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92화
2021. 6. 4. 07:5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92화
☞ 엄정한 군법 시행으로 다져지는 군율
은개는 원문이 닫혀 있음을 보고 수문장에게 호통을 내지른다.
“내가 왔으니 원문을 빨리 열어라.”
그러나 수문장은 문 앞을 가로막으며 대답한다.
“누가 와도 원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대원수님의 엄명이시옵니다.”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앞에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네 놈은 내가 감군 대장인 것을 모른다는 말이냐?”
“장군께서 감군 대장이심을 소관이 어찌 모르오리까? 그러나 대원수께서 누가 와도 허락을 내리기 전에는 원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엄명이 계셨습니다.”
은개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대원수라는 사람이 이런 사소한 일까지 까다롭게 군대서야 말이 되는 소리냐! 그러면 네가 원수부에 달려가서 내가 왔으니 문을 빨리 열게 하라고 전해라.”
마침 그때 시종 무관이 달려 나와 문을 열어주며 은개에게 말한다.
“대원수께서는 감군 대장이 오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원수부로 모셔 오라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은개는 내심
‘그러면 그렇지! 제가 감히 나를 어쩌려고?’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한 걸음으로 한신과 많은 대장 앞에 의젓하게 나타났다.
한신은 은개를 보자,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대왕의 명령을 받들고 오늘 ‘전시 군법’을 공포한 바가 있소. 각 대장들의 출동상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비상소집을 하였는데, 다른 대장들은 군령을 지키고 모두 시간에 맞춰 원수부에 도착하였으되, 귀관은 감군 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군령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서 군무를 어떻게 수행해 나갈 생각이오?”
한신이 차분하게 타이르듯이 말하자, 은개는 의젓하게 버티고 서서 오히려 한신을 나무라듯 말한다.
“나도 긴급 소집령을 받기는 하였소. 그러나 공교롭게도 가까운 친구가 찾아와 술을 한 잔씩 나누다 보니 시간이 약간 늦었소이다. 너그럽게 용서하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늦게 온 것을 미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신이 다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귀관은 군령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것은 군령을 가볍게 여긴 증거요. 군령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는 것이오. 따라서 군법에 따라 단죄(斷罪)를 해야 하겠소.”
그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명한다.
“여봐라! 군율을 어긴 은개를 당장 포박하여라!”
은개는 모든 대장들이 보는 앞에서 포박을 당하자,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였다.
한신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용서 없이 꾸짖는다.
“그대는 들어 보라. 대장이라는 자는 군령을 받게 되면 그날부터는 집을 잊어야 하고, 작전명령을 받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모와 가족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자기 자신의 목숨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그대는 오래 전부터 국록을 먹어 오면서 어찌하여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 국사(國事)를 그르쳤다는 말이냐?”
한신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군정사(軍政司)를 불러 묻는다.
“은개 장군은 법령을 어기고 늦게 출두했는데, 그 죄는 어느 항목에 해당하오?”
군정사 조참이 앞으로 나와 대답한다.
“시간에 늦게 온 것은 만군지죄(慢軍之罪)에 해당하며, 참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사옵니다.”
“그러면 법령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은개를 당장 끌어내 참형에 처하도록 하오.”
그야말로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은개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며 원문 밖으로 끌려 나오자니 마침 번쾌의 모습이 눈에 띄므로 은개는 번쾌에게 눈짓을 하며 자기를 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번쾌는 한신이 준법정신에 철저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라, 은개의 구명운동 같은 것은 감히 입도 떼지 못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은개의 부관은 그 사실을 한왕에게 급히 알렸다.
“대원수께서 지금 은개 장군을 참형에 처하려 하고 계시옵니다. 대왕께서는 급히 은개 장군의 참형을 중지시켜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듣자 크게 놀며, 승상 소하를 불러 걱정스럽게 말한다.
“한신 장군은 출동도 하기 전에 은개 장군을 참형에 처한다고 하니 이런 불상사가 어디 있단 말이오? 대장들을 그렇게 다루어서 우리가 적을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겠소? 승상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승상의 의견을 한번 들어 봅시다.”
“대왕께서 삼군(三軍)의 통수권을 한신 장군에게 이미 맡기셨으니 너무 간섭을 아니 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삼군의 통수권을 한신 장군에게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대장을 함부로 죽이려는 것을 알고서야 어찌 모른 척하고 있으라는 말씀이오?”
“사정을 알아보니 은개 장군은 분명히 군법을 범한 죄인이었사옵니다. 대원수가 죄인을 처단하려는 것을 어찌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으오리까? 사령관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서 전쟁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범법자 한 사람을 아끼려다가 군 전체를 문란시켜 놓으면, 그 군대는 오합지졸(烏合之卒)과 다름없는 군대가 되어 버리는 법이옵니다. 그러므로 은개를 처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래도 은개와의 사사로운 우정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은개 장군은 나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오. 처벌을 하더라도 죽이지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자고로 왕법무친(王法無親, 왕법에는 친분이 없다)이라는 명훈(明訓)이 있사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려 나가시는데 친하고 꺼림을 가리시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옵니까?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소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놓고, 숫제 어전에서 물러가 버리는 것이었다.
한왕은 소하의 말이 정당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은개의 목이 잘려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광야군(廣野君, 역이기 노인)을 급히 불러 이렇게 명했다.
“내가 조서를 써줄 테니, 경은 한신 장군에게 급히 달려가 은개를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보시오.”
역 노인이 조서를 가지고 형장(刑場)으로 급히 달려갔다.
때마침 형리(刑吏)들이 은개의 목을 베려고 형틀 위에 올려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말을 달려오던 역 노인은 멀리서부터 손을 휘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대왕의 조서를 가지고 왔으니 처형을 잠깐만 멈추어라!”
그러고 나서 원수부로 달려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난 대왕의 조서를 가지고 대원수를 만나러 오는 길이다.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원문을 열어라.”
그러나 파수병들은 문을 열어주기는커녕 역 노인을 다짜고짜로 말에서 끌어내려 죄수처럼 땅바닥에 꿇어앉히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수하를 막론하고 영내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되어 있사옵니다. 그런데 역 대인께서는 법을 무시하고 말을 마구 달려오셨으니, 이 사실을 대원수께 상신하여 처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수문장이 한신에게 달려가 역 노인의 일을 보고하니 한신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영내에서 말을 달리지 못하게 한 것은 적의 기습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역 대인께서도 그만한 군율을 잘 알고 계실 텐데, 왜 그런 법을 어겼는지 이상하구나. 혹시 역 대인께서 주상의 특명이라도 가지고 오신 겐가?”
그러자 수문장이 대답하는데,
“역 대인께서 대왕의 조서를 가지고 오신 것만은 사실이옵니다.”
그러자 한신은 군정사 조참을 불러 물어본다.
“영내에서 말을 달린 자는 어떻게 처벌하도록 되어 있소?”
“영내에서 말을 달린 자는 경군죄(輕軍罪)로 참형에 처하게 되어 있사옵니다.”
한신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역 대인도 법을 어겼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옳을 일이오. 그러나 역 대인은 대왕의 조서를 가지고 오셨다고 하니, 그러면 역 대인을 대신하여 그의 마부(馬夫)를 참형에 처하도록 하오.”
대원수 명에 의하여 역 노인의 마부와 은개가 함께 목이 잘려 나갔다.
역 노인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혼비백산하여 대궐로 급히 돌아가 한왕에게 사실대로 아뢴다.
“신이 만약 대왕의 조서를 가지고 가지 않았더라면, 신도 틀림없이 목이 달아났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며, 승상 소하를 불러 따지듯이 꾸짖는다.
“내가 은개에게 특사를 내린다는 조서를 보냈지만, 한신은 은개를 기어코 죽여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역 대인의 마부까지 죽였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불충스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본시 장수가 전쟁에 임했을 때는 비록 대왕의 어명이라도 듣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무방한 법이옵니다. 그것은 사령관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은개 장군을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느냐 말이오?”
“대원수가 굳이 은개 장군을 죽인 것은 군율을 어긴 권력이 있고 지체가 높은 사람 하나를 죽임으로써 사령관의 권위와 명령의 확립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옵니다. 이번 일로 인해 다른 대장과 병사들에게는 사령관의 위엄이 보여 졌을 것이고, 대원수의 지휘와 통솔의 격(格)이 한층 높아졌을 것이옵니다. 하오니 대왕께서는 하나도 염려하지 마시옵고, 한신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파초 대원수로 임명하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소서. 이제 항우 따위는 두려워하실 바가 아니옵니다.”
한왕은 그 말에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아 문득 역 노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승상의 말씀을 들어 보면, 한신 장군이 훈련을 잘 시켜 놓아서 우리 군사들이 막강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는데, 광야군이 보시기에는 어떠하셨습니까?”
“신의 마부가 억울하게 희생된 일을 생각하면, 한신 장군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씀드리오면, 한신 장군이 군사 훈련을 체계적으로 열성을 가지고 시킨 덕택에 지금 우리 군사들의 전투력은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할 만큼 막강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항우도 언젠가는 한신 장군의 손에 제압당하고야 말게 될 것이옵니다.”
“허어... 광야군께서 보시기에도 우리 군사들이 그처럼 막강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오?”
“우리 군사들이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막강해진 것은 한신 장군이 모든 일을 병법과 군법에 기초하여 군사들을 조련(調鍊)한 결과인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한신 장군이 은개를 참형에 처한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훈련으로 군사를 단련시키는 장수가 명령을 듣지 않는 범법자를 법에 의해 처단했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오리까.”
“은개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참형에 처해 버렸는데, 그래도 잘했다는 말씀이오?”
역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 옛날 전국시대에 천하의 명장이었던 손무(孫武)는 군율을 바로잡기 위해 제왕(齊王)이 총애하는 오희(吳姬)라는 궁녀의 목을 베어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과감한 처단 없이는 수만 수천 군사의 군율을 바로잡기가 어려운 것이옵니다. 대왕께서는 그런 점을 통촉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역 노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급했던 불찰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 않아서 한신에게 술과 안주를 듬쁙 보내 주면서 치하의 조서까지 내렸다.
“장군은 나약하던 군사들을 법으로 다스리고 훈련으로 연마하여 막강한 군사로 성장시켜 놓았으니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오. 일찍이 천하의 명장이었던 손무는 군율을 확립하기 위해 제왕이 총애하던 궁녀를 참형에 처한 고사(故事)도 있었거니와, 장군은 은개가 나의 친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군율을 바로 잡기 위해 그를 단호하게 처단했으니, 그 용기와 공정성에 나 역시 감격해 마지않는 바이오.
이에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주효(酒肴)를 약간 보내드리오.”
한신은 주효를 받고 나자, 즉시 입궐하여 한왕에게 사은숙배를 올리며 아뢴다.
“신은 오로지 대왕 전하께 충성을 다하고자 법을 공정하게 시행했을 뿐이온데, 과분하신 찬수(饌需)를 내려 주시와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은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차후에는 더욱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다하겠사옵나이다.”
그러자 한왕이 한신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으며 감격에 찬 소리로 말한다.
“초패왕 항우를 정벌할 사람은 오직 한 장군뿐임을 나는 지금에야 절실히 깨달았소이다.”
- 제 9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