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05화
2021. 6. 17. 06:55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05화
☞ 장량이 말하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조건
한편, 장량은 항우가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로 출동했다는 정보를 받고 나자 크게 기뻐하며, 자기 자신은 즉시 위(魏)나라로 달려가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에게 면담을 신청하였다.
위표는 장량의 면담 요청을 받고, 대부(大夫) 주숙(周淑)과 상의한다.
“장량이 나를 만나자고 하는데, 무슨 일로 찾아왔을 것 같소?”
“장량은 유명한 세객(說客)입니다. 그는 옛날에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보다도 더욱 뛰어난 변설가라 들었습니다. 그는 필시 한왕을 위해 대왕을 설득하려고 왔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장량이 그런 일로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 나의 보검(寶劒)으로 단박에 목을 쳐버리면 어떻겠소?”
“장량은 워낙에 혁혁한 인물이기에 항우조차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러하니 대왕께서는 장량을 어디까지나 정중히 대해 주시되,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들어주지는 마시옵소서.”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장량을 그냥 만나보기만 하겠소.”
위표는 장량을 불러들여 수인사를 나누고 나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한왕(漢王)의 신하인 줄로 알고 있는데,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오셨소?”
장량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한다.
“저는 한왕(漢王)의 신하가 아니옵고, 한왕(韓王)의 신하이옵니다.”
그러자 위표가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선생이 한(韓)나라 사람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선생은 오래 전부터 한왕(漢王)과 가까이 지내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잖소?”
“한왕(漢王)이 진나라를 정벌할 때 제가 한대왕(韓大王)의 명을 받고 한왕(漢王)을 도와 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평정하고 난 뒤 저는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분이 오늘은 무슨 용무가 있어 나를 찾아오셨소이까?”
이에 장량은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말한다.
“대왕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한왕은 지금 함양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어 저를 여러 차례 부르셨습니다. 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오는 까닭에 한왕의 부름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사오나, 옛날의 은총을 저버릴 수가 없어 함양에 잠깐 들러 인사만 여쭙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다 보니 모든 백성들이 대왕의 성덕(聖德)을 극구 칭찬하고 있으므로 저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어 잠깐 경의(敬意)라도 표하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된 것이옵니다.”
위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 주안상을 차려 내오게 하여 장량을 정중히 대접하며 물었다.
“오늘날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건대, 육국(六國)이 난립해 있는데다 양대 강국인 초나라와 한나라가 제각기 봉강통일(封疆統一)의 야망을 품고 분쟁을 거듭해 오고 있는데, 선생은 장차 어느 나라가 봉강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리라 보시오?”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천하대세의 흥망을 누가 감히 예언할 수 있으오리까? 그러나 모든 정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한나라는 흥하고 초나라는 망할 것 같사옵니다.”
“그 이유는?”
“한왕 유방은 성품이 관인후덕(寬仁厚德)한 데다 천문학상으로도 오성(五星)이 한나라에 상취(相聚)하고 있으니 그것은 하늘도 그를 돕고 있는 증거입니다. 한왕은 이미 삼진을 평정하고 함양을 점령하였는데, 제가 이번에 함양에 잠깐 들러 보았더니 인근 각지에서 제후들이 앞을 다투어 귀순해 오고 있었습니다.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는 세력이 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머지않아 한나라와 손을 잡을 기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나라와 양나라조차도 그런 형편이니 그 밖의 군소 국가들이야 천하대세의 흐름에 어찌 순응하지 않을 수가 있으오리까?”
위표는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다시 묻는다.
“만약 한나라가 그처럼 흥하게 되면, 초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초나라의 항왕은 성품이 우직하고 강포하여 ‘관중왕’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고 나서는 의제까지 죽이고, 자기 자신을 ‘황제 폐하’로 자칭해 오는 바람에 천하의 인심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자고로 지난 시절 시황제에서 보듯이 백성들의 인심을 잃어버린 군주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위표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면서,
“선생께서는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계시는구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대로 장차 한왕이 천하의 군주가 되실 것은 틀림이 없을 것 같구려. 나는 항우로부터 관작(官爵)을 받기는 했지만 항우의 그늘을 떠나 독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소. 천하의 대세가 한왕에게 기울어졌다면 나 역시 한왕의 그늘로 들어갔으면 싶은데, 선생은 나를 위해 그 길로 인도해 주실 수는 없겠소?”
“대왕께서 만약 한왕에게 귀순하시기만 하시면, 한왕은 대왕을 무겁게 쓰시는 것은 물론, 항우로부터 위협받게 되는 지금의 지위나 영토의 보존이 원만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소생은 대왕의 성덕을 흠모하고 있는 만큼,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병풍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대부 주숙이 두 사람 앞으로 썩 나서며 큰소리로 외친다.
“대왕께서는 장량의 궤변에 넘어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만약 지금 하신 말씀이 누설되면, 항왕은 대군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달려오고야 말 것입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주숙 대부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그러자 주숙은 장량에게 정면으로 대든다.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웃으시오?”
장량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대부는 어찌하여 천하대세의 강약 흐름에 그렇게도 어두우시오? 항우의 성품을 이렇게나 모르시는 데는 정말로 놀랍소이다.”
“천하대세의 강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강약의 구별을 모르신다니,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요. 일찍이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옹왕(雍王) 장한은 20만 군사로써 함양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귀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장수였었소. 그렇지만 한신 장군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폐구성을 빼앗고 장한의 목까지 베어버렸소. 그 옛날 항우는 장한과 아홉 번이나 싸워서 간신히 승부를 결한 데 비하면,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 것인지는 대번에 판별되는 것이 아니요?”
주숙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묻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천하의 정세에 어둡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오?”
장량이 다시 주숙에게 말한다.
“대부가 천하의 대세에 어두운 점을 말씀드릴 테니 들어 보시오. 무릇 천하의 대세가 변화하려면 ‘때(時)와 세(勢)’라는 두 가지의 원리가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은 ‘때’와 ‘세’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모두가 유동적이오. 다시 말해서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은 유동적이란 말씀이오.”
그 말에 대해 주숙은 즉각 반발하고 나온다.
“선생의 말씀대로 천하의 대세가 유동적이라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뽑아 세상을 덮을 기세)의 영웅인 항왕을 도와서 그를 천하의 주인으로 삼으면 될 게 아니오?”
“매우 좋은 질문이오. 그러나 항왕을 믿고 따르기에는 그 자신이 자기의 용맹만을 믿고 천명(天命)을 깨닫지 못한 사람임을 알아야 하오. 그는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망은 있어도 지략이 없는 것이 결점이란 말이오. 그는 백성을 사랑할 줄도 모르지만 관중(關中)을 버리고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감으로써 중심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이 되었소.”
“그러면 선생은 관중(함양)을 차지한 한왕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는 말씀인가요?”
주숙의 감정적인 반격에 장량은 조용히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말한다.
“대부께서는 나의 말에 오해를 하고 계시는구려. 나는 다만 천하의 추세를 객관적으로 논평했을 뿐이지,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니 그 점은 오해가 없기를 바라오.”
그러자 이번에는 서위왕 위표가 장량에게 물었다.
“선생이 한왕 유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소이다.”
“대왕께서 물어오시니 모든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제가 보기에 한왕은 관상학상으로도 제왕(帝王)의 상(相)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신 분이오. 게다가 인품이 관인대도(寬仁大度)하여 이르는 곳마다 민심이 그분한테 몰립니다. 함양을 점령할 때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하였으며, 함양성 백성들이 한왕을 ‘만세, 만만세’로 맞아들였다고 하니, 그 어찌 그분을 ‘때’를 얻고 ‘세’를 얻은 어른이라고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주숙은 아직도 반발심이 누그러지지 않고, 다시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나 군세(軍勢)에 있어서는 초나라가 한나라에 비해 우세한 편이 아니오?”
“물론 지금으로 보아서는 한나라보다 초나라가 훨씬 우세한 편이지요. 그러나 항왕은 남의 조그만 잘못까지 책할 줄은 알아도 커다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오. 제(齊)나라와 양(梁)나라가 지금까지는 항왕을 많이 도와왔건만, 항왕은 지난날에 지내온 의리를 무시하고 대군을 일으켜 제와 양을 치고 있는 중이오. 항왕은 그 두 나라를 정벌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나라로 쳐들어 올 것인데, 그때에는 무슨 힘으로 항우를 막아낼 수 있겠소.”
마침내 장량은 서위왕 위표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한 말을 토해 놓았다.
위표는 청천벽력 같은 장량의 말을 듣고, 주숙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란다.
“항왕이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와 양나라로 쳐들어가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량은 눈을 커다랗게 떠 보이며 대답한다.
“대왕께서는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계셨던가요? 두고 보십시오. 제나라와 양나라는 머지않아 항우의 손에 쑥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귀국이 항우의 손에 쑥밭이 되어 버릴 차례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생은 무슨 얼토당토않은 엄포의 말씀을...”
서위왕 위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등골이 오싹해 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바로 그때,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큰소리로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대왕 마마, 큰일 났습니다. 초패왕이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와 양나라로 쳐들어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무엇이? 그러면 장량 선생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냐?”
위표는 몹시 당황하며 이번에는 장량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장량 선생! 우리가 한왕에게 귀순을 하게 되면, 한왕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도와주게 되겠지요?”
장량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한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징벌하는 기치를 내 걸고 항우와 천하를 겨루고 있는 어른이시오. 그토록 정의로운 어른께서 어찌 자기에게 귀순해 온 선량한 나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아니하겠소이까? 귀순만 하시면 한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그때부터는 귀국의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위표는 그 말에 구세주를 만난 듯이 기뻐하며,
“그러면 한왕 앞으로 항표(降表)를 써드리고 공물(貢物)도 많이 보내 드릴 테니, 장량 선생이 수고스러우신 대로 한왕 전하께 직접 전해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장량은 내심 쾌재를 부른다.
“나라를 구하시겠다는 데, 제가 어찌 도와드리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중대한 문제는 제삼자인 제가 나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따라서 주숙 대부가 가신다면 저도 동행하여 모든 일이 원만히 해결되도록 조언(助言)은 해드리겠습니다.”
장량은 주숙의 마음까지 돌려놓으려고 일부러 주숙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주숙은 항표와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량과 함께 함양으로 한왕을 만나러 떠났다.
일행이 함양에 도착하자, 장량은 한왕을 먼저 만나 지금까지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니, 한왕은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며 말한다.
“선생이 아니시면 이처럼 어려운 일을 누가 성사시킬 수가 있었겠소이까? 주숙이라는 사람이 위왕의 항표를 가지고 왔다니 지금 곧 만나보기로 하지요.”
주숙은 대궐로 들어와 한왕에게 큰절을 올리다가 한왕의 얼굴이 신선처럼 거룩하고도 우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과연 한왕은 장량 선생의 말대로 제왕지상(帝王之相)이 분명하구나. 항왕을 만났을 때는 공포감에 온몸이 떨려와 죽을 지경이었는데, 한왕은 마냥 인자하게만 느껴지니 천하의 주인은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주숙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서위왕 위표의 항표를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위왕 표는 삼가 한나라 대왕 전하께 항표를 올리옵니다.
대왕께서는 워낙 인덕이 풍성하시와 삼진을 평정하시자, 인근 제후들이 모두가 초패왕을 등지고 한결같이 대왕 앞으로 귀순해왔다 하오니 진실로 축하의 말씀을 올리옵니다. 모든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 결국에는 대해(大海)로 들어가듯이 본인도 이제부터는 대왕의 어명을 충실히 받들고자 하오며, 대왕전에 약간의 공물을 헌상하오니, 이를 기회로 앞으로 대왕께서 본인과 위나라 민초들의 정성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위표 상서.
한왕이 위표의 항표를 읽어 보고 무척 기뻐하니 주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께서 말(馬)을 좋아하신다 하옵기에 ‘백벽(白壁)’이라는 이름의 명마도 한 필 가져왔사오니 마음에 드실지 한번 시승(試乘)해 보아주시옵소서.”
한왕은 워낙 말을 좋아하는지라 주숙과 함께 밖으로 나와 말을 타보니, 전신이 눈처럼 하얀 ‘백벽’이란 말은 과연 명마 중의 명마였다.
한왕은 너무도 기뻐하며, 주숙에게 융숭한 연락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주숙이 돌아가려고 하자, 서위왕 위표에게 보내는 답신(答信)을 손수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은 서위왕 족하에게 친서를 보내오.
나는 귀왕의 명성을 들어 온지 이미 오래오. 귀왕은 주왕(周王)의 후예로서 위나라 백성들에게 많은 인덕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초패왕 항우와 손을 잡았다기에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우리와 생사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하니 진실로 고맙고도 기쁜 일이오.
이제 우리는 함양을 중심으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려 가도록 합시다. 우리가 머지않은 장래에 한자리에서 만나 이 기쁨을 나눌 날이 있기를 바라오.
실로 친밀감이 넘치는 친서였다.
서위왕 위표는 한왕의 친서를 읽어 보고,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아! 한왕이 이렇게도 위대한 어른이라는 것을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 제 106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