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93화

2021. 6. 5. 07:07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93화

☞ 조금씩 깨뜨리는 한신의 전술

그로부터 10여 일 후 한신은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 시켜가면서 하루는 번쾌를 불러 이렇게 명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대왕을 모시고 함양으로 진격할 예정이오. 그런데 함양으로 가는 길이 큰 문제요. 일찍이 장량 선생께서 함양으로 가는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오. 따라서 잔도를 보수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요. 장군에게 군사 만 명을 줄 테니 주발, 진무 등 두 장군과 협력하여 한 달 안에 잔도를 완전히 보수해 놓으시오. 만약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법에 따라 엄중 처단할 것이오.”
번쾌는 너무도 엄청난 군령을 받고 기가 막혔다.

10만 명이 1년이나 걸려야 해낼 수 있는 대공사를 단 만 명을 가지고 어떻게 한 달 안에 완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번쾌는 생각다 못해 즉석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원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함양으로 가는 길은 천하의 험로인데다 거리도 천 리가 넘사옵니다. 그것을 무슨 재주로 만 명을 가지고 한 달 안에 보수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원수님께서 저를 죽이고 싶으시거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주시옵소서.”
한신은 무슨 생각을 해선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말한다.

“군령을 받고 어려움을 핑계로 임무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불충(不忠)에 속하는 일이오. 장군의 충의를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 보시오.”
번쾌는 더 이상 말대답을 했다가는 군법에 회부 될 것 같아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잔도 보수의 길에 올랐다.

한편, 한신은 그날부터 병사들을 손수 진두지휘하면서 마지막 군사훈련을 강도 높게 계속하였다.
평소에 훈련을 철저하게 시켜둔 덕택에 군사들은 군호에 따라 정확하고 민첩하게 움직여 주었다.

깃발을 좌로 흔들면 나는 듯이 왼편으로 달려 나가고, 깃발을 오른쪽으로 흔들면 쏜살같이 오른쪽으로 공격하고, 앞으로 흔들면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공격 대형을 취하며, 징 소리와 함께 뒤로 흔들면 일보 후퇴를 하는데, 수백 수천의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하나같이 행동이 일치하였다.

네 개의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면 순식간에 장사진을 이루고, 하나의 장사진을 네 개의 무리로 분산하니 순식간에 사문(四門)의 군진(軍陳)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전진과 후퇴, 분열과 통합 등 복잡다단한 군사 행동이 깃발과 군호(軍號)에 따라 커다란 군사의 무리가 하나가 움직이듯 하였다.
한신은 군사들의 훈련 광경을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하루는 한왕에게 이렇게 품하였다.

“대왕 전하! 출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모두 끝마쳤사옵니다. 신으로서는 막강한 군대라고 자부하는 바이오나, 대왕의 어의(御意)는 어떠하실지 친히 사열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장군이 군사들을 정예롭게 훈련시키는 광경을 여러 차례 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사열식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구려.”
그러자 옆에 배석해 있던 승상 소하가 한왕에게 아뢴다.

“대왕 전하! 출진(出陳)을 눈앞에 두었으니 대왕께서 최후의 사열을 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래야만 대왕께서도 든든한 마음으로 출진하시게 되시겠지만, 병사들도 용안(龍顔)을 직접 배알함으로써 사기가 더욱 왕성해질 것이옵니다.”
“승상의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그러면 내일 아침 묘시(卯時, 오전 6시)에 연병장으로 나가겠소.”
다음 날 아침 한왕이 문관(文官)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연병장으로 행차하노라니 한신은 모든 대장들을 인솔하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왕이 사열대에 높이 올라서자, 군악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며 사열식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한신 자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수만 군사들을 합동 지휘하는데, 모든 부대의 대오가 하나같이 질서 정연하고, 나가고 물러섬이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면서도 진형(陳形)을 무궁무진하게 펼쳐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열식이 끝나자, 한왕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신을 가까이 불러 치하를 한다.

“장군이 군사들을 다루는 솜씨는 놀랍도록 뛰어나시오. 모르면 몰라도 손자나 오자도 장군만은 못했을 것이오. 군사들이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하게 훈련되었으니 이제는 함양을 향하여 출진(出陳)하기로 합시다.”
“신이 길일을 택하여 대왕을 모시고 출진하겠사오니, 출진할 날짜는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그러면 출진할 날짜가 결정되는 대로 나에게 알려 주시오.”

한왕이 사열식을 끝마치고 사열대에서 내려오자, 잔디밭에는 어느새 주안상(酒案床)이 성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요란스럽게 차려 놓은 많은 음식들을 살펴보니 그것은 파촉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산해진미(山海珍味)뿐이 아니던가?

‘한신이 나를 위해 이처럼 구하기 어려운 음식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이런 음식을 마련한 것만 보아도 한신의 충성심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구나!’
한왕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음식 중에 두, 세 가지의 음식만 먹기로 하고, 나머지 귀한 음식들은 한신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다.

“나는 두, 세 가지만 먹으면 족하니, 다른 음식들은 여러 대장이 다함께 모여 나눠 먹기로 합시다.”
한왕의 우악한 분부에 모든 대장들이 한결같이 감동하며 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대왕 전하의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사옵니다.”
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데, 실로 그 임금에 그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번쾌는 잔도 보수의 중책을 맡고, 주발, 진무 등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보니 산은 높고 길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위는 앞을 가로막고, 수목은 겹겹이 얽혀 있어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번쾌는 한숨을 쉬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조차 들었다.

‘혹시 한신 장군이 초나라를 정벌할 자신이 없으니까, 시일을 끌기 위해 계획적으로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번쾌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발, 진무와 함께 고운산(孤雲山)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고운산 일대의 산세가 어찌나 험악한지 새도 날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길을 보수하려면 10만의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적어도 1년은 걸려야 할 게요. 그런데 단 만 명으로 한 달 안에 보수하라고 하니 나는 죽어도 못하겠소.”
그러자 주발과 진무도 입을 모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나왔지만 명령을 직접 받은 번쾌로서는 간단히 단념할 수는 없었다.

“한신 장군은 준법정신이 지독히 강한 사람이오. 게다가 대왕께서도 한신 장군을 무척 신임하고 계시오. 따라서 우리가 임무를 시도조차 안 해보고 포기해 버렸다가는 반드시 참형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못 할 때는 못 하더라도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합시다.”
번쾌는 주발과 진무를 격려해 가며, 그날부터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보수공사를 시작하였다.

바위를 밑에서 파헤쳐 언덕 아래로 굴리고, 큰 나무는 밑동을 도끼로 끊어서 계곡 아래로 던져 버리고, 높은 곳의 흙은 깎아 내려 낮은 곳을 메우고, 이쪽 벼랑과 저쪽 벼랑 사이에는 다리를 새로 걸쳐 놓았다.

이처럼 험악한 작업을 온종일 계속하자니 바위에 치어 죽고, 나무에 깔려 죽고, 벼랑에 떨어져 죽는 희생자가 날마다 속출하였다.

“장량이란 자가 잔도를 불태워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나 고생시킬까.”
“누가 아니래! 그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장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네. 그런 놈이 무슨 빌어먹을 군사(軍師)란 말인가?”
군사들은 너무도 고생스러워 ‘장량 선생’ 욕하기를 입에 달고 일했다.
잔도 보수공사가 10여 일쯤 계속되고 있을 무렵에 대부(大夫) 육가(陸賈)가 1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돌연 공사 현장에 나타났다.

“아니, 대부께서 이 험악한 곳에 웬일이시옵니까?”
그러자 육가가 대답한다.

“출동 준비가 다 되었으니 처음 말한 대로 한 달 안으로 공사를 끝내도록 하라는 대원수의 명령을 전하러 왔소이다. 아울러 기일 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면 장군을 엄중 처벌하겠다는 말씀이오.”
육가의 말을 듣고 번쾌는 입을 딱 벌리고, 화를 버럭 내며 항의하였다.

“대원수는 해도 너무하시오. 10만 군사로 1년이 걸려도 끝낼까 말까 하는 공사를 만 명만 가지고 어떻게 한 달 안에 끝내라는 말씀이오? 공사 기일을 연기해 주기 전에는 나는 죽어도 못 하겠소. 아무리 대원수의 명령이라도 나로서는 못 해내겠다는 말이오!”
번쾌는 악에 받쳐서 육가에게 대고 마구 퍼부어 대었다.

그러자 육가는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러고 나더니 번쾌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대원수는 보수공사가 한 달 안에 불가능한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적(敵)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장군을 다그치고 계신 것이오. 그러니 장군은 그런 줄 알고, 군사들을 더 많이 보내주기 전에는 보수 공사를 기일 내에 못 하겠노라고 대왕 앞으로 표문(表文)을 올리도록 하시오. 대원수는 그렇게 하기 위해 장군을 일부러 다그치고 있는 것이오. 그러고 난 후 공사 지원군이 도착하거든 이렇게 저렇게 하시오...”
번쾌는 그제야 한신의 깊은 계략을 알아채고, 밖으로 나와서 군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대원수는 보수공사를 한 달 안에 끝내라는 엄명이지만, 공사가 워낙 험난하여 우리들만으로는 도저히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대왕전에 긴급히 표문을 올려 지원 군사를 더 많이 공급받도록 하겠다.”
그러나 육가는 그런 말은 못 들은 체하고 군사들에게,

“그대들은 한 달 안에 이 공사를 끝내지 못하면, 대원수의 엄중한 처벌이 계실 것이니 모두들 전력을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도록 하라!”
하고 새삼스럽게 엄중한 지시를 내리고 본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육가가 공사 현장을 떠나 버리자, 번쾌는 예정했던 대로 한왕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대왕 전하! 신은 대원수의 명에 의하여 잔도 복구공사(棧道 復舊工事)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공사를 하는 전 구간의 지세가 워낙 험난한데다 희생자까지 속출하고 있는 형편이온데, 오늘은 대원수로부터 기일 안에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까지 받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대왕을 모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과된 책임을 그르쳐 본 일이 없사오나, 이번만은 대원수의 손에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대왕께서 신의 목숨을 구해 주시려거든 잔도 보수공사의 지원군을 하루속히 보내주시옵소서. 이에 아장, 이륭을 보내 이 표문을 올리옵니다.”

한왕은 번쾌의 표문을 받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신의 계략을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한왕은 한신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잔도 보수공사에 병력이 더 필요한 모양이니 번쾌 장군에게 정병 천 명을 더 보내기로 하시오.”
모두가 적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번쾌가 천 명의 지원군을 받고 나자, 뒤이어 한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이 날아왔다.

“장군은 주발, 진무 등의 두 막료와 함께 잔도 보수공사의 명목으로 보낸 천 명의 정예 군사를 두 부대로 편성하여 한밤중에 태산준령을 넘어가 초(楚)의 대산관(大散關)을 불시에 기습하여 대번에 점령하도록 하라.”
번쾌는 작전명령을 받고, 즉시 기습부대를 편성하여 태산준령을 타고 넘어 대산관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초나라 군사들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 제 9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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