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0화
2021. 3. 14. 08:50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0화
☞ 여불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것인가?
오늘 올리는 글에서 세상사(世上事)는 모두 때가 있고, 그때를 놓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진리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먼저 취하는 여불위(呂不韋)의 뛰어난 판단을 우리의 정치 현실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특히, 지지율 4.4%의 박원순에게 51%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서울시장 자리를 양보한 안철수를 생각해보면서 세상만사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것을...
독자 제위께서는 이 글을 통해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소양왕이 서거하자,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효문왕(孝文王)이다.
안국군이 등극함에 따라 자초가 태자로 책립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불위로 보면, 득세(得勢)의 길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트인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등극한 효문왕의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사흘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명의 왕이 잇달아 서거한 것이다.
이번에는자초(子楚)가 왕위에 오를 차례였다.
그러나 자초는 연달아 발생한 불상사에 가슴이 아파서,
“두 분 선왕(先王)께서 연거푸 돌아가신 이 때에 내 어찌 당장 왕위에 오른단 말이오? 이것은 효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소상(小祥)이나 지난 뒤에 등극하겠소.”
하고 엉뚱한 고집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효성이 망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중신들은 허리를 굽혀 절하며, 이렇게만 말할 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에 여불위는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천하의 정세가 분분한 이 시기에 보위(寶位)를 어찌 하루인들 비워 둘 수 있으오리까? 이것은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시는 일이기도 하옵니다. 진정으로 효도를 하시려면 마땅히 오늘로 등극하시어 국기(國基)를 더욱 굳건히 하시옵소서. 전하로서의 효도의 길은 오직 그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여불위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펴는 데는 그 나름대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자초처럼 감상에 사로잡혀서 등극을 미루다가는 왕위를 어느 놈에게 빼앗겨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더구나 자초에게는 배 다른 형제가 스물두 명이나 있어서 그들도 저마다 은근히 왕위를 넘겨다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이 이에 이른 여불위는 중신들을 노여운 눈초리로 둘러보며, 엄포라도 하듯 이렇게 따져 들었다.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해 나가야 할 중신들은 무슨 생각에 침묵을 하고 계시오. 나라님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두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오? 그렇지 않으면 태자(太子)를 제쳐놓고, 다른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 거요? 만약 그런 생각이 있거든 이 자리에서 숨김없이 털어놓아 보시오.”
동궁 국승(東宮 國丞)은 명목상 지위가 제 아무리 승상 격이라 하여도 국사(國事)를 담당하고 있는 중신(重臣)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불위가 중신들을 부라려보며 호통을 친다는 것은 직위에 어긋나는 언동이었다.
그러나 중신들은 자초와 여불위의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불위의 호통에 모두들 몸을 떨었다.
자초가 등극하는 날이면, 여불위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에 중신들은 몸을 떨며 입을 모아 말했다.
“동궁 국승의 말씀은 지극히 지당하신 줄로 아뢰옵니다. 보위는 하루라도 비워 둘 수 없는 일이오니, 전하께서는 오늘로 즉위하시는 것이 타당하옵니다.”
“음...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이리하여 자초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은 즉위식이 끝나자, 만조백관들 앞에서 여불위를 특별히 불러내 감격 어린 어조로 이렇게 분부하였다.
“내가 오늘날 보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경의 덕택이었소. 경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던들 내 어찌 조(趙)나라를 탈출할 수가 있었을 것이며, 탈출을 못했다면 어찌 보위에 오를 수가 있었을 것이오. 내 이미 보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처음 약속대로 경을 승상(丞相)에 제수하겠소.”
승상(丞相)이란 지위는 왕의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이다.
삼국지(三國誌)에서도 보았듯이 조조의 지위가 승상(丞相)인데, 오늘날로 치면 총리 격(格)이고, 고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일컬어지는 영의정 격인 바, 여불위의 실질적 권한은 그것과는 가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겠다..
여불위에게 중책(重責)이 맡겨지리라고 예측을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너무도 엄청난 등용에 중신들은 입을 벌리며 놀랐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신(臣) 여불위, 천학비재(淺學非才)하오나, 신명을 다해 대왕을 보필하겠사옵니다.”
여불위가 바닥에 엎드려 사은숙배(謝恩肅拜)하자, 장양왕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고맙소이다. 경도 잘 아시다시피 과인이 워낙 경륜이 부족하니, 차후 모든 국사를 승상과 상의하여 처리해 나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중신들을 돌아보면서,
“중신들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여 승상(呂 丞相)은 나의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경륜이 천하에 뛰어난 분이시오. 그러므로 경들은 여 승상을 나처럼 여기고, 충성스럽게 받들어 모시도록 하시오.”
왕(王)이 이 정도로 나오니 제아무리 경륜이 많은 중신이라 하여도 여불위를 감히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양왕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게 여겼는지 다시 이런 분부를 내렸다.
“아울러 경에게는 ‘문신후(文信侯)’를 제수하며, 성동(城東)에 있는 50 식읍(食邑) 10만 호의 영지(領地)를 별도로 하사하오.”
여불위가 장양왕에게서 하사받은 50 식읍 10만 호의 영지는 가히 조그만 나라 하나의 크기였다.
‘승상의 자리에다 10만 호, 50 식읍의 문신후라!’
여불위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아픈 것을 보면 꿈이 아닌 현실이 확실하였다.
권력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어서 여불위가 승상 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하객과 아첨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자자한 선비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특급 재상(特級宰相)의 눈에 들기 위해 천하의 재사, 현사들이 앞 다투어 여불위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문객(門客)들을 접대하자니 여불위의 집은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넘게 되었다. 게다가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시녀(侍女)만도 백 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 정도로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여씨 가문(呂氏家門)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여불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가 떠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전국칠웅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왕족(王族)들이 천하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빈객(賓客)으로 접대해오는 풍습이었다.
그들을 통상 식객(食客)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식객 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정객(政客)도 있고,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다 기회를 찾던 선비도 있고, 변설(辯舌)이 능란한 논객(論客)도 있고, 점술(占術)이 탁월한 술사(術士)도 있었으며, 힘이 남달리 세거나 훔치는 솜씨가 비상한 대도(大盜) 조세형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융숭하게 대접해왔다.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다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히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어려운 일이 생긴다 치면, 식객들은 자기의 일처럼 각자의 재주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과의 인간관계가 동지적(同志的)인 의리(義理)로 결합되어 은연중에 무시 못 할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는데, 울타리치고는 이처럼 믿음직스러운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치고 식객 2, 3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같은 왕족은 식객을 무려 3천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 네 사람을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여불위 자신도 문신후(文信侯)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사공자’를 본받아 양객(養客)으로 가명(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승상 여불위가 양객(養客)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지사(志士), 현사(賢士), 논객(論客), 학자(學者), 술사(術士) 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이 무려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가동과 노복(奴僕)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 註) 양객(養客) : 오늘날의 일본을 보면서 ‘마츠시타 정경숙(政經塾)’이 떠오른다. 이는 대 재벌(大財閥)의 하나인 마츠시타가 사재(私財)를 들여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일본 정계난 재계에는 ‘미츠시타 정경숙’ 출신이 상당수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마츠시타가 중국의 사공자(四公子)나 여불위(呂不韋)를 보고 따라 하기를 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개선되면 마츠시타 못지않은 지사(志士)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양객을 하려면 막대한 재원(財源)이 든다. 여불위는 워낙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라 큰돈을 투자해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놀려두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에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공자(孔子)는 일찍이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면 어떻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터이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서를 한 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면, 책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명명하면 좋겠소.”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여씨(呂氏)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해 26권이라는 방대한 양(量)의 책으로 발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바, 이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모든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생활을 참고로 삼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서 이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혜안(慧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여불위의 문화적 식견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저술이었던 것이다.
- 제 1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