
“그야말로 이름 없는 의사(義士)였군요. 그러면 그 촌부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까?”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 촌부는 당연히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역시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옛말에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이라 하더니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죽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살길이 트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해야 하겠지요.”
장수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눈들이 휘둥그레지며,
“아니, 제경공을 대신해서 어의를 입고 수레를 몰고 가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났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어 하니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진나라 군사들은 촌부를 제경공으로 알고 그를 생포하여 진왕(晉王)에게 끌고 갔는데, 진왕은 그 촌부가 가짜 제경공인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당장 목을 베어 죽이라.’고 했더랍니다. 그러자 그 촌부가 진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임금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니 죽음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소. 그러나 임금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을 죽인다면, 그런 충신을 함부로 죽인 어리석은 진왕을 위해 장차 위기에서 누가 대신 목숨을 바칠 것이오? 왕께서는 그 점을 각별히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했더니, 진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결국은 그 촌부를 죽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는 것이오. 이 그림은 그때 제경공이 쫓기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장수들은 장량의 말을 듣고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다시 묻는다.
“그러면 그 촌부는 제나라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 아니옵니까?”
“물론이지요. 그 후에 제경공은 진나라를 평정하는 대업을 완수하고 난 뒤 그 촌부를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해 왔다오.”
장량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새삼스럽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 촌부와 같은 충신이 꼭 필요하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은 장량의 말을 듣고 분연히 입을 모아 이구동성으로 맹세하듯 말한다.
“이름 없는 촌부조차 임금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알았거늘, 하물며 대왕의 중록(重祿)을 받아오고 있는 저희들이 어찌 대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오리까? 선생께서 분부만 내려주시면 저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왕전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여러 장군들께서 한결같이 그와 같은 충심(忠心)을 가지고 계시니 이 나라의 장래는 매우 믿음직스럽소이다. 그러나 여러 장군들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금 몰려오는 초군에게 우리는 언제 패망할지 모르는 상황이오.
목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으로 적에게 ‘위장 투항(僞裝投降)’ 전술을 써보는 길밖에 없겠는데, 그 전술을 쓰려면 용모가 대왕과 흡사한 용장이 한 사람 있어야 하오. 여러 장군들 중에 혹시 그런 사람이 없겠소?”
장량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장 기신(紀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외친다.
“그런 일이라면 소장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소장의 얼굴과 용모가 용안(龍顔)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임무라면 누구보다도 소장이 적임일 것이옵니다.”
장량과 진평이 기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기신은 왕과 용모가 헷갈릴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장량이 크게 기뻐하며 기신을 곧 대궐로 데리고 들어가 한왕에게 기신으로 하여금 위장 투항하게 할 것을 품고하였다.
- 제 12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