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19화
2021. 7. 1. 07:1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9화
☞ 위표의 배신(背信)
항우가 구사일생으로 팽성으로 돌아와 병력을 점검해 보니, 출정 당시에는 30만이었던 군사가 지금은 20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항우는 범증을 불러 상의한다.
“아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출정했다가 병력 손실이 너무 많아 미안하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설욕은 반드시 해야 하겠는데, 아부께서는 무슨 묘책이 없소?”
항우는 한신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었던 것이다.
범증은 오랫동안 생각해보다 고개를 들며 대답한다.
“서위왕 위표가 우리를 배반하고 한왕에게 귀순을 했으나 지난번 싸움에서 대패한 뒤에 대장군 지위를 박탈당하고, 지금은 고향에 돌아가 근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위표는 고향에 돌아가 있으면서도 한왕에게 별도의 처벌을 받지 않을까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니, 차제에 우리가 그자를 교묘하게 이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우리를 배반하고 돌아선 자를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씀이오?”
“변절하는 소질을 타고난 자는 필요에 따라 몇 번이고 변절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해(利害)로써 잘만 구워삶으면 위표가 우리 쪽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위표가 우리한테로 되돌아오면, 우리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다는 말씀이오?”
“위표가 우리에게 되돌아오면, 한신은 크게 분노하여 몸소 군사를 일으켜 위표를 치려고 출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주력 부대가 빠진 형양성을 쉽게 점령하실 수가 있게 되옵니다.
또 형양성을 우리 손에 넣게 되면 한왕이 무슨 재주로써 멸망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항우는 범증의 계략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것참 기막힌 계략이오. 그렇다면 위표를 설득하러 누구를 보내야 좋겠소?”
“글쎄올시다. 누가 적임자일지는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서령(尙書令) 항백(項伯)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저의 지인 중에 관상가(觀相家)로 이름난 허부(許負)라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허부와 위표는 서로의 명망(名望)을 아는 사이이므로 허부를 잘만 이용하면 될 것인데, 마침 허부가 지금 형양성에 머무르고 있으니 제가 허부에게 편지를 보내 위표를 설득하도록 부탁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고, 범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런 좋은 사람이 있다면, 상서령께서 그 사람에게 위표를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범증과 항백은 의논한 끝에 관상가 허부에게 밀서를 보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상가 허부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허부는 일찍이 한왕이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참패를 당하고 밤도망을 치다 어느 산중에서 ‘척희(戚姬)’라는 산골 처녀와 하룻밤 깊은 인연을 맺은 일이 있었다.
허부는 그 처녀를 보고 ‘너는 장차 고귀하기 짝 없는 귀부인이 되리라.’하고 예언했던 관상가가 바로 허부였던 것이다.
어쨌건 허부는 항백의 밀서를 받아 보고, 매우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항백이 나에게 매우 어려운 부탁을 해왔구나. 항백의 부탁을 거절했다가는 장차 항우에게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 위표의 설득은 되든 안 되든 한번 시도는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허부는 위표를 직접 찾아가자, 위표는 허부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선생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소이다.”
“소생에게 무슨 일을 물어보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요즘 들어 나 자신의 처신 문제로 몹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오. 그러니 선생이 나의 관상을 보아 앞으로의 길흉(吉凶)을 판단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허부는 그 말을 듣고 위표를 설득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되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상을 보아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러면 지금 곧 보아드리겠습니다.”
허부는 위표를 햇볕 잘 드는 대청으로 데리고 나와 이모저모로 위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허부가 보니 위표의 얼굴에는 황기(黃氣, 누른 기)가 농후하게 감돌고 있는데다 한줄기 살기(殺氣)조차 뻗쳐 있어서 어디로 보아도 앞으로가 매우 불리한 관상이었다.
이에 허부는 혼자 생각하였다.
‘내가 만약 위표에게 불길한 관상을 곧이곧대로 말해주면, 위표는 항우에게 협력하기를 깨끗이 단념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항우에게 경을 치게 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허부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에라 모르겠다. 위표의 운명이야 어찌 되든 간에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하는 생각을 굳히고, 위표에게 머리를 수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기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좋으십니다. 얼굴에 전에 없던 귀기(貴氣)가 충만한 것으로 보아, 석 달 이내에 길지(吉地)로 옮겨 가시면 반드시 구오지위(九五之位: 천자의 자리)에 오르실 대길상(大吉相)이시옵니다.”
말할 것도 없는 허부의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나 위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하하하, 만약 선생께서 말씀하신대로 된다면, 선생의 은공은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허부는 어차피 거짓말을 하는 판이라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기상은 틀림없이 제위(帝位)에 오르실 운수입니다. 그러나 자고로 부부일신(夫婦一身)이라 하였으니 왕후의 운수가 어떠하신지 이왕이면 왕후의 관상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위표는 즉석에서 무릎을 치며,
“말씀이 맞소!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 그러면 지금 안으로 들어가 내 마누라의 관상도 한 번 보아주시오.”
허부는 내전으로 들어가 위표의 마누라 관상을 이모저모 뜯어보다가 별안간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왕후마마의 운수는 대왕마마보다도 더욱 대길하시겠습니다. 왕후마마는 조만간 황후마마로 불리게 되실 것이옵니다.”
위표는 어쩔 줄을 모르도록 기뻐하며 허부에게 물었다
“제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글쎄올시다. 소생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사오나, 초패왕과 결탁하여 한왕을 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싶사옵니다.”
허부는 위표에게 차마 변절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초패왕과 결탁을? 음~~ 여하튼 그 일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오. 아무튼 관상을 잘 봐주셔서 고맙소이다.”
위표는 허부에게 많은 복채(卜債)를 주어 돌려보내고, 이번에는 대부 주숙(周叔)을 불러 상의한다.
“일찍이 한왕이 나를 대장군으로 발탁하여 초나라를 치게 했지만, 내가 전쟁에서 패하자 대장군의 지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쫓아 보냈소. 전쟁에서의 일승일패는 병가의 상사이건만, 한 번쯤 실패하였다고 나를 가혹하게 내버렸으니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오.
근자에는 한신이 초나라와 싸워서 승리를 하는 바람에 나의 신세가 더욱 초라하게 되어 버렸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기회에 차라리 초패왕과 다시 협력하여 함양을 빼앗고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가지면 어떻겠소?”
위표는 허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어코 천자가 되어 보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나 주숙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대왕의 말씀은 잘못된 생각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워낙 덕이 높아 만백성들이 그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한신 장군 역시 귀신같은 명장이어서 우리 힘으로 그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초패왕도 불가능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주공께서는 한왕을 일편단심으로 섬겨나가는 것이 최상의 길인 줄로 아뢰옵니다.”
주숙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언이었다.
그러나 ‘천자’의 욕심에 부풀어 오른 위표의 귀에는 그 말이 달갑게 들릴 턱이 없었기에 즉석에서 주숙을 나무란다.
“대부는 매사에 너무 소극적인 것이 큰 결점이오. 대장부에게는 천명(天命)이란 것이 따로 있는 법이오. 관상가 허부는 내가 머지않아 천자가 될 것이라고 확언하였소. 천자가 되려면 무엇인가 혁명적인 일을 만들어 성취하여야 하지 않겠소? 내가 지금처럼 한왕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면 어떻게 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단 말이오?”
주숙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자가 되려면 덕이 높고, 경륜도 풍부하고, 실력은 물론 막강한 군사력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준비가 일천한 현실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관상쟁이의 말만 덮어놓고 믿고 천자가 되려고 덤비는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였다.
“대왕께서는 무엇인가 잘못 판단하고 계시는 듯싶습니다. 자고로 ‘천명’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옵고, 모든 운명은 현실과 결부하여 생기고 변하는 것이옵니다. 공연히 관상쟁이의 망언(妄言)을 믿으시고 군사를 함부로 일으키시는 것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패가망신(敗家亡身)하기 쉬운 법이니 거듭 통찰하시옵소서.”
“나는 지금 대망(大望)을 품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논하는 판인데, 대부는 요망스럽게도 무슨 불길한 망언을 지껄이고 있는 게요. 그러고 보면 대부는 한왕과 내통하여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구려.”
주숙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 대왕의 은총을 입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찌 대왕을 배반할 수 있으오리까. 신은 오직 진심에서 충언을 올리고 있을 뿐이옵니다. 이점을 통찰해 주시옵고, 대왕께서 신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후일에 반드시 후회하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주숙의 이 같은 말을 듣던 위표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여봐라! 이자는 충신의 가면을 쓰고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자를 당장 끌어내어 옥에 가두어 버려라!”
하고 주숙을 즉시 하옥시켜 버렸다.
※ 註) 위표의 배신이 100% 자신에게만 있었을까?
한왕 유방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필자는 위표의 문제보다 최고 실권자인 유방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안목 부재’와 육가, 역이기, 진평 등 책사들이 이구동성 위표의 총대장 임명을 반대했음에도 그들의 충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밀어붙인 잘못 즉, 권력 남용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현실과 비교해 봐도 많은 부분 흡사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잘못으로 탄핵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항우에게 대패하고 난 뒤 그 책임을 물어 위표를 파면만 하여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전쟁의 패배는 중죄인으로 그에 상응한 조치를 하지 않자 당사자인 위표는 그 시간이 얼마나 피 말리는 불안한 시간이었을까?
전쟁의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맡은 지역을 잘 다스리라고 용서를 하든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을 하여 그 문제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면 위표가 변절할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죗값을 받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낫지 하루하루 불안한 삶은 그가 또다시 변절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재고해 볼 일이다.
우유부단하고, 변덕이 심하고, 겉보기는 깊게 믿는 듯 하지만 속으로는 의심하는 속 좁은 유방은 이로 인해 한신과의 보이지 않는 알력도 계속 된다.
이런 인물이 장량, 소하, 한신, 번쾌, 조참 등 훌륭한 참모들을 만나 거대한 중국을 통일하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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