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2화

2021. 3. 16. 06:51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2화

☞ 평원군(平原君)과 모수(毛遂)의 낭중지추(囊中之錐)]

조왕(趙王)은 진군(秦軍)에게 37개의성(城)을 빼앗긴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오겠노라”는 사전 통고까지 받고 보니, 국가의 안위(安危)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로 불리는 아우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진군이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고 공언(公言)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평원군이 대답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楚), 위(魏) 등과 군사동맹을 맺어 공동 방위태세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초와 위가 우리와 함께 싸워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으나 그들이 진(秦)의 미움을 극복하고, 우리와 손을 맞잡으려고 하겠는가?”
“물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는 없사오니, 되든 안 되든 제가 직접 나서서 우선 초나라부터 설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평원군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3천여 명의 식객을 거느려 오며, 그들을 친형제처럼 소중하게 대해 왔었다.
평원군은 초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사리(事理)에 밝고, 설득력은 물론 변설(辯說)이 능한 식객 중 20명 정도의 조력자가 필요하였다.

19명은 곧바로 추려낼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적격자가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원하고 나섰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저를 데리고 가 주시옵소서.”
평원군이 모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평소에 신통치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몇 해나 되었소?”
“공자의 신세를 진지가 어언간 3년이 넘었습니다.”
“3년?”
평원군은 내심 실망하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은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다고 하였소. 송곳 끝은 반드시 주머니 밖으로 솟아 나오게 마련인데,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3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나에게 송곳 끝을 보여준 일이 없으셨으니, 내 어찌 선생더러 초나라에 동행하자고 말할 수 있겠소?”
모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송곳 끝이 주머니 밖으로 솟아 나오려면, 그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자(公子)께서는 저를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십사하는 뜻에서 배행을 자처하는 것이옵니다.”
평원군은 모수의 뛰어난 논리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를 수행원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19명의 수행원들은 모수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사실을 알고 모두들 코웃음을 치며 반대했다.
그러나 평원군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모수를 대동하고 초나라로 출발하였다.

며칠 후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 일행은 초왕(楚王)과 회담을 개시하였다.
초왕과 평원군은 단상에 단둘이 마주 앉았고, 수행원들과 초나라 중신들은 단하에 마주 보고 이열 횡대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회담석상에서 평원군은 조(趙), 초(楚), 위(魏) 등 인접 삼국은 군사동맹을 맺어 강적 진나라의 침략에 맞서 함께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입이 닳도록 역설하였다.

그러나 초왕(楚王)은 좀처럼 응(應)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나라와 섣불리 군사 동맹을 맺었다가 진의 미움을 사는 날이면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회담은 아침부터 시작되었지만 날이 어둡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모수는 진종일 참고 지켜보다 못해 마침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초왕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양국이 군사 동맹을 맺고, 진나라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은 다 같이 이로운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처럼 시간을 끄십니까?”
초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평원군을 보고 물었다.

“이자는 누구요?”
“제가 데리고 온 수행원입니다.”
그러자 초왕은 대노(大怒)하며 벼락같은 호통을 질렀다.

“네 이놈! 썩 물러가거라.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이에 모수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초왕의 가슴에 들이대며 말했다.

“대왕께서 소인을 꾸짖는 것은 초나라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오. 그러나 대왕은 지금 바로 제 눈앞에 있고, 대왕을 도와줄 사람들은 멀리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어보신 뒤 가부(可不)를 답(答)해 주소서. 초나라는 영토가 진나라 못지않게 넓을 뿐만 아니라, 군대도 백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초와 같은 강대국이 진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이웃 나라와 화친 맺기를 꺼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초나라가 이처럼 비굴하기 때문에 진나라에게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이오이다. 우리가 군사동맹을 맺자는 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초와 더불어 공생공존(共生共存)하자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옵니까? 진실로 떳떳한 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진나라에 대한 공포심부터 버리십시오.”
초왕은 칼날 같은 모수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내가 지나치게 비겁했던 것 같구려. 좋소! 귀국과 군사동맹을 맺기로 합시다.”
군사동맹은 이렇게 일순간에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모수는 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수는 단하에 있는 초나라 중신(重臣)들을 굽어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동맹을 맺기로 결심하셨으니 이제는 혈맹(血盟)의 의식을 하도록 합시다. 지금 곧 닭과 말의 피를 속히 구해 오도록 하오!”
초나라 중신들이 동물의 피를 구리 쟁반에 가득 담아 오자, 모수가 초왕에게 정중히 받들어 올리며 말했다.

“혈맹의 의식을 거행함에 대왕께서 피를 먼저 드신 뒤에 중신들에게도 골고루 나눠 마시게 하시옵소서. 평원군과 저희들은 그 다음에 들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군사동맹의 의식이 끝나자, 초왕은 모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 오늘 선생의 깨우침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비겁한 왕이라는 조소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우리나라의 빈객(賓客)이기도 하오.”
모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臣)은 다만 조초(趙楚) 양국의 국운(國運)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대왕전에 무례를 저질렀사오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초왕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것이 바로 충성심이거늘! 내 어찌 충신에게 벌을 내릴 수 있으리오. 만약 이후에 또다시 진군(秦軍)이 귀국을 침략한다면, 우리는 춘신군(春申君)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달려가 귀국을 도와 드리도록 할 것이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모수를 경멸해 오던 19명의 수행원들은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평원군이 군사 동맹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조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공자(公子)가 아니었던들 이런 어려운 일은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오.”
그러자 평원군은,

“아니옵니다. 이번 일은 모두가 모수(毛遂) 선생의 공로입니다. 모수 선생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이옵니다.”
하고 모든 공을 모수에게 돌렸다. 그리고 모수를 따로 모셔다가 융숭하게 대접하며,

“오늘날까지 나는 사람을 보는 눈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건만 선생을 너무도 잘못 보아 왔으니, 이런 부끄러운 일이 없소이다. 선생의 세 치 혀는 백만 대군보다도 강했고, 선생의 비범한 기상은 천하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면 잊으시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옵니까! 공자께서 평소 고매하신 의리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던들 저 같은 것이 무슨 성명이 있으오리까.”
의리로 맺어진 두 사람의 겸손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플루타크는 그의 저서(著書) ‘영웅전(英雄傳)’에서 정의(正義)를 이렇게 말했다.

“정의란 힘 있는 자의 웅변(雄辯)이다!”

- 제1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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