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94화

2021. 6. 6. 07:47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94화

☞ 방심하는 장한

그 무렵 대산관의 수비 총책임자는 대장 장평(章平)이었다.
장평에게 어느 날 군사 범증으로부터 돌연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날아들었다.

“대산관은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한왕 유방은 대호(大虎)와 같은 인물이어서 우리의 허(虛)를 어디로부터 찔러 올지 모르니 장군은 불철주야로 관문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장평은 이러한 경고문을 받아 보고, 관문 경비에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더구나 그 무렵 항간에는
‘한왕 유방은 초를 치기 위해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하여 함양으로 진격할 잔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중이다.’라는 소문이 널리 떠돌고 있었으므로 장평은 대산관의 경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던 차였다.

한편, 삼진왕의 한 사람인 장한은 한신이 한나라로 들어가 대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비웃었다.

“한왕이 한신이라는 졸장부를 대원수로 발탁하였다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구나. 한신이라는 자로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구차하게도 남의 밥을 빌어먹던 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깡패를 만나서는 그놈들을 물리칠 배짱이 없어 놈들의 가랑이 밑을 기어나갔다는 놈이 아니더냐? 그런 자가 우리 초나라에선 출세할 가망이 없으니까 한나라로 도망을 가버린 처지인데, 유방이 그런 못난 자를 어쩌자고 대원수로 발탁을 하였단 말인가? 하하하, 그러려니 아무리 한신이 대원수가 아니라 대왕이 되었다 하기로서니 그런 못난이를 누가 감히 두려워할 것인가!”
이렇듯 백전노장 장한에게는 한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는 한신을 이렇게도 비웃어 주었다.

“한신이 지금 우리를 치기 위해 잔도를 보수 중이라고 하지만, 천 리가 넘는 험한 산길을 제대로 고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만 병사로 동시에 보수를 시작하여 족히 1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겨우 만 명의 군사로 길을 닦고 있다니 정신이 올바로 박힌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장한은 한신을 이렇게나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대산관을 수비하고 있는 장평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한신이 대산관에 이르는 잔도를 고쳐서 우리에게 쳐오려면 적어도 1년은 더 걸려야 할 것이오. 이러나저러나 한신이라는 인물은 애시 당초 우리와는 상대도 되지 못하는 인물이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겠소이다.”
장평은 그 서한을 받아 보고, 그때부터는 자기 자신도 경비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장평이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데, 수하 장병이 급히 달려와 큰소리로 아뢴다.

“사령관님! 어젯밤 야음에 유방의 군사 백여 명이 우리 진영으로 귀순을 해왔사온데, 저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뭐야! 유방의 군사가 우리에게 귀순을 해왔다고? 음, 알았다. 내가 곧 나갈 테니 그들을 사령부에 모두 대기시켜 놓아라!”
장평은 유방의 군사들이 귀순해 왔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하며 급히 옷을 추스려 입고 나왔다.

사령부로 나와 보니 백여 명의 귀순병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거짓 귀순병들이었다.

“우리한테 귀순해 왔다는 유방의 군사들이란 바로 이 사람들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오랫동안 헐벗고 굶주려 온 탓인지 모두가 거지와 같은 몰골들이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첫눈에 보아도 거지와 다름없는 처량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장평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유방의 군사라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백여 명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유방의 군사라면 유방을 위해 충성을 다할 일이지, 어찌하여 우리에게 귀순해 왔느냐?”
그러자 선임인 듯 한 젊은이가 전체를 대신하여 큰소리로 대답한다.

“충성도 좋지만 밥을 굶고서야 충성을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저희들은 굶어 죽기가 억울하여 초나라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는 말이냐?”
“유방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저희들에게 잔도를 보수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하여 밥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공사를 한 달 안에 끝내라고 다그치니 아무리 충성을 하고 싶어도 우리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다 보니 저희들은 생각다 못해 초나라로 귀순을 해오게 된 것입니다.”
“잔도 보수의 책임자는 누구였느냐?”
“번쾌라고 하는데, 어찌나 사나운지 밥도 먹이지 않으면서 우격다짐으로 잔도 보수공사에 다그치기만 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장평은 그들이 혹시나 거짓으로 귀순한 것이 아닌가 싶어 여러 가지로 의문을 가지고 묻고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장 귀순을 하였다는 기색은 아무 데서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이에 장평은 마음을 놓고 귀순병에게 말한다.

“만약 너희들이 거짓으로 귀순해 온 사실이 밝혀지면 용서 없이 처단을 하겠지만, 진심으로 귀순을 해 왔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겠다. 너희들 중에 누가 주동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주모자는 앞으로 나와 보아라!”
그러자 요룡과 근무라는 두 젊은이가 좌중에서 벌떡 일어나며,

“귀순을 책동한 주모자는 저희 두 사람이었습니다.”
“오오, 너희들은 참으로 용감한 장정들이로구나!”
장평은 그들의 용기를 칭찬해 주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두 사람은 군에 끌려오기 전에는 무엇을 해 먹고 살아왔느냐?”
“저희들은 군에 끌려올 때까지 보안군이라는 두메산골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아왔사옵니다.”
“사냥꾼으로 살아왔다면 활 쏘고 창 쓰는 재주는 보통이 아니겠구나?”
“활 쏘고 창 쓰는 재주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사옵니다.”
장평은 그들의 진실성을 떠보려고 의심에 찬 질문을 여러 가지로 물어보자, 그들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저희들이 도망쳐 왔겠습니까?”
“그러면 너희들의 소망이 무엇이냐?”
“우선은 밥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고, 시국이 평온해지거든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사 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 소원대로 밥을 배불리 먹여 주고, 시국이 안정되는 대로 기꺼이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겠다.”
장평은 귀순병들의 희망을 기꺼이 들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유방은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했다고 하는데, 한신은 누구의 연줄로 그처럼 높게 쓰이게 되었는지 너희들은 그 내막을 알고 있느냐?”
귀순자들의 입을 통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려는 심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요룡이 대답한다.

“한신은 본시 구변이 뛰어나서 그가 병법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승상이 강력히 추천하는 바람에 대원수로 발탁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신이 대원수로 발탁된 뒤에 모든 장졸들이 그의 명령에 잘들 복종하고 있느냐?”
그러자 이번에는 근무가 대답을 한다.

“장병들이 한신 대원수의 명령에 잘 복종하냐구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졸병들조차도 한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번쾌 장군 같은 사람은 한신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있어서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젠가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한왕 조차도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요룡과 근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두 사람은 많은 동료들을 귀순시키는데 공로가 컸으므로 특별히 ‘대기패관(大旗牌官)’에 임명하겠다.”
대기패관이란 싸움이 있을 때 군기(軍旗)를 휘두르며 사병들의 사기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장평은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귀순해 온 요룡과 근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들에게 파격적인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여 주고, 씻기게 한 후에 깨끗한 옷을 주어라!”
하고 명하였다.

장평은 귀순병들을 이같이 처리하고 나니 더욱 자신이 생겼다.
그리하여 삼진왕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한왕 유방은 두려워 할 존재가 못 되니 너무들 걱정을 마시오.’하고 통보까지 해주었다.

한편, 항우는 팽성으로 천도한 이후 날마다 주색을 즐기며 정사는 거의 돌보지 않았다.
범증은 크게 걱정스러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주색에 미쳐버린 항우는 범증의 간언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항간에는

“항우가 그 꼴이 되어 가지고는 나라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범증은 그럴수록 애가 타서 어느 날 밤에는 천문을 살펴보려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 연후에 동서 사방의 별들을 살펴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남방 하늘 기슭에 떠있는 장성(將星) 별 하나가 유난하게도 밝은 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파촉이 서남방에 해당하는데, 그쪽 장성 별이 저렇게도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한왕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에게 쳐들어오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범증은 천문을 살펴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왕이 초나라를 치기 위해 한신을 파초 대원수로 발탁하였다고 하더니 만약 한신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아쳐 오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일찍이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본 범증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막막해 오자, 항우에게 또다시 간언을 하였으나 항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부(亞父)는 유방과 한신 따위에게 왜 이다지도 겁을 내시오? 그처럼 걱정이 되시거든 계량과 계향 두 장수에게 각각 군사 3천씩을 주어서 삼진왕에게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하시오.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오.”
범증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삼진왕 중에서도 최강자인 장한을 직접 찾아가 상의하였으나 장한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군사께서는 무엇 때문에 유방이나 한신 따위를 그처럼 경계하십니까? 유방이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했다고 하지만 한신으로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다니던 천하의 못난 놈입니다. 그런 못난 놈이 어찌 감히 우리에게 덤벼올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도 길이 끊겨서 못 올 것입니다. 천 리 길을 보수하려면 10만의 병력으로 1년이 걸려야 될까 말까인데, 겨우 일 만의 군사로 길을 닦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제아무리 빨라도 10년 내에는 길조차 완성하기가 벅찰 것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고, 발 뻗고 주무세요.”
백전노장인 장한조차도 유방과 한신을 우습게 여기는 데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범증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라가 망하려고 모두들 머리가 돌아 버렸는가 보구나!’
하고 혼잣말로 탄식을 하고 말았다.

- 제 9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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