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창과 홍랑의 순애보(殉愛譜) 제2편

2026. 2. 23. 20:46자유게시방

매창과 홍랑의 순애보(殉愛譜) 제2편

유희경(劉希慶)의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 한자로 써진 할아버지의 이름은 유도치(柳道致)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 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천민임에 틀림없다. 유희경이 쓴 촌은 집에 따르면, 살아생전 종 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냈고 사후에는 한성부윤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천민이면서 시를 지을 수가 있었으며,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효심이 남달랐던 유희경은 30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 배씨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 냈으며 기저귀를 빨아 바위에 펼쳐 말리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13세 때인 1557년(명종 1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수락산 자락에 부친의 시신을 묻으려 했는데 근처에 있던 고관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묘지기가 쫓아내자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묘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유희경은 장례를 마친 뒤 매일 무덤 앞에 단정히 앉아 곡을 하고 흙을 져다가 무덤에 오가는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만 집으로 돌아가 상청(喪廳)에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의 용태를 살폈다.

그 소문을 듣고 효심에 감복한 당대의 대학자인 남언경이 찾아가 두꺼운 옷 한 벌을 주었고, 근처에 있는 망월암의 승려를 불러 묘지곁에 초막을 지어주게 하고, 매일 그에게 죽을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그 인연으로 1559년(명종 14년) 삼년상을 마친 유희경은 남언경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웠다. 그 후 그는 상례전문가가 되었고, 유희경은 주자가례를 조선에 적용하면서 엄격한 절차도 중요하였지만 의례의 근본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의례과정을 통해 망자의 명분을 높이면서 동시에 가족들의 애정과 공경심을 불러 일으 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례에 대한 유희경의 새로운 해석과 집행 절차가 알려 지자, 내로라하는 가문에 초상이 나면 그를 집례책임자로 초빙을 했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부모의 상을 모시는 사람의 신분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유교의 법도였다. 때문에 유희경은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았지만 거만하지가 않고 늘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유희경의 행동거지는 양반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 했다. 유희경은 40대 중반에 18세의 매창을 만났다.

두 사람은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詩를 통해 한 차원높은 연정(戀情)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병으로 간 유희경과 매창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유희경의 소식이 끊기자, 매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매창은 진심으로 유희경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곡 원류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 시조 한 수가 이 당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 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 가락 하노라.

매창은 선조 6년(1573)에 태어나 광해군 2년(1610)
37세까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