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21화
2021. 7. 3. 07:05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1화
☞ 장군 왕릉의 용맹(勇猛)
초패왕 항우가 팽성에 머무르고 있는 어느 날 첩자가 달려와 항우에게 급히 아뢴다.
“폐하! 지금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쳐들어가 위왕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옵니다.”
“뭐야? 한신이 위나라에 가 있다고? 그러면 형양성은 지금 비어 있을 것이 아니냐?”
형양성으로 쳐들어갈 기회는 바로 이때다 싶어 항우는 즉석에서 범증을 불렀다.
“한신이 위나라로 원정을 갔다니 우리는 이 기회에 형양성으로 쳐들어가 유방을 생포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가 신속히 손을 쓴다면 유방을 생포하기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한신은 워낙 용의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에 원정을 떠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놓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하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대장 용저(龍沮)가 말한다.
“주상께서 직접 출정하신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다고 아부께서는 그런 걱정을 하시옵니까?”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일을 도모할 때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는 법이오.”
항우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대장 이봉선(李奉仙)에게 3천 군사를 주어 선봉 부대로 삼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후진이 되어 형양성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한왕은 항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한신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항우가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장량이 대답한다.
“한신 장군이 떠나기 전에 말한 대로 왕릉 장군으로 하여금 막아 내게 하면 될 것이옵니다.”
한왕은 왕릉을 급히 불러 군령을 내린다.
“지금 초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으니, 장군이 급히 나가 저들을 막아 주시오.”
왕릉은 주저하는 빛을 보이며 한왕에게 아뢴다.
“초패왕의 군세가 워낙 막강하여 무력으로 저들과 맞서게 되면, 우리 쪽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오니, 정면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저들이 쉽게 접근해 올 수 없도록 개울을 깊게 파놓고 시간을 끌면서 비책을 쓰게 되면, 저들은 도망을 가게 될 것이옵니다.”
“비책이란 어떤 계략을 말하는 것이오?”
“비밀이 누설되면 안 되므로 대왕 전하께만 아뢰옵겠사옵니다.”
그리고 왕릉은 한왕의 귓전에 입을 갖다 대고 무엇인가 비밀을 속삭여 주자,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왕릉에게 말했다.
“장군이 그런 비책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러면 진평을 군사로 임명할 테니 크게 승리를 거두어 주기 바라오.”
한편, 초군 선봉장 이봉선은 3천 군사를 몰고 형양성으로 먼저 달려왔으나, 성은 사대문이 굳게 닫힌 채 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웬일일까?’
선봉장 이봉선이 항우에게 아뢴다.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적은 모두 겁에 질려 도망을 쳐버린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항우가 신중을 기하며 말한다.
“우리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모두들 지쳐 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적정(敵情)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자.”
이리하여 초군은 저마다 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왕릉은 그날 밤 먼 길을 달려온 적들이 피곤에 지쳐 잠들기를 기다려 동서남북 사방에 마른 풀을 여러 군데 쌓아 놓고, 한밤중에 야습을 감행할 준비를 착착 진행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5백 명의 돌격대에게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씌우고, 옷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혀 손에는 횃불과 단도 하나씩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야말로 ‘붉은 도깨비’ 형상을 갖추도록 시킨 것이었다.
이런 태세가 갖춰지자, 이번에는 대장 하후영에게 군령을 내린다.
“잠시 후에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면 우리의 ‘붉은 도깨비 부대’는 적진 속으로 총돌격을 감행할 것이오. 그러면 적들은 처음 보게 되는 ‘붉은 도깨비’의 내습에 크게 당황하여 모두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니, 하후영 장군은 그때를 놓치지 말고 3만 군사로써 도망하는 적들을 모두 베어 버리시오.”
초나라 군사들은 이같이 무시무시한 야습이 준비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두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있었다.
잠시 후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손에 횃불을 밝혀 든 5백여 명의 ‘붉은 도깨비 부대’가 괴성과 함께 전고를 울리며 초군 진지의 한복판으로 밀려들어 가니, 잠 속에 빠져 있었던 초병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바빴다.
“이게 웬 난데없는 날 도깨비들이냐?”
붉은 도깨비에 놀란 초군이 정신없이 도망을 치며 그런 소리를 외쳐댔다.
실상 도깨비 부대는 5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초군 병사들의 눈에는 1만이 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대부대였다.
초병들이 어둠 속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후영의 부대가 도망가는 초병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장검으로 베어 죽이니 들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붉은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중군(中軍)에서 자고 있던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무장을 갖추고 달려와 보니, 한 사람의 적장이 도깨비 부대의 선두에서 종횡무진하며 아군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크게 분노하여 장검을 휘두르며 적장을 향하여 비호같이 달려갔다.
“이놈아! 싸우려거든 어디 나에게 덤벼 보거라!”
항우는 적장을 한칼에 찔러 죽일 요량으로 고함을 지르며 번개처럼 돌진해 갔다.
그러나 적장은 항우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적장은 번개처럼 덤벼오는 항우의 공격을 옆으로 살짝 비키더니 오히려 반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장수들은 항우 앞에서 독수리에게 쫓기는 병아리처럼 맥을 추지 못했으나 지금 항우와 겨루고 있는 적장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항우가 아무리 질풍같이 덤벼도 ‘붉은 도깨비 부대’의 대장은 그때마다 몸을 가볍게 피하면서 날카롭게 반격을 가해 오곤 하였다.
항우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이번에는 장여(丈餘)의 철퇴(鐵槌)를 바람개비처럼 휘둘러댔다.
아무려니 ‘도깨비 대장’도 그것만은 당해 낼 수가 없었던지 그제야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위신이 손상된 것에 크게 분노하여 적장을 얼마간 쫓아가다가 추격을 멈추고 부하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나에게 덤벼들다가 도망간 적장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그는 다름 아닌 한장(漢將) 왕릉(王陵)이옵니다.”
“뭐야? 그자가 바로 내가 평소 유인해 오고 싶어 했던 왕릉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쫓아가서 그자를 붙잡아 와야만 하겠다.”
항우는 진작부터 왕릉의 고명을 들었던 터인지라 그를 자기 부하로 삼고 싶어 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라도 왕릉을 붙잡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계포, 종이매, 용저 등 모든 장수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만류한다.
“폐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폐하께서 직접 잡아오지 않으셔도 왕릉을 제 발로 걸어오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략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왕릉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아 두고 있사옵니다. 왕릉은 누구보다도 효성이 극진한 사람이오니, 왕릉의 어머니를 이 자리에 끌어다 놓고 죽이려고 하면, 왕릉은 꼼짝없이 제 발로 달려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왕릉을 붙잡아 두게 되면 형양성도 우리 손에 쉽게 함락시킬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계략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과연 명안 중의 명안이로다. 그러면 사람을 급히 보내 왕릉의 어미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라!”
항우의 명령에 의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데려오려고 비마가 팽성으로 급히 달려갔다.
한편, 왕릉이 ‘도깨비 부대’의 야습으로 커다란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니, 한왕은 원문까지 마중을 나와 왕릉의 손을 잡으며 치하한다.
“장군은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격파했으니 그 전공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간밤에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오나, 항우가 아직 물러간 것은 아니오니 우리는 금후의 대책을 긴급히 세워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쟝량과 진평이 함께 나서며 한왕에게 아뢴다.
“한신 장군이 위나라를 평정했다고는 하오나, 그쪽 사정이 복잡하여 속히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는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한신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 지키기만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옳게 여겨 공격을 회피하고, 수비 위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항우는 형양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오히려 이 편에서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사 하나가 왕릉에게 달려와 아뢴다.
- 제 12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