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4화
2021. 3. 18. 07:11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014화
☞ 장양왕의 죽음과 진시황의 등장
이에 신릉군은 안타깝고 괴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그때 조(趙)나라에서 급사(急使)가 평원군의 서찰을 가지고 달려왔다.
내용인즉,
“나는 신릉군(信陵君)을 신의(信義) 있는 사람으로 믿고, 나의 처제(妻弟)와 결혼까지 시켰던 것이오. 헌데 우리는 지금 진군(秦軍)에게 도성(都城)이 함락될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상황에 처해 있건만, 귀국(貴國)은 군사동맹까지 맺어놓고도 팔짱만 끼고 있으니 정의(正義)의 현사(賢士)로 일컬어오던 신릉군이 이럴 줄 몰랐소. 만약 우리가 귀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대로 망(亡)한다면 다음번에는 위(魏)나라도 우리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말 것임을 명심하기 바라오. 처음에 굳게 약속한 대로 신의를 잊지 말고, 지원군을 속히 보내주기 바라오. 마지막 부탁이오.”
신릉군은 이와 같은 편지를 읽고 나자,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대왕(大王)께서는 조나라와의 군사동맹까지 맺어놓고도 조의 위급함을 구해주려고 하시지 않으니 우리들만이라도 들고일어나 조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소? 사나이로 태어나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뜻이 있는 분은 나와 행동을 같이해 주시기 바라오.”
그러자 3천에 이르는 식객 모두가 하나같이 주먹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외친다.
“공자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저희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동을 같이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3천여 명의 식객들이 맨주먹으로 백여 대의 수레에 나눠 타고 조나라로 떠나려고 하는데, 별안간 후생 노인이 나타나더니 손을 높이 들고 출발을 막으며 말한다.
“공자(公子)께서는 출발을 멈추시고, 소생의 말씀을 잠깐만 들어주소서.”
신릉군은 초조한 마음으로 후생 노인에게 말했다.
“지금 갈 길이 바쁜데,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아무리 바쁘셔도 제 말씀은 꼭 듣고 가셔야 합니다. 공자께서는 지금 3천 명이나 되는 선비들을 데리고 가서 거의 맨주먹으로 진군과 싸우려고 하시는데, 그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맨 몸으로 뛰어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그렇다고 한 번 맺은 군사동맹을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물론 군사동맹은 지키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국경에 주둔 중인 진비 장군의 10만 군사를 공자께서 직접 이끌고 가셔서 싸우셔야 합니다.”
“진비 장군이 나에게 군사를 내어줄 리가 없지 않소?”
“대왕께서 가지고 계시는 병부(兵符)를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대왕께서는 그 병부를 침전(寢殿)에 보관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러하니 그 병부를 훔쳐서라도 진비 장군의 군사를 물려받도록 하시옵소서.”
신릉군은 후생 노인의 말을 듣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참으로 좋은 방책을 말씀하셨소이다. 그러나 대왕께서 침전에 숨겨두신 병부를 무슨 재주로 훔쳐낼 수가 있겠소이까?”
“그건 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後宮) ‘여희(如姬)’를 이용하시면 쉽게 훔쳐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공자께서 일찍이 후궁 여희의 부친 원수를 갚아 드린 일이 계셨기 때문에 공자께서 직접 부탁하시면 여희는 두 말 없이 병부(兵符)를 훔쳐 내올 것이옵니다.”
신릉군이 후생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 성 싶었다.
후궁 여희는 일찍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에게 원수를 갚지 못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알고, 신릉군이 사람을 고용해 원수를 갚아준 일이 있었다.
신릉군이 후궁 여희를 만나 부탁하니 여희는 바로 그날 밤으로 병부를 훔쳐 내왔다.
신릉군은 크게 기뻐하며 병부를 가지고 진비 장군의 주둔지로 달려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후생 노인이 만류하며 다시 말한다.
“장수가 전장(戰場)에 나가 있을 때에는 사정 여하에 따라서는 왕명(王命)에 복종하지 않아도 무방한 경우가 있사옵니다. 따라서 공자께서 진비 장군에게 병부를 내보이셔도 진비 장군이 공자에게 군사를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사태가 그렇게 되면 부득이 진비 장군의 목을 칠 수밖에 없사오니 그런 때를 대비하여 주해(朱亥)를 꼭 데리고 가시옵소서.”
“그 사람이 나를 따라가 주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공자께서 직접 찾아가 사정을 말씀하시면 반드시 따라나설 것이옵니다.”
신릉군은 후생 노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부랴부랴 푸줏간으로 주해를 찾아갔다.
주해는 마침 푸줏간에 있었다.
그러나 주해는 신릉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전히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소?”
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신릉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찾아오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주해는 신릉군의 설명을 묵묵히 듣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런 일로 오셨다면 같이 가십시다. 지금 곧 떠납시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의(義)를 위해서는 주저함이 없는 주해였던 것이었다.
주해와 함께 길을 떠나려는데, 후생 노인이 전송차 따라나선다.
“빨리 가야 하니 선생께서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후생 노인에게 작별을 고하는 신릉군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생 노인이 그 눈물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그건 두 가지 이유로 눈물이 납니다.”
“그 두 가지 이유란 무엇인지요?”
“첫째는 대왕의 뜻을 거역하는 불충(不忠) 때문이고, 둘째는 국가에 공이 많은 진비 장군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후생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실로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충성에도 대충(大忠)이 있고, 소충(小忠)이 있는 법이옵니다. 대충을 위한 소충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후일 대왕께서 공자의 높으신 뜻을 이해해주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안심하고 장도에 오르시옵소서.”
그리고 10리 밖까지 따라오다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한다.
“소생도 공자를 따라가고 싶사오나 너무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겠기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공자를 따르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사와 공자(公子)께서 진비 장군의 목을 치고 군사를 넘겨받으셨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저는 공자의 성공을 비는 마음에서 그날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후생 노인은 그 후 자기가 약속한 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였다.
신릉군은 그길로 곧장 진비 장군의 주둔지로 달려가 병부를 내보이며 군대를 물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생 노인의 예측대로 진비 장군은 군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국경을 수비하는 것은 대왕께서 저에게 부과하신 거룩한 책무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조서(詔書)도 한 장 없이 병부만 가지고 오셔서 무턱대고 군사를 내 달라고 하시니 제가 그 말씀만 믿고 어떻게 군대를 내어 드리겠습니까?”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때였다. 주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품 안에 숨겨왔던 40근 짜리 철퇴(鐵槌)를 꺼내 진비 장군을 일격에 쳐 죽여버렸다.
흡사 수양대군이 수하인 임어을운(林於乙云)을 시켜 김종서 장군을 철퇴로 쳐 죽인 것처럼.
신릉군은 진비 장군을 처치한 뒤 10만 군사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자, 모든 군사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내렸다.
“너희들 중에 부자(父子)가 같이 나온 경우 아비는 집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같이 나온 사람도 형은 돌아가고 아우는 남으라. 그리고 자신이 외아들인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도록 하라.”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10만 군사가 8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8만의 군사들은 새로 지휘관에 오른 덕장(悳將) 신릉군의 자애로운 조치에 감동되어 사기가 크게 오르게 되었다.
한편, 그 무렵 진군은 조도(趙都)인 한단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성안으로 화살과 돌 등으로 우박이 쏟아지듯 공격을 퍼부어대니 한단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신릉군이 진군의 후방을 전격적으로 기습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방(後方)의 대비가 소홀했던 진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많은 군사를 잃고 패퇴하고 말았다.
신릉군은 평원군과의 약속대로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군을 괴멸시키고 승전보를 올리게 되었다.
조왕은 신릉군과 그의 군사들을 성(城) 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이며 말했다.
“공자의 도움이 없으셨던들 우리는 지금쯤 진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평원군도 신릉군의 손을 마주잡고 눈물로 감사한다.
진군을 격퇴하고 난 후 신릉군은 데리고 온 군사들을 고국인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신릉군은 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왕명을 사칭하여 대장군 진비를 살해하고 군사를 무단으로 조나라 지원군으로 몰아 왔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고국에 돌아 갈 형편이 못되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조왕은 신릉군에게 5개 성시(城市)의 영주(領主)로 봉하여 생활을 보장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을 따라온 식객 하나가 이렇게 간한다.
“무릇 모든 일에는 잊어야 할 일과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덕은 하루속히 잊어버리셔야 할 일이옵고, 대왕의 뜻을 거역하여 진비 장군을 살해하고 군사를 빼앗아 왔던 일은 결코 잊어버리셔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잊어야 할 일에 대한 공로로 5개 성시에 영주가 되신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되옵니다.”
신릉군은 그 말에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영주로 취임할 것을 끝까지 사양하고, 오로지 병학(兵學)에만 몰두하여 몇 해가 지난 후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는 병서(兵書)를 저술하였다.
한편, 진군이 신릉군의 참전으로 여지없이 참패하고 돌아가자, 진나라에서는 차제에 신릉군을 없애 버릴 계획으로 위나라에 첩자를 대거 밀파하여 갖은 유언비어로 신릉군을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신릉군은 위왕(魏王)을 내쫓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지금 조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魏)의 제후(諸侯)들과 긴밀히 내통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이에 위왕은 크게 노(怒)하여 역적 신릉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滅)함과 동시에 그를 잡아오거나 죽여 없애는 자에게는 천만금을 주겠다는 방문(榜文)까지 써 붙였다.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괴로운 심사를 달랠 수가 없어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진나라 장양왕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조를 치는 것이 평생숙원이었기에 두 번째로 정벌군을 출정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위군의 기습으로 참패를 당한 군사들이 돌아오자 위나라에 대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즉시 승상 여불위를 비롯한 모든 장수들을 소집한 뒤 말했다.
“우리가 조를 치고 있는데, 사전에 경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가 후방에서 우리를 기습해 온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군사 20만을 줄 테니 누가 나서서 위를 격파할 것인가?”
이에 대장군 몽오(蒙鰲)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臣)이 위(魏)를 격파하여 삼가 대왕의 진노를 풀어드리겠나이다.”
몽오는 그날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위의 도성인 대량성(大梁城) 30리 밖에 진영을 구축, 일거에 쳐들어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위의 중신들은 크게 놀라 왕에게 고했다.
“적장 몽오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30리 밖에 와 있으니 군사를 속히 일으켜 적을 격퇴시켜야 합니다.”
위왕은 대경실색하며 위공(僞公)과 가공(假公)의 두 장수를 불러 명했다.
“그대들에게 군사 각 5만씩을 줄 테니 좌, 우 장군이 되어 적을 협공(協攻)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위공과 가공은 몽오 장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각 10여 합씩 싸워보다가 급히 쫓겨 돌아와 위왕에게 고했다.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사오니 성문(城門)을 굳게 걸어 잠그고, 새로운 계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위왕은 한숨을 쉬며 탄식한다.
“아아, 나라를 지켜줄 장수가 한 명도 없으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오?”
그러자 위공과 가공이 모두 품하는데,
“나라를 구출할 능력을 가진 분은 지금 조나라에 가 계신 신릉군밖에 없사옵니다. 그 어른이 진비 장군을 죽이고 군사를 빼앗아 간 것은 조나라와 맺은 군사동맹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여겨지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왕께서 친서를 보내시어 귀국을 허락하신다면 신릉군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위왕은 사정이 워낙 다급한지라 신릉군 앞으로 편지를 써주며 말한다.
“그대들은 이 편지를 직접 신릉군에게 전달하고 급히 데려오도록 힘써보시오.”
두 사람이 위왕의 친서를 가지고 조나라에 있는 신릉군을 찾아갔다.
신릉군은 왕의 친서를 읽어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조(趙)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진비 장군을 죽이고 군사를 빼앗아 왔던 사람이오. 그러나 대왕께서 나를 역적으로 몰아 나의 목에 천만금의 상금까지 걸어 놓으셨다고 하니 내가 돌아가 본들 어찌 무사할 수가 있겠소.”
신릉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렇게 신릉군이 귀국을 거절할 기색을 보이자, 모원(毛元)과 설의(薛義) 두 식객은 즉석에서 이렇게 간한다.
“공자께서 오늘날 만인에게 추앙을 받으시는 것은 국가에 충성하고 의(義)를 명예롭게 여기셨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진군이 무차별로 공격하여 우리의 도성을 점령하고 종묘사직을 불살라버린다면, 공자는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실 수가 있으오리까? 하오니 속히 귀국하셔서 나라를 구하셔야 합니다.”
신릉군은 그제서야 자신의 불찰을 깨닫고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위왕 앞에 엎드려 진심을 다해 고한다.
“신은 백 번을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사온데, 대왕께서는 지친(至親)의 정으로 용서를 내려주셔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신은 제후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기필코 격파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위왕은 아우의 손을 눈물로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현제(賢弟)를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은 나의 불민함이었소. 오늘로써 경을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니 적을 무찔러 나라를 구해주기 바라오.”
신릉군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어전을 물러 나오자, 곧 초(楚), 연(燕), 한(韓), 제(齊), 조(趙) 등 다섯 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육국연맹(六國聯盟)으로 진에게 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현명한 사공자(四公子)의 한 사람인 신릉군은 평소에 모든 나라에 신망이 두터웠던 관계로 다섯 나라에서는 각각 지원군 5만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방팔방에서 대량성을 둘러싸고 있는 진군을 공격했다.
수세에 몰린 진군 대장 몽오가 죽기를 각오하고 마주 달려 나와 싸우는데, 그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싸움이 길어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띠고 진군과 마주 싸우던 신릉군은 한 계책을 내어 젊은 병사 하나를 진군의 초마(硝馬)로 가장시켜 몽오 장군에게 달려가 품하게 했다.
“대왕께서 급서(急逝)하셔서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급히 회군하시라는 전갈이옵니다.”
하고 말하니 몽오 장군은 크게 놀라면서 사기가 갑자기 저하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합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대니 진군은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연합군은 간단한 술수 하나로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몽오가 급히 남은 군사를 이끌고 회군(回軍)하여 고국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적의 모략이 아닌가?
장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이를 갈며 분노했다.
“여섯 나라가 공동으로 덤벼 왔다면 이제부터 여섯 나라는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 나는 여섯 나라 모두를 모조리 정복하리라.”
그러나 장양왕은 그날부터 울화가 사무쳐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신릉군이 예측한 대로 왕위에 오른 지 4년 반 만에 어이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하여 후일 최초의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秦始皇),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인 태자(太子) 정(政)이 등극하니 이때 신왕(新王)의 나이는 불과 13세였다.
이제 바야흐로 진시황의 시대가 도래한다.
또한 그의 어미이자 여불위의 여인이기도 한 주희(朱姬)도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지나치게 강한 요구에 여불위는...
- 제 1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