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16화
2021. 6. 28. 06:5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6화
☞ 장량의 계략
영포가 귀순해 온 바로 그날 밤 한왕은 장량을 불러 조용히 말한다.
“우리가 영포를 귀순시키는데 성공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온지 시원스럽게 말씀하시옵소서.”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한신 장군에 관한 문제요. 지난번에 팽성으로 출정할 때 한신 장군이 그토록 만류하는 것을 내가 고집스럽게 출정을 감행했더니, 한신 장군은 그 일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지 아직까지도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있소이다. 혹시나 한신 장군이 엉뚱한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 한왕 유방의 의심병과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유방의 질투는 결국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한 후에 한신을 토사구팽(兎死狗烹)하게 된다.
필요할 때는 간이라도 내줄 듯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도 쓸모가 없다 싶으면 내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일지다. 그렇지 않으면 유능한 그가 자신의 자리를 넘볼까 겁나는 것이다.
똑똑한 한신은 끝까지 충성을 다 하지만 끝내 죽게 되고, 더 똑똑한 장량은 와병을 핑계로 초야에 묻혀 지내다 자신의 수를 다 채우고 죽는다.
이 또한 운명일 것이다.
사실 한왕은 한신의 태도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전공이 혁혁했던 한신을 까닭 없이 대원수의 직책에서 해임하여 함양에 눌러앉게 한 것도 후회스러웠지만, 한신이 그 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한신의 태도에 대해서는 장량도 약간의 의아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량은 한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한신 장군의 문제는 별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소하 승상께서 때마침 군량미를 수송하는 문제로 지금 함양에 와 계시다고 하니 신이 승상을 만나 뵙고, 한신 장군의 문제도 의논해 볼 겸 내일쯤 함양에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함양에서 돌아올 때는 한신 장군도 함께 와서 대왕을 배알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 날 장량은 형양성을 떠나 함양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함양에 도착하는 대로 승상부에서 소하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지나가는 말처럼 소하에게 물었다.
“한신 장군을 본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한신 장군도 잘 계시옵니까?”
“한신 장군은 대원수의 직책에서 해임당하고 나서 매우 울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 원수는 나에게 말하기를 삼진을 격파하고 함양을 공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건만, 주상께서는 자기를 해임하고 보잘 것 없는 위표(魏豹)를 총사령관으로 위촉했다고 대 불평이었습니다. 더구나 주공께서 팽성 전투에서 참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일체 두문불출할 뿐만 아니라, 내가 찾아가도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짐작컨대, 한신 장군은 주공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사과의 말씀을 들려주시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군신지의(君臣之誼)에 벗어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가도 만나 주지 않을까요?”
“모르기는 하지만, 선생이 가셔도 만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음! 한신 장군의 감정이 몹시 상한 모양이군요.”
장량은 눈을 감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만약 한신이 배반을 한다면 천하통일의 대업은 이루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한왕이 한신을 찾아가 사과를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군신지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주종(主從)이 바뀌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던가!’
장량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대책을 강구해보다 마침내 묘책(妙策) 하나를 생각해 내고, 심복 부하들을 불러 방문(榜文) 넉 장을 써주면서
“이 방문을 함양성 사대문(四大門)에 한 장씩 붙여라.”
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이 팽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관중(關中)의 모든 봉토(封土)를 항왕에게 반납하기로 하였다.”
사대문에 이런 방문이 나붙자,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 마침내 한신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신은 그 소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그는 얼마 후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측근에게 말했다.
“그 방문은 장량 선생이 나를 움직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써 붙인 허위 방문일 것이다. 한왕이 아무리 대패하였기로 애써 점령한 관중의 땅을 항우에게 고스란히 내줄 리가 없지 않겠느냐?”
과연 한신의 추측은 명철하기가 이를 데 없자, 측근이 대답한다.
“성안의 공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원수께서는 너무 방심하지 마시옵소서.”
마침 그때 누군가 대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승상부의 특명으로 가가호호(家家戶戶) 호구조사(戶口調査)를 다니는 중이옵니다. 댁에는 식구가 몇 사람이나 되시옵니까?”
“승상부에서 무슨 일로 급작스럽게 호구조사를 한다는 말인가?”
“잘 모르기는 하옵니다만,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왕께서 지난번 팽성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태공(太公) 내외분과 여 왕후(呂王后)를 항우에게 빼앗겼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한왕께서 몹시 고민을 하시다가 일가족을 돌려받는 대가로 그동안 점령하였던 관중의 봉토를 모두 초패왕에게 되돌려 주기로 하셨답니다. 그래서 장량 선생이 한왕의 명을 받고 함양성 안의 인구조사를 하려고 지금 승상부에 와 계시다고 합니다. 아마 호구조사는 초패왕에게 보낼 현황서의 일부인 모양인데, 소생은 그 때문에 호구조사를 나온 것이옵니다.”
조사원의 말을 들어 보면, 사대문에 나붙은 방문은 노상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나라의 위급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나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칩거해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신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승상부로 말을 달려갔다.
이에 장량은 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소하 승상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한신 장군이 자진하여 이리로 온다니 우리들의 계획이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나는 잠시 뒷방으로 피해 있을 테니 승상께서 먼저 한신 장군을 만나도록 하소서.”
장량이 뒷방으로 숨어 버린 뒤에 소하는 한신을 반갑게 맞아들여 말한다.
“내가 그동안 장군을 여러 차례 찾아갔건만, 장군이 나를 만나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주상이 저를 버리셨으니 제가 무슨 면목으로 승상을 만나 뵐 수 있으오리까? 모든 일이 부끄럽기만 하여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주상께서 장군을 버리고 위표를 총대장으로 등용하셨다가 팽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셨는데, 그것은 주상의 잘못이지 장군의 잘못은 아니지 않소? 그런데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다는 말씀이시오?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주상이지 장군은 아니오.”
“승상의 말씀을 듣고 보니 많은 위안이 되옵니다. 그런데 떠도는 소문을 듣자니 주상께서 관중의 봉토를 항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기 위해 장량 선생을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모두가 사실이오. 주상이 팽성 대전에서 참패하실 때 불행하게도 태공 내외분과 왕후까지 항우의 손에 포로가 되어 버리셨소. 그래서 주상은 관중의 봉토를 돌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들을 돌려받고 싶어 하시오. 모든 장수들은 봉토와 대왕의 가족을 바꿀 것이 아니라, 항우를 무력으로 때려 부수고 태공과 왕후를 우리 손으로 구출해 오자고 주장하지만, 장량 선생만은 반대를 하고 계시지요.”
“장량 선생이 반대를 하신다구요? 대왕의 일가족을 우리 힘으로 빼앗아 오는 것이 뭐가 마땅치 않아 많은 물자와 병사를 희생하며 애써 점령한 귀중한 관중 봉토와 바꿔치기를 한다는 것입니까?”
소하가 다시금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장군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장량 선생은 본시가 한(韓)나라 사람이오. 그가 자신의 부귀만 누리면 그만이지 뭐가 답답해서 싸우려고 하겠소. 그러니 장량 선생이 항복을 강력히 권고하면서 이미 초나라에 우리가 이번에 점령한 봉토와 한왕 일가족을 교환하기로 통보하고, 지금은 초나라에 알려줄 인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곳에 와 계시오. 나도 달갑지는 않지만 왕명이니 어쩔 수가 없어 이러고 있는 중입니다.”
소하는 장량과의 사전 논의대로 모든 잘못을 장량에게 돌려 버렸다.
그 말을 들은 한신의 얼굴은 매우 착잡하였다.
한신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심사숙고하다 문득 얼굴을 들며 결연히 말했다.
“승상 각하!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점령한 관중의 봉토를 항우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태공 내외분과 여 왕후께서 포로가 되셨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무력으로 쳐들어가면 얼마든지 구출해 올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사태가 복잡해지면 항우가 태공과 왕후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기에 그러는 것이오. 주상은 그런 점을 염려하셔서 관중 봉토와 바꿔치기를 하시려는 것이라오.”
“항우는 성품이 워낙 포악하여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범증은 사려가 무척 깊은 사람인 관계로 태공과 왕후를 죽이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관중 봉토와 교환할 생각은 일단 단념하시고, 우리 힘으로 태공을 구출해 올 계획을 논의하십시다. 만약 지금이라도 저를 초나라로 쳐들어가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기필코 태공과 왕후를 탈환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승상께서는 속히 허락을 내려 주소서.”
뒷방에서 엿듣고 있던 장량은 너무도 기뻐 한신 앞으로 달려 나와 그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장군의 의지는 정말 대단하오. 나는 장군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써 왔소.”
한신은 그제야 이 모든 것이 장량의 계략이었음을 알아채고 장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선생의 깊으신 계략에는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장군이나 나나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니오! 항우는 세력이 워낙 강대하기 때문에 장군이 쳐들어가도 승리를 거두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오. 까딱 잘못하다가는 팽성의 대패를 되풀이할 뿐이지 태공과 왕후를 구출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란 말이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장량에게 항의한다.
“지난날 저를 대원수로 추천해 주신 분은 바로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저를 그처럼 가볍게 보시옵니까? 지금 항우의 세력이 강대하다고는 하지만 항우 자신만 강대할 뿐 그의 부하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어서 소장은 그들을 호되게 밀어붙여 대번에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사옵니다.”
“원수는 초군을 무척 가볍게 보고 계시는 듯하오. 그러나 범증이라는 사람은 신출귀몰한 지략을 가지고 있는 모사인 데다 용저와 종리말 같은 명장도 있으니 어찌 그들을 혼자서 당해 낼 수 있겠소?”
한신은 그 말에 형용하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껴 발끈하며 장량을 나무라듯 말한다.
“자방 선생! 제가 만약 용저와 종리말을 쳐부수고 범증을 생포해 오지 못하거든 선생이 저의 목을 베어 주소서. 그래도 저는 원망을 아니 하겠습니다.”
장량이 그 말을 듣고 소하에게 묻는다.
“한신 장군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승상께서는 한 장군의 출정을 허락하심이 좋을 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왕명을 받들고 함양의 인구를 조사하러 왔는데, 그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신이 얼른 대답을 가로맡는다.
“그 일은 조금도 염려 마시옵소서. 제가 선생을 모시고 형양성으로 가서 대왕을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초나라 사신이 와 있다면, 그자의 목부터 베어 버리겠습니다.”
소하가 그 말을 듣고 손을 흔든다.
“사태가 복잡한 이 판국에 초나라 사신을 죽여 버리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것이오. 그보다도 사대문에 나붙어 있는 방문부터 빨리 떼어버리기로 합시다.”
소하는 관리들을 시켜 사대문에 나붙은 방문을 모조리 떼어 버리자, 백성들은 한왕이 봉토 교환을 철회한 것으로 알고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 제 11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