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4. 14:49ㆍ자유게시방
매창의 순애보(殉愛譜) 제4편
그러나 이듬해 봄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있는 존재였으므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뜻밖의 이별 앞에서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홍랑과의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로 돌아온 뒤 얼마 안되어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1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다시 만날 날만 기약하며 3년의 세월이 흐른 후, 고죽이 중병을 얻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홍랑은 밤낮 으로 7일을 걸어 한양으로 고죽을 찾아가 정성을 다해 병구완을 하였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나게 된 홍랑은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차츰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최경창과 홍랑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이라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돼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최경창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르게 된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그 당시 표적이 되어 파직을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양계의 금’ 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 데 함경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격으로 그 때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사망한지 1년이 채 안된 국상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 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 젊은 나이로 객사(客死)를 하고 말았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 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자유게시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강화도마니산 *** (0) | 2026.02.28 |
|---|---|
| 매창의 순애보(殉愛譜) 5편(마지막 회) (0) | 2026.02.25 |
| 매창의 순애보(殉愛譜) 제3편 (0) | 2026.02.24 |
| 매창과 홍랑의 순애보(殉愛譜) 제2편 (0) | 2026.02.23 |
| 우리가 배워야 할 강 소국 스위스 (0) | 202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