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3화
2021. 3. 17. 07:48ㆍ초 한지
★ 19금(禁)초한지(楚漢誌) - 13화
☞ 위(魏)나라 현자(賢者)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위(魏)나라와 군사동맹을 추진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평원군(平原君)은 위나라와의 교섭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현자(賢者) ‘사공자(四公子)’ 중의 한 사람인 신릉군은 위왕(魏王)의 아우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 평원군과는 손아래 동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평원군이 신릉군의 고매한 인격에 매료되어 자신의 처제와 혼인을 시켜 동서지간이 되었던 것이다.
평원군이 신릉군을 찾아가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하니 신릉군은 즉석에서 찬성하고, 위왕의 허락을 간단히 받아 왔다. 위왕은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진비(晋鄙) 장군으로 하여금 국경지대에 10만의 군사를 주둔시켜 두었다가 진이 귀국을 침범하기만 하면 즉각 병력을 출동시켜 귀국을 돕겠소.”
그리하여 평원군은 큰 성과를 거두고 조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면 신릉군이란 어떤 인물인가?
신릉군은 본시 병학가(兵學家)로서 식객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는 현인 사공자(四公子)의 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누구에게나 겸허하였고 어딘가 현사(현士)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몸소 찾아가 집으로 모셔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대량성(大梁城)의 문지기를 하고 있는 ‘후생(侯生)’이라는 70세 된 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자기 집으로 모셔오고자 애쓴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후생 노인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다 죽게 된 소인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공자께서 저를 데려가려고 하시오. 찾아주신 뜻은 고마우나 저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오.”
신릉군(信陵君)은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거듭 요청했으나 후생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신릉군은 하는 수 없어 목로집에서 술이라도 한 잔씩 나누고 헤어지자고 했는데, 신릉군은 그 자리에서도 후생 노인을 깍듯이 상좌(上座)에 모셨다.
그러자 후생 노인은 신릉군의 겸손한 태도에 깊이 감동되었는지 술이 몆 잔 들어가자 이런 말을 했다.
“소인은 너무 늙어 공자를 따라갈 생각이 없지만, 그 대신 좋은 사람을 한 분 소개해 드리리다.”
신릉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오나 선생이 천거하시는 분이라면 꼭 찾아가 뵙겠습니다. 그 어른은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푸줏간이 하나 나올 것이오. 그 푸줏간에서 칼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주해(朱亥)라는 사람이오. 세상이 그를 몰라주어 비록 푸줏간 칼잡이를 하고는 있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쓸 만한 인물일 것이오.”
푸줏간에서 칼잡이를 하고 있다면 백정(白丁)이다.
백정이란 누구나 멸시하는 최하층 천민(賤民)이다.
그러나 신릉군은 평소부터 직업에 대한 귀천 관념 같은 것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정신이 썩어빠져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천민이요, 아무리 천민이라도 정신과 그에 따른 행동이 살아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귀족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기에 백정이라는 직업은 신릉군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후생 노인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면 예사 인물이 아닐 것 같아서 신릉군은 그 길로 주해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과연 푸줏간이 나왔다. 40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고기를 썰고 있었다.
“말씀 좀 물어보겠습니다. 이곳에 혹시 주해라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주해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주해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 귀찮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주해의 인상은 무척 순박하게 느껴져서 신릉군은 미소를 지으며,
“실은 후생 노인의 소개로 선생을 일부러 찾아온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며, 자기소개를 한 뒤 자기 집으로 동행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해는 콧방귀만 뀔 뿐 상대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후생 노인이 망령이 드신 모양이구려.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갑니까?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거든 집에 돌아가 낮잠이나 자시오. 나는 바쁜 사람이오.”
하며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릉군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주해라는 인물에 이상한 매력이 느껴져서 신릉군은 그 후에도 4, 5차례 찾아갔었지만, 주해는 번번이 퉁명스럽게 내뱉더니 나중에는 아예 묻는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진나라 장양왕은 위나라가 조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자기네 국경지대에 위군(魏軍) 병력을 10만이나 주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면서 위왕에게 다음과 같은 협박장을 보내왔다.
“우리는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켜 조도(趙都) 한단성을 점령하려 하는데, 위나라가 조나라를 돕기 위해 우리 국경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켜두고 있다고 하니, 만약 귀국(貴國)이 조나라를 돕고자 한다면 우리는 방향을 돌려 위나라부터 정벌할 것이오. 그런 줄 알고, 귀국이 망하지 않으려면 일체의 군사 행동을 삼가시오.”
진나라 장양왕의 협박장을 받은 위왕은 크게 걱정을 하였다.
이에 신릉군은,
“진은 육국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생각으로 우선 조를 정벌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를 정벌하려는 각개격파(各個擊破)의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옵니다. 진은 예의도 신의(信義)도 없는 오랑캐 족속들이온데, 우리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어찌 생명인들 유지할 수 있으오리까! 하오니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조(趙)를 비롯하여 한(韓), 연(燕) 등 모든 국가들과 힘을 합하여 진에 대항해야만 하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위왕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하나의 힘은 약할지 모르오나 여섯 나라가 힘을 합하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미 군사동맹까지 맺었는데, 그것을 배신한다면 국가 간의 신의를 어떻게 유지해 나갈 수 있겠사옵니까? 조나라를 돕는데 지금 작은 손실이 있더라도 내일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조나라와의 군사동맹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을 해도 될 일, 당장 오늘 멸망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위왕은 끝내 조나라와의 군사동맹을 배신할 결심이었다.
※ 독자 제현 중 주희(朱姬)가 보고 싶다는 의견도 있으나 물론 때가 되면 주희도 등장하게 되지만 향후 주희 못지않은 경국지색(傾國之色)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는 자에 福이 옵니다.”
- 제 1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