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 출장 기행 문 (23)
2022. 5. 25. 07:10ㆍ아프리카 출장 기행 문
★ 아프리카 출장 기행문 (23)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식후 좌담을 하고 있는데, 식당의 요리사가 다가오더니 또 콜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점심식사를 했지만 그가 권하기도 하고, 날씨도 더워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콜라를 가져왔다.
우간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뉴 수단의 콜라도 브랜드가 코카콜라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요리사가 자꾸 먹고 마실 것을 권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매상을 올리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대통령 영부인은 전 회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전쟁고아들의 식생활과 교육, 전쟁미망인 그리고 전쟁 부상자들의 재활교육과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우리를 초청해서 방문한 사람들이었지만 숙식비를 1인당 하루 2끼의 식사를 제공하고, 미화(US $)로 45불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음료수를 제공하고 받는 재화는 별도의 수입이 되는 셈이다.
민간 베이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단 그 나라 정부에서 우리를 초청해놓고, 체제 경비를 방문자에게 지불케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헐벗고 굶주린 이곳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또 기초적인 교육훈련이라도 시켜야만 하는 그들의 실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휴식을 마친 후 영부인의 비서가 안내해 주는 곳을 따라가서 보게 실정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을 더욱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영부인의 조카이자 비서가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안내를 시작했다.
그도 역시 고등 교육을 받았는지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처음에 찾아간 곳은 한 개 밖에 없는 고아들이 공부하는 교실이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기초교육으로 영어로 말(speech)과 글을 가르치는 장소였다.
책상과 걸상이 옛날 우리나라의 50~6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앉아 수업을 받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재료는 물론 공구마저도 부족한 탓이라 조잡하게 제작되어 있었다.
칠판은 넓고 평편한 나무가 없어서인지 면이 고르지 않은 시멘트 몰탈 벽에 까맣게 칠을 한 것으로 그 위에다 백묵(白墨, 분필)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은 아마 수업이 끝났는지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몇 명의 아이들이 남아서 선생님이 써 놓은 듯한 영문을 읽고 있었다.
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영어로 몇 마디 말을 물었지만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고아로서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서 늦게까지 남아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교실을 둘러본 후 식당(Dining room)으로 안내되었는데, 식당 안엔 탁자(식탁)만 있고 의자는 없었다.
식당 내 한쪽 구석에 아이들이 먹을 양식인 듯한 옥수수 포대(包袋, 자루)가 몇 개 놓여 있었는데, 포대에 적혀 있는 글을 보니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였다.
이곳에서 수용하고 있는 고아의 수가 약 250명 정도인데, 옥수수 가루로 풀대 죽(풀처럼 쑤어먹는 멀건 죽)을 끓여 고아들에게 끼니로 제공한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자 비닐 포장을 씌운 그늘 아래에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가마솥이 있었다.
가마솥은 돌 위에 걸쳐놓아 나무로 불을 지피도록 놓여 있는 것이 옛날 우리의 생활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커다란 원형 바켓에 옥수수 죽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안내하는 영부인의 비서가 2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서는 최소한 바켓 두 개 용량의 죽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말 고아들의 연명(延命)을 위한 비참한 식생활이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식당을 뒤로하고 다른 장소의 교실로 안내되었는데, 교실 안에는 여러 대의 재봉틀이 정렬되어 있었다.
이곳은 전쟁미망인들의 재활 교육장이었다.
또 다른 장소는 야외 교육장으로 전기톱 작업대가 세 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전쟁 부상자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는 재활 교육장이라고 했다.
재봉틀이나 목공 작업 기계는 모두 낡아 빠져 정말 볼품없는 고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에겐 이것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요한 기계 또는 기구들이었다.
다른 한 곳에 이르자 아이들이 집 앞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옛날 우리나라 여자아이들이 잘하던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은 아이들의 거처인 숙소였는데, 3단으로 제작된 침대가 정렬되어 있었다.
실내는 전깃불이 켜져 있지 않아 매우 어두웠다(낮에는 발전기를 가동하지 않고, 밤에만 잠깐 전기를 생산 공급함).
그런데 한 여자아이가 다른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어두운 실내의 한쪽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는 말라리아 병에 걸려 앓고 있는데, 치료약이 없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눈만 크게 뜨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모습이 무엇인가 삶을 애원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캠코더에 녹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이 아이에게만큼은 카메라를 갖다 댈 수가 없었다.
잠시 그렇게 망설이다가 스냅용 카메라로 죽어가는 아이를 필름에 담았다.
- 2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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