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11화

2021. 6. 23. 07:0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1화

☞ 유방의 팽성 점령

장량과 한신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왕이 고집스럽게 대군을 발동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왕은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한 이후로 실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아니하고, 모든 전쟁을 한신에게 일임하였다.

그 덕택에 한왕 자신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영토를 놀랍도록 확장시켰고, 병력도 어느새 60만에 이르도록 불어났다.
한신의 전공이 이처럼 혁혁해짐에 따라 그의 명성도 점점 높아져 때로는 한왕의 위세를 능가하는 듯이 느껴질 때도 없지 않았다.

이에 한왕은 한신을 적당히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번만은 한신을 후방에 남겨 둔 채 한왕 자신이 직접 전쟁에서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왕의 위신을 만천하에 떨쳐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장량과 한신은 한왕의 그러한 심리를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에 시운이 불리함을 뻔히 알면서도 한왕이 직접 출전하겠다는 고집을 강력하게 만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한왕이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가다가 진류(陳留)를 지날 때 장량이 한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 전하! 일찍이 항우의 손에 돌아가신 한왕(韓王)의 손자인 희신(姬信)이라는 분이 여기서 멀지 않은 산중에 살고 계시옵니다. 제가 그분을 찾아뵙고 인사를 여쭙고 싶사오니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한왕의 후손이 이 부근에 살고 계셨던가요? 그렇다면 며칠 동안 인사를 다녀오도록 하시오. 그냥 만나고만 오실 것이 아니라, 한왕의 일가족 중에 유능한 인재가 있거든 진류왕(陳留王)에 봉하여 한왕의 후손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리고 선생이 안 계시면 내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것 같으니 인사를 여쭙고 나거든 되도록 빨리 돌아와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신이 길을 떠나기 전에 대왕 전하께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
“이번에는 한신 장군이 같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삼군을 지휘할 총대장을 새로 임명하셔야 하옵니다. 그러므로 육가, 역이기, 진평 등의 의견을 물으시어 총대장을 속히 임명하도록 하시옵소서.”
“알겠소이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선생은 빨리 다녀오도록 하시오.”
장량이 길을 떠나가자, 한왕은 한신을 대신할 총대장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신을 대신하여 누구를 총대장으로 임명하느냐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팽성 공략에 참여한 대장들은 많았지만 제각기 특성이 달았다.

때문에 이번과 같은 공략에 적절한 대장감을 물색하는 데는 전반적인 면을 고려해야 했다.
한왕은 며칠을 두고 혼자 궁리를 하다가 하루는 육가와 역이기, 진평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한신 장군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팽성 공격에 총대장을 새로 임명해야 하겠소. 총대장이란 최고 지휘관인 까닭에 인망과 지혜가 출중한 사람이어야 하겠는데, 서위왕(西魏王)으로 있다가 귀순한 위표(魏豹)를 총대장으로 임명하면 어떻겠소?”
그러자 육가가 대번에 반대하고 나온다.

“위표는 풍채도 좋고 언변이 능하기는 하오나, 진실성이 부족하여 총사령관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역이기 노인도 뒤를 이어 아뢴다.

“장량 선생께서는 평소에도 위표를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위표는 다른 장수들과의 융화(融和)가 좋지 않아 최고 사령관의 중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한왕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평에게 묻는다.

“대부는 위표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오?”
진평이 대답한다.

“위표는 잔재주는 있어도 큰 그릇은 못 되는 사람이옵니다.”
왕은 자기가 천거한 위표가 세 사람에게 여지없이 무시당하는 바람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천거한 사람을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기에는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만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리하여 한왕은 세 사람에게 이렇게 단언하였다.

“세 분은 위표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위표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는 위나라의 당당한 왕손으로서 덕망도 매우 높은 사람이오. 한신 장군과는 출신부터가 다른 인물이니 나는 위표를 이번 팽성 공략에 총대장으로 임명하겠소.”
한왕이 이토록 고집스럽게 나오니 세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한왕은 즉석에서 위표를 불러 총대장에 임명하며 사령장(辭令狀)과 함께 대장기(大將旗)를 하사하니 위표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한왕에게 아뢴다.

“신 위표는 대왕 전하께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옵니다.”
위표가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장수들은 크게 실망하며,

“평소에는 그토록 영명하시던 대왕께서 이번만은 어인 일로 노망을 부리실까?”
하고 저마다 한 마디씩 비난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남이야 비난을 하거나 말거나 당사자인 위표는 신바람이 나서 전군을 친히 점검한 뒤에 팽성을 향하여 출동령을 내렸다.
이윽고 팽성이 가까워 오자, 한왕은 육가를 불러 물어본다.

“항우가 지금 원정 중이어서 팽성에는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팽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가?”
“팽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는 팽월(彭越)이라 하옵니다.”
“팽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렇다면 대부는 그 장수와 일면식(一面識)이 있는가?”
“친한 사이는 아니 오나 피차간에 얼굴은 알고 있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됐네.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대부가 팽월을 찾아가 자진 항복을 하도록 권고해 주게. 이왕이면 싸우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나?”
육가는 왕명을 받들고 팽월을 찾아가 한왕의 친서를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 한왕은 팽월 장군에게 글월을 보내오.
초패왕 항우는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이오. 내가 의제의 유해를 국장으로 모시고자 그 뜻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던 바, 백성들은 애통을 금치 못하고 한결같이 상복(喪服)을 입어 주었소.
그리고 각 지방의 수령 방백들도 나의 처사에 모두 감복하여 앞으로는 나와 함께 항우의 역적 도당을 섬멸하는데 협력할 것을 자청해 오고 있는 중이오.
팽월 장군은 본시부터 의를 높게 여기고 정의를 숭상하는 명장으로 나는 알고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역적 항우에게 아직까지도 충성을 다하고 계시는지 나는 매우 괴이하게 여기는 중이었소. 그러나 장군께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항우의 무리를 섬멸하고자 의연히 일어난 우리에게 협력해 주신다면, 장군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고, 그로 인해 장군의 후손들도 명예로운 관작(官爵)을 길이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이오.
간곡히 부탁하노니 장군은 돌아오는 인편에 좋은 화답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오.
한왕 유방“

팽월은 한왕의 친서를 읽어 보고 마음이 크게 동하여 육가에게 말한다.

“한왕이 관후하신 어른이라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나 같은 말장(末將)에까지 이렇게 간곡한 사연을 보내주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나는 지금 3만의 군사로 팽성을 지키고 있는데, 한왕께서 오시기만 하면 성문을 활짝 열고 영접할 것이니, 공은 본영으로 돌아가셔서 한왕을 빨리 모시고 오도록 하시오.”
육가는 팽월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참으로 잘 생각하셨소이다. 장군이 이렇게 자진하여 항복해 주신다면, 대왕께서는 장군의 자손만대에까지 두고두고 관직을 내려 주시는 명문가로 만들어 주실 것이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대왕 전하에게 시급히 품고하여 불일 내에 대왕께서 친히 이곳에 임어하시도록 하겠소이다.”
육가가 본영으로 돌아와 팽월과의 만남을 상세히 보고하니, 한왕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말한다.

“팽성은 초나라의 도읍이 아니던가! 그런 곳을 지키고 있던 팽월 장군이 3만 군사를 고스란히 거느리고 우리에게 귀순해 온다면, 이로써 초나라는 우리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자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참 잘 되었네. 그렇다면 항우가 제나라에서 돌아오기 전에 우리가 팽성을 급히 점령해 버리세.”
그로부터 이틀 후 한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진군해 오자, 팽월은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든 막료들과 함께 땅에 엎드려 한왕을 영접하며 아뢴다.

“불초 팽월은 지금까지 의(義)와 불의(不義)를 분간할 줄을 몰라 초패왕 항우에게 충성을 다해 왔으나, 대왕께서 보내주신 친서를 받자옵고 소장의 우매(愚昧)가 깨우쳐 졌사옵나이다. 이에 소장은 이제부터 3만 군사와 함께 대왕 전하에게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결심이오니, 지금 곧 입성하시어 모든 군사와 재물을 기꺼이 접수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팽월의 손을 손수 잡아 일으키며 말한다.

“장군이 대의를 깨닫고 팽성을 자진 인도(自進引渡)해 준다니 세상에 이런 기특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내 장군의 공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이제부터 입성할 것이니 장군이 앞장 서 주시오.”
한왕은 총대장 위표와 함께 보무도 당당히 팽성으로 입성하여 창고에 가득 쌓인 재물을 모조리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팽성은 초패왕 항우가 살고 있는 초나라의 수도인지라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또한 수많은 궁궐에는 가는 곳마다 꽃다운 미녀들이 가득하였다.
위표가 한왕을 모시고 궁궐을 순회하면서 말한다.

“여기 있는 수많은 미녀들은 오늘부터 대왕 전하의 시녀들이옵니다.”
한왕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녀들을 굽어보다가 문득

“이 대궐에는 항우가 총애하는 우미인(虞美人)이라는 계집도 있을 터인데, 우미인은 어느 궁전에 있느냐?”
하고 물었다.

한왕은 ‘천하절색’이라고 일러오는 우미인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미인의 행방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우미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느 병사가 알려 주는 말에 의하면,

“우미인은 팽성을 지키고 있던 팽월 장군이 한나라에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어젯밤에 그의 아버지인 우일공(愚一公)과 함께 항우가 있는 제나라로 도망을 갔사옵니다.”
하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였다.
부하들은 한왕의 그러한 눈치를 알아채고,

“지금이라도 군사를 풀어 항우의 처, 우미인을 잡아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한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럴 것까지는 없다. 언젠가는 항우도 완전히 정복하고 말 것이니, 그때는 우미인도 내 것이 될 게 아니겠느냐?”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런가 하면 총대장 위표는 팽성을 점령한 것이 마치 자신의 공로로 여겨서 그날부터는 밤마다 술과 계집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註) 고금을 통한 깨달음

항우의 용력이 얼마나 대단한데, 알량하게 몇 번 이겼다고 간이 배 밖에 나온 유방(劉邦)!
충언을 귀 담아 들을 줄 아는 그런 위정자가 되어야 하거늘~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가 망하는 데는 자신이 최고인 양 여기는 유방 같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닐까?
거기에 자신의 능력도 모르면서 최고 권력자에 붙어 아첨으로 받은 권력을 남용하는 ‘위표’ 같은 인물이 반드시 있다.

56만이라는 쪽수만 믿고 팽성을 점령한 유방은 며칠이나 점령을 유지할 수 있을 런지?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장자방과 한신이 없었다면 중국을 통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항우의 와이프도 나중에 제 것이 될 거라는 망언을 하고, 주색이나 탐하고...
참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제 11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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