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13화

2021. 6. 25. 08:4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3화

☞ 유방, 도망 중에 척(戚)부인을 만나다.

한왕이 크게 안도하며 말을 급히 달려 다시 도망가기 시작하니 정공은 천천히 뒤를 쫓아오며 허공을 향해 연신 화살을 쏘아 갈기고 있었다.
잠시 후 옹치 장군이 달려와서

“한왕이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장군은 보셨지요?”
하고 묻자, 정공이 대답한다.

“한왕을 쫓아가며 화살을 연방 쏘아댔지만, 그자가 어찌나 빨리 달아나는지 결국은 놓쳐버리고 말았소이다.”
그러자 옹치가 화를 내며 말한다.

“에이, 여보시오. 한왕을 발견했다가 놓쳐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니 함께 추격합시다.”
한왕은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적은 또다시 맹렬하게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추격을 해오는 적의 대장은 정공이 아니고, 이번에는 옹치 장군이었는데, 한왕은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해서 말을 내버리고 길가에 있는 우물 속으로 숨어 버렸다.

적병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한왕은 우물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밖으로 나왔으나 이제는 바람이 차고 배가 고파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숨을 곳을 찾아야만 하겠기에 캄캄한 산속을 천방지축으로 얼마를 가다 보니 저 멀리 산 밑에 등잔불을 켜놓은 오막살이가 한 채가 보였다.

“주인장 계십니까?”
한왕이 덮어놓고 그 집 앞으로 다가가 주인을 부르니

“뉘시오?”
하고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80 노인이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찾아 왔사옵니다.”
하고 한왕이 공손히 말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밖으로 나오며,
“어서 들어오시지요. 길이 몹시 저무셨군요.”
하며 안으로 인도하다가 한왕이 입고 있는 황금 전포(黃金戰袍)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라며,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왕공(王公)이시옵기에 이렇듯 길이 저무셨습니까?”
하고 묻자, 한왕은 노인의 태도와 언동이 믿을만하다고 여겨

“사실인즉, 나는 한왕 유방올시다. 팽성에서 항우에게 대패하여 여기까지 피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고 사실대로 솔직히 말해 주었다.

노인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인덕이 높으신 대왕의 용안을 이렇게 지척에서 뵈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승일패(一勝一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옵는데, 귀하신 몸으로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고초가 얼마나 많으셨사옵니까?”
그리고 부엌으로 내려가 저녁상을 정성껏 차려와 주니 한왕은 저녁밥을 먹으며 주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노인이 대답한다.

“저는 척씨(戚氏) 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마을에는 6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사온데, 모두가 척씨인 관계로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척가장(戚家庄)이라 부르옵니다.”
“혼자 사시는 것을 보니 아드님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아들은 없사옵고, 올해 열여덟 살 된 딸이 하나 있을 뿐이옵니다. 지금 뒷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곧 불러내어 대왕전에 인사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척 노인이 무남독녀를 불러내어 한왕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그 얼굴과 몸매가 천하일색이었다.

“허어... 노인장의 따님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구려.”
한왕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얼굴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산중에 허부(許負)라는 명관상가(名觀相家)가 있사온데,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아이라고 하옵니다. 천만다행으로 대왕께서 오늘 소생의 집에 오셨사온데, 이 일은 결코 우연한 인연이 아니옵니다. 대왕께서는 하늘이 정해주신 인연으로 아시옵고, 오늘 밤 이 아이를 친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왕은 워낙 색을 좋아하는 고로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흐뭇하였으나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지금 싸움에 패하고 도망을 가는 길이오. 그런 내가 어찌 젊은 여인의 장래를 약속할 수 있으리오?”
“하늘이 정해주신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는 끊지 못하는 법이옵니다. 그러하니 이 아이는 오늘 밤 대왕에게 맡기겠사옵니다.”
척 노인이 어린 딸을 억지로 떠맡기는 바람에 한왕은 마지 못하는 척하고, 그날 밤 주인집 처녀와 깊은 인연을 맺고 말았다.

다음날 한왕은 새벽같이 일어나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척 노인이 한왕의 손을 붙잡으며 말한다.

“제가 나이가 많아 대왕을 다시는 뵈옵기 어려울 것 같으니 며칠만 더 묵어가시옵소서.”
한왕이 대답한다.

“내가 싸움에 대패하는 바람에 모든 장수들과 뿔뿔이 흩어져 버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못 됩니다. 뒷수습이 끝나는 대로 사람을 보내 어르신과 따님을 모셔가겠소이다.”
노인은 한왕의 사정을 알게 되자, 굳이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왕이 척희(戚姬) 부녀와 작별하고 얼마를 가다 보니 한 떼의 군사들이 급히 쫓아오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하후영’이었다.
한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아니, 장군은 팽성에서 전사한 줄 알았는데, 여긴 어쩐 일이오?”
“그러잖아도 팽성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간신히 탈출하여 낙오된 군사를 수습해서 대왕의 아드님 두 분까지 구출해 가지고 왔사오니 기뻐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후영은 마상에서 왕자 형제를 내려놓으니 한왕은 어린 아들 형제를 부둥켜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너희들 형제가 살아 돌아와서 기쁘다마는 너희들의 조부모님과 어머니는 어찌 되었느냐?”
이렇듯 탄식을 하는 한왕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여 일행은 다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한왕이 하후영과 함께 얼마를 가다 보니 저 멀리 전방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이쪽을 향하여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것은 또 어떤 군사들이냐?”
하후영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휘날리는 깃발은 모두 붉은 깃발로 선두의 깃발에는 ‘파초 대원수 한신’이라는 대장기가 아닌가?
하후영이 한왕에게 고한다.

“대왕 전하! 한신 장군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 가 봅니다.”
한왕이 크게 기뻐하며 마주 달려가니 장량과 진평이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왕 전하께서 행방불명이 되셨다 하기에 전하를 찾기 위해서 달려나오는 길이옵니다.”
“오오, 군사께서 나를 찾기 위해 몸소 여기까지 나와 주셨구려. 한신 장군은 어디 계시오?”
“함양을 지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옵기에 한신 장군은 함양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고, 신과 진평만이 나왔사옵니다.”
“그렇다면 한신 장군의 대장기는 어찌된 일이오?”
“초나라 군사들은 한신 장군의 깃발만 보아도 겁을 내기에 임기응변으로 한신 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왔사옵니다.”
장량이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발한 묘안이었으니 한왕은 장량의 지략에 새삼 감탄하면서 말한다.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선생의 만류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의 어리석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오.”
“황공하옵게도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최후에는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것이오니 일시적인 실패를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위표 같은 못난 위인을 총대장으로 발탁한 죄로 이렇게 된 것이라오.”
“이미 지나간 일은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마시옵소서. 신에게 깊은 계략이 있사오니 머지않아 오늘의 원한을 깨끗이 갚아 줄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일행이 길을 재촉하여 형양성(滎陽城)으로 찾아가자, 성주 한일휴(韓日休)가 성문을 활짝 열어 한왕과 장량을 반갑게 영접한다.

이렇게 한왕을 비롯한 일행들이 피곤한 몸을 형양성에서 며칠을 쉬고 있노라니, 그 사이에 번쾌와 주발 그리고 왕릉을 비롯하여 위표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한왕은 이로써 옛날의 진용을 다시 갖춰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왕은 위표의 총대장 직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그를 쫓아 보내고야 말았다.

버림받은 위표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 것인가?
필요하면 부르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유방의 새가슴이 불러올 앞으로의 일들이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데...

요즘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타산지석이라고 했나!

- 제 11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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