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12화

2021. 6. 24. 07:49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2화

☞ 유방의 대패(大敗)

한편, 초나라 왕후(王后) 우미인은 아버지 우자기와 함께 밤도망을 쳐 닷새 동안이나 고생한 끝에 남편이 있는 제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남편 항우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팽월 장군이 변절하여 팽성을 한왕에게 내주는 바람에 국가의 모든 재물과 군사들을 고스란히 한왕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신첩은 그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밤도망을 쳐왔사오니 폐하께서는 이 원한을 신속히 풀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우미인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유방이라는 필부가 감히 팽성을 점령하였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내 당장 달려가 유방을 생포하리라.”
항우는 용저(龍狙)와 종이말(鍾離昧) 두 장수를 불러

“나는 팽성으로 가서 유방을 생포해 버릴 것이니, 그대들은 제나라를 계속하여 공격하라.”
하고 명한 뒤 3만 군사들을 거느리고 밤낮을 잊고 팽성으로 달려가 30리쯤 떨어진 강변에 진을 치고, 유방에게 다음과 같은 선전 포고문을 보냈다.

“나 초패왕은 유방에게 이르노니, 그대를 한왕으로 봉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대는 파촉에서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편안하게 지냈으면 그만일 텐데, 이제 무슨 욕심에서 관중을 점령하고 여기까지 침범해 왔느냐? 그대가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돌아가지 아니한다면, 나는 싸움을 크게 벌여 그대의 목을 내 손으로 쳐버리고야 말겠다. 겁이 나거든 당장 물러나거나, 자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싸우러 나오라.”
유방은 항우의 선전 포고문을 읽어 보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회신을 항우에게 보냈다.

“나는 영토가 탐이 나서 초나라를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을 하늘을 대신하여 벌하러 왔을 뿐이다. 하늘의 그물눈이 아무리 성글다 하더라도 죄인을 결코 놓쳐 버리지 않는 법이니, 그대가 스스로 물러가지 않을 진데, 반드시 패망하게 될 것을 각오하라.”
한왕은 회신을 보내고 나서 이미 귀순해 온 장수들을 긴급 소집하여 항우의 공격에 대한 철통같은 방비책을 세워 명령하였다.

제1진은 은왕 사마공, 제2진은 낙양왕 신양, 제3진은 상산왕 장이, 제4진은 한왕 자신이 지휘하고, 제5진은 총대장 위표가 사마흔, 동예, 유택 등과 함께 팽성 본진을 사수할 것.

이렇게 군사를 정비한 다음, 한왕은 팽성으로부터 10리 밖으로 나와 진을 치고, 항우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항우는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좌우에 용봉일월기(龍鳳日月旗)를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몰려왔다.

그 위세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항우가 선두로 달려 나오며 노기 충천한 어조로 한나라 진영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필부 유방은 속히 나와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로다.”
항우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중에 10척 장검을 휘둘러대는데, 바람을 가르는 칼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제1진인 사마공이 장검을 휘두르며 마주 달려 나갔다.
항우는 사마공을 보자, 큰소리로 꾸짖는다.

“사마공은 듣거라. 나는 너를 은왕에 봉해 주었거늘, 너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를 배반하고 유방의 편이 되었느냐?”
“나는 의제를 위해 대역 죄인을 벌하러 나왔을 뿐이다. 대역 죄인의 입에서 배반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항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마공에게 질풍같이 덤벼들었다.

사마공은 10여 합쯤 싸우다가 항우를 도저히 당해 낼 길이 없어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항우가 맹렬히 추격하는데, 항우가 타고 있는 말은 ‘오추’라는 천하의 명마인지라, 단박에 사마공을 따라잡아 한칼에 사마공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제2진인 신양이 달려 나가 싸움을 가로막았다.
항우는 또다시 신양을 큰소리로 나무란다.

“나는 너를 낙양왕에 봉해 주었거늘, 너는 무슨 이유로 나를 배반하고 유방에게로 돌아섰느냐?”
“한왕은 그대와 달리 성품이 관후하시어 한왕을 받드는 사람은 이미 나만이 아니다. 천하의 인심이 이미 한왕에게 집중되었으니, 그대도 투구를 벗어 던지고 속히 항복하라. 곱게 항복하면 초왕으로서의 지위만은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항우는 분통이 터져 올라서 맹수같이 신양에게 덤벼들자, 신양은 요리조리 항우를 피해 다니며 계속 놀려댔다.

“나는 너를 위해 충고를 했거늘, 너는 아직까지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덤벼 오느냐? 그러고서 언제 철이 들겠느냐?”
신양이 항우와 20여 합을 겨루며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쫓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3진 대장, 장이가 달려 나가 싸움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용맹이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쫓겨 가는 신양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린다.
장이는 그 광경을 보자 감히 싸울 용기가 없어 말머리를 돌려 제풀에 쫓기기 시작하였다.

“이놈아! 네가 가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과연 항우는 천하무적의 맹장(猛將)이었다.

항우가 장이를 급히 추격하다 보니 멀리서 수많은 정기(旌旗)를 앞세우고, 군고(軍鼓)를 요란스럽게 울리며 이쪽을 향하여 행군해 오는 군사들이 있었다.

항우가 추격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한왕 유방이 수많은 장수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그 광경을 보자 분노로 전신이 떨려와 한왕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 나가며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역적 유방은 듣거라. 일찍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 불과하던 너를 한왕으로 봉해준 사람은 내가 아니었더냐! 네가 지난날의 은혜를 저버리고 여기까지 침범해 왔으니,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용기가 있거든 당장 싸워서 결판을 내자. 그만한 용기가 없거든 투구를 벗어 던지고 내게 곱게 항복하여라.”
항우의 언동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한왕은 의연히 맞서며 항우에게 꾸짖듯이 말한다.

“그대는 필부의 만용을 믿고 큰소리를 그만 치거라. 대역 죄인이 어찌 감히 천병의 위세를 꺾을 수 있단 말이냐?”
항우는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한 손에는 방천극(方天戟)을 휘어잡고, 한 손으로는 용천검(龍泉劒)을 휘두르며 유방을 향해 덤벼오는데, 그 위세는 마치 100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덤벼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이쪽에서는 번쾌, 주발, 시무, 근흠, 노관 등 맹호 같은 대장들이 한왕을 호위하며 동서 사방에서 제각기 덤벼 나오니, 제아무리 귀신같은 항우도 혼자서는 당해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좌충우돌하며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초군 측에서도 항장, 계포, 환초, 우자기 등의 대장들이 휘몰아쳐 나와 양군 대장들은 천지가 진동하는 혼전을 벌였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기를 무려 30여 합, 마침내 번쾌 등이 힘에 부쳐서 쫓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후진에 있던 위표가 용맹스럽게 달려 나온다.
항우는 위표를 보자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이 괘씸한 반역자야. 네 놈이 무슨 낯짝으로 나에게 덤벼드느냐?”
그러자 위표가 큰소리로 꾸짖듯이 대꾸한다.

“그대야말로 은의(恩義)를 배반하고 의제를 시해한 후 한왕을 좌천시키지 않았느냐? 또한 그뿐 아니라 그대는 시황제의 황릉을 파헤쳐 금은보화를 가로챘고, 진나라의 죄 없는 군사들을 20만이나 생매장해 버리지 않았느냐? 세상 사람들은 그대를 원수로 알고 있거늘, 그대야말로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나타났느냐? 한 푼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거든 당장 물러가거라!”
항우에 대한 위표의 매도는 차마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신랄하였다.

항우는 위표에게 배반당한 것만으로도 절통할 판인데, 온갖 악담까지 퍼부어 오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장창을 휘두르며 덤벼드니 위표도 장창으로 맞서오는 것이었다.

위표도 무술이 넉넉한 장수인지라, 두 사람은 20여 합이 넘도록 겨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는 장창을 내던지고 길이가 20척이나 되는 무쇠 채찍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위표는 무쇠 채찍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한나라 군사들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후퇴를 시작하자 항우의 군사들이 한나라 군사들의 덜미를 눌러와 창으로 찌르고, 장검으로 후려갈기니 한나라 군사들의 시체가 잠깐 사이에 산을 이루었고, 그들이 흘린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전투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한왕은 눈물을 머금고 팽성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군사들을 잃고 함양을 향해 쫓겨 가고 있노라니 유택이 뒤에서 급히 따라오며,

“사마흔과 동예가 항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태공(太公) 내외분을 비롯하여 여 왕후(王后)와 두 분 왕자도 모두 항우에게 포로가 되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나의 가족들이 모두 항우에게 붙잡혔다고?”
한왕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그는 싸우러 나올 때 자기 일가족을 팽성을 지키게 하였던 사마흔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사마흔이 항우에게 항복을 하면서 한왕의 일가족을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니 한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아아, 장량 선생과 한신 장군이 그토록 만류하더니만, 나는 고집스럽게 팽성으로 왔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그분들을 만날 것이냐?”
그러나 후회란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되씹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한왕이 비탄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홀연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초나라 군사들이 동서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한왕의 주변에는 그를 호위하는 병사가 불과 2, 3백 기였으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초군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천 명에 달하지 않는가!
졸지에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어 버린 한왕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우러러 합장하며,

“아아, 하늘이시여! 이 어리석은 유방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하고 축원을 올렸다.

한왕이 하늘을 향하여 똑같은 축원을 세 번 올리고 나니 이 무슨 난데없는 기적일까?
지금까지 멀쩡하던 하늘에 별안간 검은 구름이 일더니, 일진광풍이 무섭게 불기 시작하며, 폭우가 억수로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폭풍우와 함께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집을 것만 같이 사나워 초나라 군사들이 혼비백산하며 저 멀리 숲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한왕이 폭풍우를 이용하여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고 단숨에 20여 리 가량 도망쳐 나오자, 그제야 날씨가 멀쩡하게 개었다.

‘아아,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한왕은 하늘을 향하여 감사를 올리며, 다시 앞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개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항우는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독 안에 든 쥐를 그냥 놓쳐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추격을 다시 개시하라!”
그러자 군사 범증도 옆에서 격려하며 말한다.

“한왕이 도망을 가도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회에 그를 기필코 생포하여 후환을 깨끗이 없애야 한다. 상금을 후하게 줄 테니 누구든지 한왕을 반드시 생포해 오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대장 정공(丁公)과 옹치(雍齒)가 다시 3천 병력을 거느리고 한왕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한왕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를 가다 보니 초장 정공이 어느새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길이 없었다.
한왕은 도망가기를 체념하고 뒤로 돌아서서 정공을 마주 보며 이런 말을 해보았다.

“장군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옛날부터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반드시 도와준다.’고 하였소. 장군이 만약 나를 도망가게 내버려 주기만 하면, 나는 후일에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이오. 그러나 장군이 포악무도한 항우를 돕기 위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장군 손에 곱게 죽을 것이오.”
한왕으로서는 궁여지책이었다.

죽음을 피할 길이 없을 때는 오줌이 약이 되기도 하거니와 되는대로 해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공은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별안간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띠어 보이며,

“천하의 영웅인 한왕을 구태여 내 손으로 생포할 생각은 없소이다. 눈을 감아 줄 테니 빨리 도망을 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 11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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