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15화

2021. 6. 27. 07:4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5화

☞ 영포(英布)의 귀순

이렇게 수하는 비혁의 알선으로 다음 날 아침에 영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영포는 비혁을 통하여 수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지라 수하를 정중히 맞으며 묻는다.

“선생은 지금 한왕이 주둔하고 있는 형양성 내에 살고 계시다고 들었소. 그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이옵니다.”
“그렇다면 한왕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실 터인데, 한왕이 지난번 팽성 공략 때는 어찌하여 한신 장군을 기용하지 않았다가 참패를 면치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오? 그리고 또 한왕이 지금 형양성에 주둔하면서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영포는 한나라의 사정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음이 분명하였기에 수하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한다.

“저는 그 방면의 일은 잘 모르기는 하옵니다만, 한왕께서 지난번에 ‘의제의 발상’을 선포하자, 모든 제후들은 항우에게 격분하여 모두들 초나라를 치는데 적극 협력하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래서 한신 장군에게는 함양을 지키게 하고, 한왕 자신이 직접 정도에 올랐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이 막 시작될 무렵에 난데없는 ‘모함 사건’이 생겨서 한왕이 그 때문에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옵니다.”
“모함 사건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닌 영포 장군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모함이었습니다.”
“나의 명예를 땅에 떨어드리는 모함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궁금해 견딜 수가 없으니 좀 더 소상하게 말씀해 주시오.”
영포는 수하에게 성화같은 재촉을 했다.

수하는 영포가 자신의 말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하는 짐짓 분개하는 빛을 보이며 영포에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초패왕이 의제를 시해한 죄로 변방 제후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자, ‘역적’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의제를 시해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구강왕 영포 장군이었다.’라고 엉뚱한 모함을 퍼뜨렸던 것이옵니다.”
“뭐요? 의제를 시해한 사람이 항우가 아니고 나였다고요?”
“그렇습니다. 항우는 의제 시해의 책임을 장군에게 뒤집어씌웠지만, 그 효과는 놀랄만큼 지대했습니다. 한왕이 전쟁에 대패한 원인도 그런 모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한왕의 패배가 어째서 내게 대한 모함 때문이었다는 말씀이오?”
“생각해 보십시오.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이 항우인 줄로 알고, 변방 제후들이 한왕과 힘을 합해 항우를 쳐부술 계획이었는데, 의제를 시해한 사람은 항우가 아니고 구강왕 영포 장군이었다고 모략하는 바람에 변방 제후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한왕과의 협동 작전에 모두들 발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한왕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과적으로 영포 장군은 항우의 모함으로 대역 죄인의 누명을 뒤집어썼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한왕까지 대패하게 만든 셈입니다. 그것은 영명하신 장군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수하의 말을 듣자 영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음... 나에게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놈은 분명히 항우였는데... 그런데 그자가 이제 와서 모든 죄를 나에게 뒤집어 씌워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그러자 수하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만류한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 사실이 항우에게 알려지면, 그는 장군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영포는 화를 발칵 낸다.

“귀공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지난날 진황 자영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시황제의 여산릉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구강에서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나에게 내린 사람 역시 틀림없는 항우였소. 이렇게 나는 항우에게 충성을 다하느라고 차마 못할 일을 모두 감행했는데, 항우는 나를 써먹을 대로 다 써먹고 나서 이제와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모함으로 나를 매장시키려 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런 자를 그냥 내 버려둘 수 있겠소?”
수하의 술책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이어서 영포는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었다.
수하는 영포의 감정에 충격을 주기 위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장군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의제를 시해한 대역죄인’이라는 오명만은 깨끗이 씻어버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의 오명은 천추에 길이 남게 됩니다.”
영포는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항우란 놈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오. 두고 보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우를 죽여 없애고야 말 것이오.”
“항우는 워낙 용맹하기 때문에 그를 죽여 없애기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설사 항우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오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명을 깨끗이 벗어나시려면 방법을 달리하셔야 합니다.”
“의제 살해의 누명을 깨끗이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고요? 그것이 무엇이오? 선생이 방법을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어서 내게 말씀 좀 해주시오.”
그러자 수하는 깊이 생각해 보는 태도를 보이다가 머리를 조용히 들며 말한다.

“누명을 깨끗이 벗으려면, 한왕과 손을 잡고 항우를 공동으로 쳐부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왕은 ‘대역죄인 항우를 섬멸하겠다.’는 깃발을 뚜렷하게 내걸고 있으니까 한왕과 한패가 되어 항우와 싸우면 대역 죄인의 오명은 절로 벗겨지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한왕이 나하고 손을 잡으려고 할까요?”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들어 아시겠지만, 한왕은 도량이 크셔서 어떤 사람이 귀순해 와도 반갑게 맞으실 분입니다. 더구나 한왕은 평소에도 장군을 각별히 흠모해 오셨기 때문에 장군께서 찾아가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반갑게 대해 줄까요?”
“지금까지 직접 전투의 상대가 항복이나 귀순을 했어도 그들 모두를 반갑게 맞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도 결심이 서신다면 제가 한왕께 장군의 뜻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귀공이 나의 뜻을 한왕께 꼭 좀 전해 주시오. 나는 한왕을 도와서 항우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이렇게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할 결심을 굳혔을 바로 그때 항우로부터 뜻하지 않은 조서(詔書)가 날아왔다. 항우가 보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구강왕 영포 장군은 보시오.
장군은 근자에 일신상의 안일만 도모하면서 내가 제나라를 치는데 지원병을 보내주지도 않았고, 유방이 팽성을 점령하여 전투를 치를 때도 출병을 하지 않았으니 그 무슨 심사요? 그대는 자신의 무용(武勇)만 믿고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지키지 않으니 이는 분명히 반역 행위요. 나는 이제부터 모든 군사들을 규합하여 유방을 쳐 없앨 생각이니, 이번에는 지원병을 보내도록 하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각별히 유의하시오.“

그야말로 오만스럽기 짝이 없는 으름장이었다.
영포는 항우의 조서를 읽어 보고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즉석에서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울부짖듯 외쳤다.

“나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버린 자가 무슨 낯짝으로 이런 으름장을 놓는단 말인가? 여봐라!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당장에 능지처참시켜라.”
항우의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린 영포는 모사 비혁을 불러 부탁한다.

“나는 이제부터 수하 선생과 함께 형양성으로 가서 한왕에게 귀순할 생각이오. 공은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수일 안으로 형양성으로 오도록 하오.”
결국 항우의 조서는 영포의 귀순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영포는 수하와 함께 형양성으로 한왕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한왕은 영포가 귀순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 밖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 주었다.

“용명(勇名)을 천하에 떨치는 영포 장군께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려. 오늘의 이 우정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이 함께 대전(大殿)으로 올라오니 그 자리에는 장량, 진평 같은 중신들이 영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포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잠시 후에 벌어진 환영연에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영포가 환영연에 참석한 중신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명을 받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중신과 대부들 간에 웃으며 주고받는 대화가 마치 친구처럼 화기애애한 것이었다.

‘한왕이 인후하신 군주임은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군신지간에도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화기애애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과연 한왕이 이런 성군이라면 누구라도 한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영포는 귀순해 온 것을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한왕에게 새삼스럽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구강성에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사온데, 모든 군사를 오늘로써 대왕 전하께 바치고, 대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싶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구강성의 성주를 친히 임명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팽월 장군을 구강 성주로 임명하여 초나라 군사들의 군량 수송로를 막아내도록 합시다.”
한편, 항우는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며 당장 군사를 일으켜 구강성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군사 범증이 간한다.

“영포쯤 배반했기로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옵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 삼진을 탈환한 뒤에 함양까지 밀고 올라가면 한왕과 한신인들 어쩔 것이옵니까? 함양만 점령하고 나면 제후들은 절로 머리를 숙이고 모여 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그도 그럴 성싶어 그의 말을 쫓기로 하였다.

- 제 116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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