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37
제5장 채태사의 생일 예물
제18편 우연한 운명 18-3
더구나 편지를 읽어보니 양산박 도적떼가 송강에게 돈을 백 냥이나 보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제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다.”
파석은 혼자 중얼대며 돈과 편지를 깊숙이 감추었다.
그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 거짓 코를 고는 체했다.
송강이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 위에 걸쳐놓은 옷이 없어졌다.
송강은 침상 앞에 가서 계집의 허리에 손을 대고 흔들었다.
그러자 파석은 몸을 휙 돌아누우며 한마디 한다.
“왜 그러시죠?”
“이 난간 위에 걸쳐둔 옷과 돈주머니를 어디 두었느냐?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밖에서 들어온 일이 없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안단 말이냐?”
“그래, 내가 감추었다 칩시다. 내가 못 내놓겠다면 어쩌겠소?”
“어허, 어서 내놓지 못 하겠느냐?”
“날 도적으로 몰아 관가에 고발해 봐요.”
“내가 언제 너를 도적이라 했느냐?”
“임자는 나와 장서방이 좋아지내는 것을 질투하시는 모양인데, 아마 그건 도적들과 내통하는 일보다 죄가 가벼울 걸요?”
송강은 파석의 말에 몹시 당황했다.
“무슨 말이냐?”
“정 그 편지가 필요하시다면 조건이 있어요. 제가 원하는 세 가지 청을 들어주면 편지를 돌려드리겠어요.”
“세 가지가 아니라 서른 가지라도 들어주마.”
“첫째는 내가 임자한테 들어올 때 써 준 문서를 돌려주고, 내가 장서방한테 시집가도 두 말 않겠다고 각서를 써주시겠어요?”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둘째는 이 집과 세간을 모두 주세요.”
“또 뭐냐?”
“편지에 쓰여 있는 대로 임자가 양산박 두령에게 받은 황금 백 냥을 내게 주실 수 있어요?”
“두 가지 조건은 들어주겠지만, 양산박에서 보낸 돈은 돌려보냈으니 줄 수가 없다.”
“그럼 관가에 가서도 돈을 돌려보냈다고 말하겠어요?”
송강은 참을 만큼 참았으나 계집이 그 말을 하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정말 안 내놓겠느냐?”
“못 내놓겠어요.”
송강이 파석에게 달려들어 이불을 제치고 손에 움켜쥔 주머니를 뺏으려고 했으나 계집은 완강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순간 옷에 달린 칼집에서 칼이 쑥 빠졌다.
송강은 칼을 빼들어 파석의 목에 깊숙이 꽂아버렸다.
순식간의 노여움과 분노가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염파석을 죽인 송강은 주머니 속에서 조개의 편지를 꺼내 불에 태워버리고 층계에서 내려왔다.
층계 밑에는 파석의 노모가 서 있었다.
송강은 처연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파석이 무례하게 굴어서 죽이고 내려오는 길이오.”
노파는 그 말을 믿지 않더니 이층에 올라갔다가 처참한 광경을 보고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나리,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나는 사내대장부요. 이대로 도망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모든 것을 하라는 대로 하겠소.”
“착하신 나리께서 오죽하셨으면 그랬겠습니까? 모두 딸년 잘못으로 생긴 일이겠지요. 이젠 딸년 장례나 치러줘야겠소.”
파석의 노모는 의외로 냉정하고 침착했다.
두 사람은 함께 관을 사러 나갔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그들은 새벽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그들이 관가를 지나갈 때 그때까지 말없이 걷던 노파가 갑자기 송강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노파가 잠자코 있었던 것은 송강이 자기마저 해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놈이 내 딸년을 죽였소. 살인자요. 이놈을 잡아요!”
그때 관가의 군관들이 뛰어나왔다가 송강을 보고 놀란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압사 나리를 살인자라고 하다니!”
노파는 더욱 기세를 부리며 길길이 뛰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아무도 노파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송강은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우아라는 쌀겨 장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에 송강의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었다.
“이 할망구가 미쳤구나! 손을 못 놓겠느냐?”
당우아는 크게 화가 나서 억센 주먹으로 노파의 면상을 쥐어박았다.
노파가 쓰러지는 바람에 송강은 재빨리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달아났다.
“아이구, 이놈아! 너 때문에 살인범을 놓쳤다. 너라도 잡아야겠다. 어서 관가로 가자. 어서 가자.”
관가 군관들은 당우아를 잡아 괸가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