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1화
2021. 3. 15. 08:4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1화
☞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여불위(呂不韋)
식객들에게 역사서(歷史書 : 呂氏春秋) 편찬에 대한 지침을 주고, 그들의 뒤를 보살펴주던 어느 날 여불위는 장양왕의 부름을 받는다.
“대왕 전하! 찾아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승상(丞相)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왕(王)이 신하(臣下)에게 부탁이라니! 봉건왕조 시대에 있어서는 당치 않은 말이지만, 장양왕은 일찍이 조(趙)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여불위에게 크나큰 신세를 진 일이 있었던 바, 여불위에게만큼은 일반 신하들에게 하듯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 거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하면(下命)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과인이 볼모로 잡혀가서 조왕(趙王)에게 7년 동안이나 박해를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몰라도 조나라만큼은 꼭 손을 좀 보아주어야 하겠소. 그러니 승상은 과인의 심정을 헤아려서, 조나라를 징벌해주기 바라오.”
여불위는 장양왕이 조나라에 품고 있는 한(恨)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곧 어명(御命)을 받들어 조를 치도록 하겠사옵니다.”
여불위는 물론 무장(武將)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려면 무엇인가 뚜렷한 업적을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행히 진(秦)나라에는 기라성(綺羅星) 같은 맹장(猛將)이 수두룩하였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사전에 충분히 주물러 두었던 터라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불위가 왕명을 그대로 받들 자세를 보이자, 흡족한 듯 장양왕이 물었다.
“싸우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겠지요?”
“예, 조나라를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멸망시키는 일은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성읍(城邑) 몇 십 개쯤 빼앗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한(恨)을 다소나마 풀어주면 고맙겠소이다.”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신금(宸襟)을 평안토록 해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퇴궐하는 길로 몽오(蒙鰲), 장한(章悍), 왕전(王剪) 장군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명했다.
“우리는 어명(御命)에 의해 조나라를 치게 되었소. 몽오 장군은 원수(元帥)가 되고, 장한 장군과 왕전 장군은 좌, 우익(左, 右翼) 사령관이 되어 20만 군사를 3대(隊)로 나누어 조를 치도록 하시오. 세 장군이 합심하면 승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묵직한 전축금(前祝金)을 건네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오. 하여 세 분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바이니, 합심 일치단결하여 기필코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시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자자손손(子子孫孫)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여불위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재주와 용인술(用人術)이 남달리 비상하였다.
엄할 때는 추상열일(秋霜烈日) 같다가도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는 자애(慈愛)로운 어머니 같은 살가운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지우(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승상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라며 굳은 맹세를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3대로 나뉘어 조나라를 쳐들어가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壯觀)이었다.
기마(騎馬)는 산야에 넘치고, 정기(旌旗)는 하늘을 덮어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제(齊), 초(楚)와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나 그 크기는 진(秦)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진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진군(秦軍)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나라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진군은 이렇다 할 싸움을 하지 않고도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의 성(城)을 무혈점령하고, 조나라의 요충(要衝)인 태원성(太原城)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했다.
趙나라는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한단’이 위태로워질 형편이었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10여 일이 경과 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 나와 몽오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왕은 그 급보를 받고, 긴급히 대책 회의를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성루(城壘)를 높이 쌓고, 외곽으로 돌아가며 늪(池)을 깊게 둘러 파서 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사옵니다. 적이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군량(軍糧) 조달 문제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위(魏)와 초(楚)에 사신을 보내 응원군(應援軍)을 청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사를 총동원하여 늪을 깊게 파고 성루를 높이 올려 쌓게 하였다.
※ 註유) 럽을 여행하다 보면 중세(中世)의 고성(古城)에는 일반적으로 성(城) 주위를 깊고 넓게 판 다음 강물을 끌어들여 적군(敵軍)의 침략에 대비해온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가까운 일본(日本)의 오사카 성이나 나고야 성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몽촌토성에만 가도 성벽 밖으로 물길을 내고, 한강 물을 끌어들여 적의 공격을 막은 흔적이 있으니 이것을 해자라 한다.
진군(秦軍)이 한단성으로 진격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군(秦軍)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조군(趙軍)은 죽은 듯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안에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나라 승상 인상여가 예상한 대로 진은 20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또한 계절이 한 겨울로 들어서자 군사들이 동상(凍傷)과 기한(飢寒)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몽오 장군이 이런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이에 몽오 장군이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겠다!”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왔다.
장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선 37개의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나의 한이 많이 풀렸소. 여 승상(呂 丞相)과 장군들이 모두 힘을 합해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라 고맙기 그지없소!”
이리하여 여불위는 승상으로서 업적을 크게 세웠다.
그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진(秦)나라의 국세(國勢)가 크게 확장해 나가자, 여불위(呂不韋)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참으로 여불위는 사람 장사, 한 발 더 나아가 용인술을 기막히게 잘하는 사나이였다.
- 제1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