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04화

2021. 6. 16. 06:48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04화

☞ 장량의 반간지계(反間之計)

그 무렵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간 초패왕 항우는 자신을 ‘황제 폐하’로 자칭하면서 날마다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만고의 강국인 진나라조차 거꾸러뜨리지 않았던가! 이런 나에게 이제 어느 놈이 감히 덤벼올 것인가?”
이 같은 자존자대(自尊自大)의 망념(妄念)에 빠져버린 항우였으니 이때부터 그가 걸어갈 길은 오직 술과 계집뿐이었다.

그리하여 초나라 대궐에서는 낮이나 밤이나 주연(酒宴)과 가무(歌舞)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군사 범증은 그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지만, 초패왕 항우는 그때마다 코웃음을 치면서

“때가 태평성대인데, 어찌 연락(宴樂)을 즐기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아부(亞父)는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날마다 나처럼 연락이나 즐기도록 하소서.”
하고 오히려 향락을 권장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던 어느 날 시종이 황급히 달려 들어오더니,

“황제 폐하! 한왕 유방이 포중(褒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사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때마침 계집들과 더불어 주연을 즐기고 있던 중이라, 그와 같은 보고를 귓등으로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하거라. 파촉에서 나오는 잔도(棧道)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는데, 제까짓 유방이 무슨 재주로 군사를 일으켜 온다는 말이냐!”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삼진왕들로부터

“한왕 유방이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을 해오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지원군을 급히 보내주시옵소서.”
하는 요청이 연달아 날아오지 않는가!
그리하여 지원군을 보내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비마가 달려오더니,

“삼진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함양성 조차 한신에게 모두 점령당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계속 동진(東進)해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옵니다.”
하고 알려 왔다.

초패왕 항우는 그 보고를 받자, 크게 놀라며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와드득 갈며 큰소리를 질렀다.

“한신이라는 고부가 무슨 재주로 삼진과 함양을 모두 점령했단 말이냐? 도대체 장한은 뭐하고 있었으며, 동예, 사마흔은 뭣들하는 작자였단 말인가? 내 당장 달려가 유방을 생포하고, 한신이라는 놈의 목을 베어 나의 울분을 풀리라. 여봐라! 곧 출전할 것이니, 모두들 출동 준비를 서두르라 하여라!”
항우가 급작스럽게 출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범증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뢴다.

“황제 폐하! 한신은 결코 얕잡아 볼 인물이 아니옵니다. 그러기에 신이 일찍이 ‘한신을 대담하게 발탁하시어 크게 쓰시거나, 그렇지 않으시려거든 죽여 없애자’고 진언(進言)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늘날까지 한신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가 결국은 이처럼 커다란 우환을 당하시게 되는 것이옵니다.”
“아부는 한신 따위에게 왜 이처럼 겁을 내시오? 삼진왕들이 한신에게 성을 빼앗긴 것은 한신의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삼진왕 자신들이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러기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출전하여 유방과 한신을 모두 다 곤죽을 만들어 놓을 테니, 아부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항우가 이같은 호언장담을 하고, 일선으로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한(韓)나라의 장량 선생으로부터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뭐야? 장량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그 편지를 이리 가져오너라.”
항우가 장량의 편지를 즉석에서 뜯어보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한(漢)나라 우생(愚生) 장량은 삼가 초황제 폐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우생은 지난날 폐하의 은덕으로 고국에 무사히 돌아와 국왕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할 일 없이 명산대천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이 또한 황제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근자에 한(漢)왕이 우생과 더불어 천하를 도모해 보자고 우생을 부른 일이 있었사오나 우생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제(齊)나라가 천하를 도모해 볼 생각에서 제왕이 우생에게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물론 우생은 그 부름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를 위해 우생이 생각해 보옵건대, 한왕 유방은 워낙 야망이 작은 사람이기에 그는 함양을 수중에 넣는 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제왕(齊王)은 워낙 야망이 큰 관계로 반드시 초나라까지 넘겨다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이 같은 우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 당장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완전히 제압해버리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제왕은 원대한 야망을 소신대로 펴나가기 위해 육국 원수들에게 격문(檄文)을 돌린 일이 있사옵는데, 천만다행으로 그 격문의 사본이 우생에게 입수되었기에 참고삼아 동봉하오니, 폐하께서는 일독하시고, 초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도록 하시옵소서. 폐하의 무운 장구(武運長久)를 빌며 이만 줄이옵니다.
한국(漢國) 유객 장량 상서

장량이 항우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보낸 목적은 항우로 하여금 한나라를 치려던 칼끝을 제나라로 향하게 하려는데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편지 속에 ‘한왕은 야망이 작은 사람’라고 쓴 것은 평소에 항우가 유방을 평가하는데 초점을 맞춰 그의 생각을 부추긴 것이었고, ‘제왕은 원대한 야망가이기 때문에 반드시 초나라를 치게 되리라’고 말하여 줌으로써 항우의 경계심을 그쪽으로 돌려놓으려는 모략이었다.

그러나 강포(强暴)하기만 할 뿐으로 성격이 단순하고, 지혜가 부족한 항우는 장량의 편지를 읽어 보고, 장량의 충성심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장량이 아니면 누가 나에게 이처럼 중대한 정보를 말해 줄 것인가?’
항우는 장량의 충성을 고맙게 여기며, 이번에는 그가 보내 온 ‘제왕(齊王)의 격문’을 읽어 보았다.
제왕이 각국 원수들에게 보냈다는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왕 전영(田榮)은 양왕(梁王) 진승을 비롯하여 육국 제왕(六國諸王) 휘하에 글월을 드리오.
옛날부터 이르기를 ‘사람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면 무엇보다도 덕(德)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자칭 ‘황제 폐하’라고 일컫는 항적(항우의 본명)이라는 자는 일찍이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어기고, 유방에게서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의제까지 시해하였소. 이는 천도(天道)에 반하는 행위이니 어찌 천벌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이에 본인은 항우를 징벌하여 천도를 바로잡고자 하는 바이니, 육국의 제왕들께서도 다 같이 군사를 일으켜 성업 완수(聖業完遂)에 적극 협력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오.

항우는 제왕의 격문을 읽어 보고, 주먹으로 용상을 두드리며 분노하였다.

“내 일찍이 전영이라는 자를 제왕에 봉해 주었고, 진승(陳勝)이라는 자를 양왕에 봉해 주었거늘, 그자들이 배은망덕하게도 반란을 일으켜 천하를 도모하겠다고 하다니, 이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나는 한왕 유방을 치기 전에 그놈들부터 단단히 부숴버려야 하겠다.”
자기가 키워 놓은 제후들에게 배반을 당하게 된 셈이니, 항우가 격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범증이 조용히 아뢴다.

“폐하! 장량이 간곡한 편지와 함께 이런 격문을 보내온 것은 그의 위계(僞計)임이 분명하옵니다. 유방과 장량은 둘도 없는 심우(心友)이옵니다. 장량은 지난날 폐하의 은총을 입었다고는 하오나 그때도 그의 마음은 유방에게 있었던 것이옵니다. 지금 유방은 함양을 점령 중이온데, 폐하께서 함양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심을 알고, 폐하의 공격을 제왕에게 돌리게 하려고 이런 위계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오니 제나라를 먼저 치시는 것은 고려하셔야 마땅할 것이옵니다.”
범증은 불세출의 지략가인지라, 장량의 위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항우가 지혜로운 군주였다면, 범증의 충고대로 장량의 편지를 재검토해 보았어야 옳을 일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워낙 우직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인간이므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부는 모르시는 말씀이오. 장량은 본시부터 나에게 뜻이 있는 사람이오. 그는 몸이 허약하여 수양을 하느라고 명산대천을 떠돌아다니지만, 그가 어찌 나를 버리고 소심한 유방을 따라가겠소? 그가 오늘 같은 중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만 보아도 그의 충정을 알 만한 일이 아니오?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제나라와 양나라를 먼저 토벌하고, 유방은 그 다음에 정벌하기로 하겠소.”
“장량은 워낙 위계에 능한 자이므로 그자를 믿으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유방을 먼저 평정해 놓으시고, 제나라와 양나라는 그 다음에 치시는 것이 순서일 줄로 아뢰옵니다.”
“제나라와 한나라를 모두 정벌할 판인데, 거기에 무슨 순서가 있겠소? 내 생각대로 우선 제나라를 쳐부수고 나서 한나라는 그 다음에 쳐부수기로 하겠소이다.”
그리고 항우는 우선 제나라를 쳐부수려고 대군을 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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